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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Mar 08. 2020

스토너 (존 윌리암스 장편소설)

본질적인 것에 대한 사랑

‘스토너’처럼 완벽하게 쓰인 소설에 대한 감상평을 남기려면 쭈뼛거릴 수밖에 없다. 너무 완벽해 해석의 여지가 없다는 뜻은 아니고, 내가 붙이는 어떤 주석도 작가의 문장만큼 적확하지 못할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느낀 감동을 누군가 정확하게 읽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그치질 않아 두서없는 감상이나마 적어둔다.  

 

스토너의 학자로서, 교육자로서, 배우자로서, 연인으로서, 아버지로서의 모습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데 내가 가장 동요한 부분은 교육자로서의 스토너이다. 다음은 그가 죽음을 맞이할 무렵의 문장이다.  


“그는 또한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지만, 거의 평생 동안 무심한 교사였음을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언제나 알고 있었다. 그는 온전한 순수성, 성실성을 꿈꿨다. 하지만 타협하는 방법을 찾아냈으며, 몰려드는 시시한 일들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는 지혜를 생각했지만, 오랜 세월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무지였다.” (p.387-388)     


나는 저 문장들을 전후좌우로 읽지 않을 수 없었다. 내게 교육자로서의 스토너는 무심한 교사가 아닌 영웅에 가깝기 때문이다. 특히 교수인 스토너가 대학원생 찰스 워커의 박사 과정 예비 시험 장면에서 충돌하는 장면을 읽을 때, 내가 세상을 향해 종종 느꼈던 역겨움과 답답함이 몰려와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박사과정을 준비하고 싶은 찰스 워커는 그러나 ‘게으르고, 정직하지 않고, 무지하다’.  찰스 워커와 비슷한 신체적 장애를 가진 교수 로맥스는 어떻게든 그를 구하려 하지만, 스토너는 완강히 거부한다. 

“저 친구가 교육자가 되는 것은....재앙이야.” 


격론 끝에 예비 구술 시험이 끝나고, 스토너는 젊은 나이에 전사한 친구 '데이브 매스터스'를 떠올리며 오랜 친구 핀치에게 속마음을 털어 놓는데, 나는 이 부분을 읽다가 조금 울고 말았다.       

“우리 셋이 함께 있을 때 그 친구(데이브 매스터스)가 뭐라고 했냐면....대학이 소외된 자, 불구가 된 자들이 세상에서 도망칠 수 있는 피난처라는 얘기를 했어. 하지만 그건 워커 같은 친구들의 이야기가 아니었지. 데이브라면 워커를....세상으로 보았을 걸세. 그러니까 그 친구를 허락할 수가 없어. 만약 우리가 허락한다면, 우리도 세상과 똑같이 비현실적이고 그리고....우리에게 희망은 그 친구를 허락하지 않는 것 뿐일세.”  (p.235)   


스토너에게는 학문을 대하는 진실한 자세, 부족할지언정 스스로에게 정직한 삶의 태도가 그 어떤 치열함보다 치열한 현실이었다. 그리고 그는 당장의 안정과 안심에 화답하는 '희망'을 거부한 대가로 결국 교수로서의 경력에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한편 나는 찰스 워커와 로맥스처럼 뒤틀린 캐릭터들을 굳이 신체적인 장애가 있는 이들로 설정한 부분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체 장애와 정신 장애의 연관성을 말하려는 건 아닐 것 같다. 그렇다고 건강함, 장애, 선함, 악함의 조합에 관한 평범한 전복으로도 읽히지 않았다. 의문을 뇌 한구석에 띄워두고 있다가 작가 존 윌리엄스의 인터뷰를 읽으니 조금 감이 잡혔다.      


“Teaching to him is a job -a job in the good and honorable sense of the word. His job gave him a particular kind of identity and made him what he was...It’s the love of the thing that’s essential.”   (가르치는 일은 그에게 특정한 정체성을 부여했다. 그건 본질적인 것에 대한 사랑이다)     


스토너가 사랑한 본질적인 것들은, 일신의 안녕과 신체적 장애를 향한 피상적인 동정보다 중요했다. 스토너를 장애에 대한 편견을 가진 이로 몰아간 로맥스, 자신의 게으름과 무지를 끝없이 회피하며 책임을 전가하는 찰스 워커에게도 지켜야 할 중요한 것들이 있었을테지만, 나는 그것들이 스토너가 지키고 싶었던 본질보다 더 본질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책의 뒷표지에 이런 말이 있다. '슬픔과 고독을 견디며 오늘도 자신만의 길을 걷는 (중략) 특별할 것 없는 한 남자의 인생'(아마 출판사가 쓴 카피로 보인다). 내가 보기에는 가당치 않은 표현이다. 스토너는 "셰익스피어가 300년의 세월을 건너 뛰어 말을 걸고 있는"(p.22)경험을 했고, 책을 쓴다는 "경이롭고, 커다란 책임이 따르는 일에 무모하게 나섰으며"(p.145), "공부를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수단이 아니라 인생 그 자체로 생각하는 모습"(p.351)의 학생들과 함께 가르치는 일의 희열을 느껴봤다. '서로에게 진심을 다하는 게 필연'이며 '기존 관념'이 모두 달라지는 연인과의 사랑도 했다. 아무리 봐도 비범하고 아름다운 삶이다. 이에 대한 인식은 작가 존 윌리암스의 인터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I think he’s a real hero. A lot of people who have read the novel think that Stoner had such a sad and bad life. I think he had a very good life. He had a better life than most people do, certainly. He was doing what he wanted to do, he had some feeling for what he was doing, he had some sense of the importance of the job he was doing. He was a witness to values that are important...”   

(내 생각에 그는 진정한 영웅이다. (중략) 그는 그가 원했던 일을 했고, 그 일에 대해 애정이 있었고, 그가 하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중요한 가치들의 증언자였다)


'스토너'는 작은 강처럼 소박하고 거대 산맥처럼 웅장한 소설이다. 모든 문장은 성실하고 필연적이다. 깎아내리는 조각처럼 유려하고 뚜렷하게 세우는 방식이라기보다, 주인공을 둘러싼 공기의 무게와 색을 달리해 서사와 캐릭터를 현상하는 소설이란 생각도 했다. 


앞서 말했듯 나는 스토너가 비범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서 슬픔에 멍해지고 말았다. 이 책을 추천해준 친구에게 내가 처음 한 말은 "나도 아마 이렇게 죽겠지?"였다.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줄리언 반스의 말은 내가 느낀 감정을 어느 정도 설명하는 것 같다. 

"스토너의 슬픔은 이 작품 특유의 것으로 더 순수하고 덜 문학적인, 인생의 진정한 슬픔에 가까운 무엇이다. 독자인 당신은 이 소설에서 슬픔이 다가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종종 인생의 슬픔이 다가오는 것을 볼 수 있었던 때 그랬듯이, 속수무책으로 말이다."(가디언, 2013년 12월 13일)


'인생의 진정한 슬픔에 가까운 무엇'을 내가 알고 있는지, 스토너를 읽고 난 후 나를 덮쳐버린 무엇이 그 슬픔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문학이 줄 수 있는 최선의 아름다움이 완벽하게 날 덮쳐 버렸다는 것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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