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리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현희 Feb 24. 2020

시인의 사랑 (2017, 김양희 감독)

단 한 사람

*스포일러 있음

택기 (양익준)


나도 너 이용했어

택기(양익준)는 별 볼 일 없는 시인이다. 경제적 능력도, 몇 안 되는 정자의 운동성도 현저히 떨어지며, 그의 시는 합평회에서 ‘예쁘기만 하고 힘이 없는 꽃’이라는 평을 듣는다. 모든 면에서 정체해 있던 택기는 어느 날 도넛 가게 알바 소년 세윤(정가람)에게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택기와 세윤이 서로에게 무엇을 원했는지 확신하기는 어렵다. 연인 관계같기도 하고, 곁에서 보살펴 줄 가족을 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영화의 결말에서도 관계의 정체는 단순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이별하고 1년여가 흐른 후, 택기의 출판기념회에서 둘은 우연히 재회한다. 택기는 세윤에게 왜 자신을 매몰차게 대했냐며 책망하듯 묻지만, 이윽고 3천만 원이 든 카드를 건네며 말한다. ‘나도 너 이용했어.’ 아마도 택기가 세윤을 뮤즈로서 이용했다는 말일거고, 그가 건넨 돈은 세윤과의 관계가 준 영감을 바탕으로 쓴 시로 받은 상금으로 보인다.

      

택기는 세윤을 이용했을까. 모르겠다. 사실 모든 사랑이 그렇지 않나. 연인으로서의 감정, 가족애, 성욕, 우정, 연민, 동정, 불안이 뒤엉킨다. 우리는 이상과 바람을 토대로 상대를 함부로 재구성하고, 그걸 사랑이라 부른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우리는 모두 서로를 ‘이용한다’. 하지만 그걸 인식하고, 절감하고, 죄책감을 드러내고, 승화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나는 ‘나도 널 이용했다’라는 택기의 말이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았다. 세상 모든 사람이 사랑을 말하지만, 시가 될 수 있는 사랑은 의외로 흔치 않다.      


강순 (전혜진)


나 몰라! 그런데 너 못 가

이 영화에서 관객에게 가장 호감을 준 캐릭터는 택기의 아내 강순(전혜진)인 것 같다. 헌신적이고, 인간적이고, 생활력이 강하고, 택기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푼다. 하지만 내 눈에는 가장 폭력적인 사람으로 보이기도 했다.


강순은 택기 안의 ‘감정, 슬픔, 죄악, 진심, 상처들’을 모른다. 자신이 모르는 시인의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택기를 이해할 수 없지만, 그를 곁에 두고 싶다. 어쩌면 가장 강인하고 현실적인 인물에게도 시, 시인의 관점, 시인의 세상이 주는 희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강순의 사랑은 숭고하면서 세속적이고, 이타적이면서 이기적이고, 아름답지만 본능적으로 자기중심적이다. 어떤 어머니들의 사랑처럼.


세윤 (정가람)
돈 줘요

세윤(정가람)은 외롭고 슬프다. 분노 조절이 힘든가 싶을만큼 버럭 화도 잘낸다. 다니던 고등학교를 그만뒀고, 아버지는 10년째 병져 누워있다. 세윤의 친구들은 그에게 고아냐고 묻는다. 세윤은 누군가에게 자꾸 돈을 달라고 말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채무자에게 빚을 받아내려는 사람같다. 나는 세윤이 받고 싶은 '빚'이 그가 유년기에 응당 누렸어야 할 사랑과 보살핌이란 생각을 했다.

       

첫번째 장면. 억척스런 시장 상인인 세윤의 엄마가 늦은 밤 시장에서 혼자 밥을 먹고 있다. 엄마를 보자마자 세윤은 다짜고짜 ‘돈!'을 외치고, 세윤의 엄마(방은희)는 경멸어린 눈빛으로 아들을 보며 허리춤에서 꼬깃한 지폐 한 장을 꺼내 바닥에 패대기친다. 두 번째 '돈'장면은 세윤과 택기가 걷는 어두운 거리다. 병든 아버지가 밥을 먹지 않으니 집에 한 번 와달라는 세윤의 말에 택기는 뜻모를 이별 통보(?)를 한다. 택기가 임신한 아내 강순에게 마음을 들키고 다퉜기 때문이지만, 기실 택기 자신도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워 보인다. '갖고 노냐!'며 화를 내던 세윤은 갑자기 택기에게 돈을 내놓으라 한다. 세 번째 장면은 두 사람이 이별하고 1년 가량의 시간이 흐른 후다. 택기의 출판기념회에 퀵서비스 배달원이 된 세윤이 배달을 온다. '내가 너에게 주고 싶은 게 있는데...'라고 말하는 택기에게 세윤은 농담처럼 말한다. 돈 달라고. 그리고는 보는 이의 가슴이 내려 앉을만큼 자조적으로 웃는다. 그런 세윤에게 택기는 3천만원이 든 현금카드를 건넨다. ‘떠나, 너 가고 싶은 데로.’ 비밀번호가 세윤 아버지의 기일인 걸 보면 이전부터 세윤에게 주고 싶었던 돈이다.


현금 카드를 두 손으로 받아든 세윤은 비굴하고 약해빠진 속물일까. 택기는 그렇게라도 죄책감을 덜고 싶었던 걸까. 어쩌면 택기가 말했던 것처럼, '세상에 자기 혼자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단 한사람'이 해줄 수 있는 어떤 것이, 그것 뿐이었던 게 아닐까. 나는 세윤을 떠날 수 있게 한 건 3천만원이란 돈이 아니라, 내게도 그 단 한 사람이 되주고 싶어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기억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랑을 받아본 사람은 혼자서도 떠날 수 있고, 그런 사람만이 온전히 자기 인생을 살 수 있다. 개인적으로 내가 가장 몰입했던 인물은 세윤이다. 이유를 털어놓자면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많고,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2017년에 나온 이 영화를 뒤늦게 보고 며칠 정신을 못 차렸다. 영화 속 택기가 읽는 김소연 시인의 ‘그래서’를 반복해서 듣다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시집을 주문하기도 했다. 나는 이 영화에 대해 카메라 워크가 어떻고, 음악이 어떻고, 스토리 라인이 어떻다는 둥의 말을 할 수가 없다. 내게 너무 사적인 영화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단 하나 아쉬운 점은, 사랑이 주는 고립감에 비해 해방의 시간이 너무 짧게 표현되어 있다는 점이다. 영화가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너무 슬퍼져셔 그렇다.  







매거진의 이전글 에이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