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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Sep 13. 2020

이제 그만 끝낼까 해

(I'm Thinking of Ending Things, 2020)

(스포일러 있음)


글을 쓸 때는 '내가 말하고 싶은 것'과 '독자에게 필요한 것'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작업이 필요하다. 혼자만 보는 일기가 아닌, 누군가와의 ‘소통’에 목적을 둔 글이라면 분명 그렇다. 글쓴이는 현상하고 싶은 메시지를 독자를 향한 애정을 담아 구조화해야 한다. 방향을 잃은 공허한 메아리를 던지거나, 쓸데없이 현학적인 글을 쓰지 않으려면 말이다. 어떤 이들은 독자의 평가나 이해, 소통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글 쓴 본인의 만족감이 가장 중요하다는 거다. 하지만 소통이 발생하지 않는 글로는 글도, 사람도 성장할 수 없다. 그런 글은 오히려 벽이 되어 글 쓴 자신을 가둔다. 글쓰기에서 편집은 굉장히 중요한 과정인데, 일단 편집 모드로 진입하면 독자에게 다가가는 최선의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과잉 친절'과 '독선'은 도처에 숨은, 빠지기 쉬운 늪이다.  

     

찰리 카우프만의 신작 ‘이제 그만 끝낼까 해’(I'm Thinking of Ending Things, 2020)는 작가적 야심이 관객에 대한 예의와 애정을 집어삼킨 작품의 전형 같았다. 관객에 대한 불친절함을 넘어 과연 편집 과정을 거치긴 했을까, 그 과정에서 아무도 카우프만에게 조언을 해주지 않은 걸까 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사실 개인적으로 영화 초반부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고, 중반부는 혼란스럽긴 했으나 그래도 이 정도 야망과 상상력을 보았으면 관객으로서 만족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두 주인공이 고속도로를 벗어나 아무도 없는 공터에 차를 세운 후반부 20분은 방만한 영화적 마스터베이션에 가깝다. 아무래도 찰리 카우프만의 재능은 감독보다 각본가일 때 더 빛을 발하지 않나 싶다. 스파이크 존스와 작업한 ‘존 말코비치 되기’, 미셀 공드리와 함께 한 ‘이터널 선샤인’은 90년대 후반-2천 년대 초반을 통틀어 가장 엉뚱하고도 괴상한 걸작이었다. 하지만 빛나는 상상력을 함께 건설할 건실한 파트너가 없어서였는지 이 영화는 괴작이라 불려도 방어해주기 어려운 작품이 되고 말았다.      


... 괴작이라 쓰니 조금 가혹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모든 이야기가 외롭고 고독하게 죽어가는 한 노인의 상상에서 비롯됐다는 아이디어는 참신할 게 없다. 복선도 너무 많고, 등장인물의 이름과 직업이 집요하게 계속 바뀌는 과정에서 나는 ‘무슨 말인지 알겠으니 이제 그만해!’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마음을 끄는 분위기, 고집스럽게 철학적인 대사, 배우들의 연기는 완벽했다. 제이크의 정체가 점점 더 분명해지는 영화 후반부에서 ‘꼬리표를 붙이고, 분류하고, 내침을 당한’, '검은 후광 (black aura)'를 가진 배척당한 사람들에 대한 섬세한 묘사와 관심은 눈보라 날리는 들판의 전광판처럼 차갑고, 깊고, 스산하게 빛났다. 영화 초반에 ‘어쩌면 올해 최고의 작품이 될지도 몰라’라고 생각했던 내 기대는 깨졌다. 하지만 털시타운 아이스크림 장면은 개인적으로 올해의 '장면' 정도는 될 것 같다.

            

내 경우 그림이든, 음악이든, 영화이든 어떤 예술작품이 내 마음을 흔든다면 그건 기술, 재능, 기교 같은 것들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나는 한 사람이 자신의 머릿속을 맴도는 이미지와 상상과 아이디어를 어떻게든 구현하려 발버둥 칠 때, 자의식의 벽을 깨고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고 느껴질 때 깊이 감동하곤 한다. 카우프만의 이번 작품에서 그런 소통 의지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좀 더 절제하거나, 협력하거나, 혹은 좀 더 외로워질 필요가 있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누구에게든 추천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한 번쯤 다시 보고 싶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찰리 카우프만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하겠다. ‘더 잘할 수 있잖아요. 기대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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