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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Feb 28. 2020

프랑스 영화 세 편

2016년 7월 2일

(2016년 7월 2일 씀)


난 아직 유럽에 가 본적이 없다. 사람들이 말하길 유럽은 나이 들기 전에 꼭 가야한다는데, 글쎄. 기분 같아서는 나는 왠지 안 늙을 것 같다. 엄청난 망상일 수도 있지만. 이십대 때보다 오히려 지금 정신은 더 가뿐하다. 사십대 때도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런데 최근 프랑스라는 나라에 대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호기심이 일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 촬영한 영화 세편 때문이다. 세느강, 에펠탑, 루브르 박물관에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던 내가 영화 몇 편에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프랑스라는 나라, 내가 직접 밟고 냄새 맡으며 사람들과 부대껴보기 전까지는 도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첫 번째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Midnight In Paris, 2011)


http://www.youtube.com/watch?v=HkdCr9HlRE0


우디 앨런 감독의 <미드나잇 인 파리>. 남자 주인공이 너무 꺼벙해 보여서 별로 보고 싶지 않았는데 우연히 보게 된 장면들에서 들려오던 재즈 음악들이 너무 좋았다. 영화 제작 과정에서 대부분의 제작자들이 음악에 정성을 쏟긴 하겠지만, 가끔 이건 정성이 아니라 애정이다 싶은 영화 음악들이 있다. 이 영화가 그렇다. 우디 앨런 감독이 음악애호가라는 것이 많이 알려진 사실이긴 하지만 말이다.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를 재즈가 좋아서 봤는데, 로코 장르를 지독히 싫어하는 나조차 올타임페이버릿 로코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도 비슷한 수순을 밟았다.

 

비오는 날의 파리 냄새 (fly 아니고, Paris;)까지 담아낸 영화다. 헤밍웨이, 스캇 피츠제럴드, 달리, 피카소 등과 같은 거물 예술인들이 농담처럼 툭툭 등장하는 것도 반갑고 즐겁다. 일요일 아침에 뭐 기분 좋은 영화나 볼까 싶을 때 자주 보며 볼 때마다 기분좋게 취한다. 하지만 이 영화 속 파리는 여전히 남의 나라 예쁜 도시다. 주인공들이 하는 상상의 어떤 부분들이 프랑스란 정말 먼 나라로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하기 때문이다.  2010년을 사는 영화 속 주인공 소설가 길(Gil)은 1920년대 파리를 동경한다. 그러나 정작 1920년대를 사는 에이드리아나(Adiana)는 그 이전인 벨 에포크 (belle epoque)시대로 가고 싶어 한다. 


1920년대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한국인이 있을까? 어릴 때, 강박적으로 하던 상상 중 하나가 ‘내가 일제강점기에 태어났으면 어쩌지?’ 이다. 나는 독립 운동을 했을까, 매국노가 되었을까. 누가 내 콧구멍 속으로 고춧가루물을 들이부으며 동료들 이름을 대라고 하면 어쩌지? 손톱을 뽑으며 독립운동을 그만두라고 하면 어쩌지? 어린 나는 이런 끔찍한 상상을 멈추려야 멈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끔찍한 상상 속에서 나는 대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자백을 하고 말았다. 어린 시절에 나는 늘 유관순, 윤동주, 안중근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일제강점기를 살아 낸 사람들에게는 시대의 끔찍한 단면조차 일상이었을 게다.  그 시대를 산 시인 이상이 얼마나 기인이었는지도 궁금하고, 초미남이었다는 백석도 내 눈으로 보고 싶다. '아이는 엄마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라고 말했던 나혜석이 얼마나 당찬 여성이었는지도 알고 싶다. 그래도 싫다. 타임슬립을 해보고 싶지만, 한국에서 하는 건 정말 싫다.  



두 번째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 (Two Days One Night, 2014)


주인공 산드라는 몇 달간의 병가 끝에 복직을 하려한다. 그 와중에 회사는 동료 직원들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산드라의 복직 아니면 천 유로의 보너스. 많은 직원들이 보너스를 선택했지만 투표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다는 의견으로 인해 재투표가 열리고 산드라는 동료들을 설득하게 될 시간 Two days One Night 을 갖게 된다. 울면서 사과하는 동료도 있고, 문전 박대하고 욕을 쏟아 붓는 동료도 있다. 보너스를 선택한 동료들을 매정하다고 욕하기에는 그들도 산드라처럼 가난하고 사연 많은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동료들이 보너스를 포기해야만 내가 살 수 있다. 하염없이 걷는 산드라의 어깨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찬다.


<미드나잇 인 파리>와 <내일을 위한 시간> 두 영화 모두 마리옹 꼬디아르가 여자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에이드리아나를 연기한 미친 듯이 아름다운 마리옹 꼬띠아르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이런 대사를 한다. 


<미드나잇 인 파리 中 >

That Paris exists and anyone could choose to live anywhere else in the world will always be a mystery to me. (세상에 파리가 존재하는데, 왜 다른 곳에 살고 싶어하지..?)



이랬던 마리옹 꼬띠아르가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는 지친 몰골의 산드라가 되어 이틀 내내 꼬질꼬질한 티셔츠를 입고 이집 저집의 문을 두드린다.



<내일을 위한 시간 中 >

Everytime I feel like a beggar, a thief coming to take their money.

(내가 거지가 된 거 같아, 그들 돈을 뺏으러 오는 도둑이 된 것 같다고..)


혁명의 나라, 예술의 나라, 1920년대의 낭만이 그립다고 말할 수 있는 프랑스에서도 자본주의는 인간의 존엄함을 시험대에 올려놓고, 여지없이 영혼을 할퀸다. 신자유주의로 무장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둑 아니면 노예가 되어야 할 것만 같은 비참함을 느끼는 건 프랑스인이든 한국인이든 마찬가지다. 심지어 피지배세력의 저항을 막기 위해, 그들이 편을 가르고 서로를 물어뜯게 만드는 지배세력의 고전적인 수법 또한 똑같다.


국가, 민족, 국익의 개념이란 아주 자주 허상에 불과하다.  같은 머리색, 피부색, 언어를 공유하는 것으로 공동체에 선을 긋고 그를 통해 이익을 얻는 세력은 한 줌도 안 되는 지배층 뿐이다. 우리가 연대해야 할 사람들은 ‘가족 같기만 한’ (그러나 절대 가족이 될 수 없는) 거대재벌이 아니라, 세상 곳곳의 수많은 산드라들이 아닐까. 


마르크스가 괜히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를 외친 게 아니다. 


세 번째 영화 예언자 (Un Prophete, 2009)



주인공 말릭 엘 제바나 (Malik El Djebena) 는 어려서부터 소년원을 들락거리던 아랍인 고아다. 태어나 부모 얼굴 한번 본적 없고, 글도 읽을 줄 모른다. 그는 경찰관을 모욕했다는 죄로 6년을 선고받고 수감 생활을 시작한다. 소년원과는 차원이 다른 진짜 감옥이다. 간수들 따위는 발아래에 두는 진짜 갱스터가 있고, 세상과는 유리된 그들만의 법, 생활방식이 있다.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치는 길 잃은 작은 똥개 같던 말릭이 어떻게 진화해 가는지, 어떻게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 가는지가 주요 줄거리다. 웬만한 고어무비는 다 섭렵한 나도 후덜덜할만큼 잔인한 장면도 있고, 메시지, 종교적 모티브, 서사구조도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에게는 거의 추천을 못했지만 미드 ‘브래이킹 배드’를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나처럼 이 영화에 완전히 빠지지 않을까 싶다. 놀라운 건 장르영화의 모든 사실적 요소를 다 갖춘 영화가 심지어 영적이기까지 하다.


혹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백년동안의 고독>이라는 소설을 보셨는지? 소설 속에 이런 장면이 있다. 부엔디아 가문의 첫 번째 인간인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는 동네친구 ‘프루덴시오 아기라르’를 홧김에 죽이고 만다. 결혼한 그날부터 정조대를 차고 있는 부인 때문에 환장할 지경인데, 동네친구 프루덴시오가 자신을 ㄱㅈ라고 놀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엔디아가 던진 창에 목을 찔려 죽은 프로덴시오 아기라르가 자신과 부인 앞에 자꾸만 나타난다. 목에 난 창 자국을 수염새풀로 가리려고 애쓰면서.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는 편안히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는 빗속에서 만난 죽은 사람의 표정에서 본 헤아릴 수 없는 외로움과, 살아있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깊은 향수와, 수염새풀을 적시려고 물을 찾던 그 초조함 때문에 고통을 느꼈다”


17살의 어느 날 밤, <백년동안의 고독>을 읽으며 느꼈던 그리운 전율이 이 영화 <예언자>와 함께 다시 찾아왔다. 주인공 말릭이 살해한 옆방 수감자, 아랍인 라예브는 그의 앞에 환영처럼 나타난다. 


Happy birthday, brother.


죄책감인지 외로움인지 모를 감정 속에 말릭은 라예브와 묘한 친구 사이가 된다. 나아가 라예브는 문맹이었던 말릭이 글을 깨우치고, 인생을 뒤흔드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메시지를 전한다. '읽으라', '찬송하라’, ‘놀랍지 않은가 형제여!’...어? 어딘가 익숙한 이야기인데 싶을 수 있다. 그렇다, 무함마드와 천사 가브리엘의 이야기다. 이 영화의 서사구조는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의 이야기에 기반한다. 고아, 미망인과의 만남, 40일간의 정화 등 영화 속에 이슬람교에 기반한 많은 종교적 장치들이 놓여있다. 그렇지만 처음에 내가 그랬듯 이런 종교적 모티브에 대해 전혀 몰라도 영화를 즐기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 소설을 보는 듯한 완성도 높은 이야기 전개, 살아 남기도 급급하던 주인공이 판을 뒤엎어버리며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쾌감만도 갱스터 무비의 고전인 <대부> 이상으로 엄청나다. 


영화 속에서 나타난 무슬림, 코르시칸, 이태리계 갱들의 충돌을 보면 프랑스가 품은 사회적 갈등도 녹녹치 않다. 2015년 파리에서 벌어진 끔찍한 테러는 극단주의자들이 이슬람 종교를 '이용한' 많은 사례 중에 하나다. 하지만 왜 하필 그게 파리였을까를 궁금해 하던 나로서는 이 영화를 통해 프랑스 사회에 내재한 깊은 분열을 조금이나마 감지할 수 있었다. 주인공 말릭이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더 나은 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보여주듯 프랑스 또한 짙은 어둠을 품은 역사 속, 인간의 사회다.


그래서....결국 이런 질문만 남았다.  ‘프랑스는 도대체 뭐하는 나라인가?’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면 무릇 파리라는 예술의 도시에 살려면 비가와도 우산 따위는 절대 쓰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인생이란 짧고 단순한 것이어서 우리는 현재를 그냥 즐기면 된다. 하지만 <내일을 위한 시간> 속의 프랑스는 돈이 없는 사람은 존재조차 부정당하는, 어쩔 수 없는 자본주의 사회다. 사람들 사이를 갈기갈기 찢어놓는 자본의 횡포에 저항하지 않으면 대혁명의 나라 프랑스에서조차 인간다운 삶이란 없다. 그 와중에 ‘자신을 구원할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프랑스 감옥의 모습을 통해 보여준 <예언자>는 너무나 황홀했다.


도무지 모르겠다, 뭐하는 나라인가 프랑스. 아무래도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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