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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Jun 25. 2020

플로리다 프로젝트

(The Florida Project, 2017) 진실로 아름다운 것

영화의 주인공 6살 무니(Moonee)는 디즈니 월드 바깥쪽 모텔촌에 산다. 유일한 가족인 엄마 헬리(Halley)는 뚜렷한 직업이 없다. 온몸이 문신으로 뒤덮여 있고, 욕설과 담배와 대마초를 물고 산다. 무니와 자매처럼 보일 만큼 어리고, 다정하고, 익살맞은 엄마이지만 경제적 능력이 없고, 거짓말에 능숙하며, 세상과 타인에게 때로 폭력적이다. 무니는 친구 스쿠티, 젠시 등과 어울려 모텔촌 주변의 관광지, 들판, 버려진 콘도들을 누빈다. 사고를 쳐서 가끔 곤경에 처하긴 해도 무니는 매일이 즐겁다. 행인들에게 잔돈을 얻어 공짜 아이스크림을 사서 나눠 먹고, 사파리에는 갈 수 없지만 들판에서 소들을 구경하며 즐거워한다. 지역 교회에서 가끔씩 트럭을 몰고 와 빵을 나눠 주는데, 베프인 젠시와 함께 가장 좋아하는 나무에 올라 딸기잼을 발라 먹으면 세상 부러울 게 없다.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확고한 정체성과 색깔은 6살 아이인 무니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풀어간 지점에 있다. 빈곤, 매춘, 히든홈리스 같은 묵직한 사회적 이슈들이 6살 아이의 시선으로 그려진다. 이는 영리한 스토리텔링의 수준을 넘어 순수함과 비천함, 희망과 슬픔이 교차하는 현실의 지점들을 마법처럼 구현하는 중요한 장치다. 실제로 나는 아이의 시선에 맞춰 낮은 곳에 묶어둔 카메라 앵글 덕분에 가슴이 아릴 만큼 황홀한 향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환상을 느끼기도 했다. 내 어린 시절 기억들, 나의 눈이 더 땅에 가까웠던 때의 기억의 조각들과 영화에서 구현한 이미지가 너무나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 우리에게 세상은 얼마나 크고, 높고, 기괴하게 선명했던지.


어린아이의 시점으로 풀어낸 영화나 소설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 정도로 완벽하게 시간 여행의 경험을 선사한 영화는 개인적으로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처음이다. 이는 감독 션 베이커의 의도이기도 했다. 

“I wanted to almost make it seem as if the audience is coming into the theater with their senses enhanced. When you’re a child, the colors are brighter [and the] sounds are louder” 


기본적인 스토리가 6살 아이의 시선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관객의 추측을 요하는 장면들이 있다. 예를 들어 헬리가 생계를 위해 매춘을 하는 시퀀스는,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는 무니가 혼자 욕실에서 목욕을 하는 장면으로 표현된다. 그래서 무니가 천진난만한 얼굴로 인형의 머리카락을 빗으며 목욕을 하는 컷이 반복될수록 관객의 슬픔은 무거워진다. 



냉혹한 현실과 선물 같은 일상의 혼재를 표현한 방식도 인상적이다. 예를 들어 무니가 사는 모텔에는 교회에서 공짜로 음식을 나눠주는 푸드트럭이 온다. 모텔 주인은 그 트럭이 볼상 사납다. 빈대가 나오는 지저분한 건물일지언정 외부만큼은 돈을 들여 보라색 페인트칠을 했는데, 푸드트럭 덕분에 '매직캐슬'이란 이름이 무색한 거지소굴로 보인다. 하지만 당당하고 야무지게 빵을 골라 행복한 얼굴로 돌아서는 무니의 얼굴을 보며 나는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무니가 뿜어내는 천진한 행복감은 빈대가 들끓는 더러운 모텔마저 매직캐슬로 바꿔 버릴 것만 같다.  



나는 모든 예술작품, 특히 사회참여적인 예술작품이 냉엄한 현실을 반드시 있는 그대로 묘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들은 이런 방식이다. 독특하고 고유한 관점으로 현실을 우회해 보여주지만 그렇게 잡아낸 삶의 조각들은 슬픔과 부당함을 (직접적인 묘사보다) 더욱 명징하게 드러낸다. 이런 작품들은 대상을 함부로 동정하거나, 미화하거나, 착취하지 않으면서도 깊은 공감을 이끈다. 관객들은 곤경에 처한 인물들과 부당한 현실에 일말의 책임을 느낄 수밖에 없다. 무니에게 둘도 없는 가족이자 친구인 엄마 헬리, 거칠고 천박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녀 역시 험난한 어린 생활을 보냈을, 보호가 필요한 존재라는 걸 알게 하는 장면들에서 우리가 기습적으로 슬퍼지는 것처럼 말이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예쁘지만 마냥 예쁘지 않고, 슬프지만 마냥 슬픈 영화가 아니다. 나는 어린 악동들의 거침없는 장난과 욕설, 고사리 손으로 나누는 우정에서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지만 며칠이 지나도 먹먹한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무니의 엄마인 헬리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아마도, 앞으로 무니의 삶은 헬리의 삶을 닮을 가능성이 높다. 무니의 천진함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불꽃놀이처럼 사라질 천진무구함, 더없이 충만한 찰나의 행복감. 그래서 사람은 진실로 아름다운 것을 보면 느닷없이 눈물을 쏟는 모양이다. 

Happy Birthday!
“You know why this is my favourite tree…’cause it’s tipped over,
and it’s still growing.”


(+)

무니역을 맡은 배우 브루클린 프린스의 완벽한 연기에 놀라 나는 여러 인터뷰 영상을 찾아보았다. NG영상에서 브루클린 프린스는 연기 중 상대 아역배우가 아이스크림을 다 먹었다고 화를 내거나, 상대 배우가 자신을 냉담하게 대하는 장면에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메소드 연기를 하는 스타일 혹은 그렇게 밖에 연기할 수 없는 단계가 아닌가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어쨌거나 나는 이 소녀에게 완전히 반했다. 브루클린 프린스가 나오는 영화는 무조건 볼 생각이다. 


(+)

모텔 매니저인 바비(윌리엄 드포)가 모텔 주변에서 노는 아이들에게 접근한 소아성애자를 쫓아내는 장면이 있다. 감독 션 베이커가 장소 헌팅을 다닐 때, 실제로 어떤 모텔의 매니저가 베이커를 소아성애자로 생각해 쫓아내려했던 에피소드를 그대로 살린 것이라 한다. 왠지 기억하고 싶은 이야기라 굳이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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