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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Oct 18. 2020

정직한 러브스토리

다큐멘터리 '나의 문어 선생 (My Octopus Teacher)' 

크레이그 포스터는 남아프리카의 영화감독이다. 20년 이상 자연 다큐멘터리를 찍어온 그는 지쳤고, 방향을 잃었다. 그가 변화를 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바위 해변, 다시마 숲이 있는 바다로 돌아가는 길 뿐이다. 그는 아프리카 끝자락 폭풍의 곶, 숨이 멎을 듯 차가운 바닷속에서 프리다이빙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히 문어를 만난다. ‘나의 문어 선생’(My Octopus Teacher)은 포스터와 문어가 함께 한 1년간의 이야기다.     

 

‘나의 문어 선생’은 자연 다큐멘터리의 전통적인 문법을 묘하게 벗어난다. 소외된 인간이 대자연과의 교감 속에 감화된다. 한없이 아름답지만 예측할 수 없는 자연의 무자비함 앞에 놓인 인간이 삶의 유약함과 유한함에 직면해 겸허한 깨달음을 얻는다는 전개는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인간이라기보다 문어이고, 문어라기보다 그들이 만든 짧고 마법 같은 관계이다. 그리고 이 관계는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보다 이질적이고, 알려진 바가 많지 않은 문어라는 존재가 주는 신선함과 짜릿함보다 보편적인 정서적 감응을 자극한다. 이 정서적 감응에 가장 적합한 이름은 아무리 고민해봐도 '사랑'이다. 이 영화는 자연 다큐라기보다 러브스토리에 가깝다.  (“I  fell in love with her”_크레이그 포스터)


포스터를 처음 만난 문어는 그를 경계했다. 그의 존재가 익숙해지자 도망치지 않고 그를 응시했지만 결코 자신의 굴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경계는 점점 더 허물어지고 문어는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다. 포스터의 옆에서 자유롭게 유영하고 포스터가 내민 손을 잡았다. 그리고 가슴에 다가와 포옹했다. 


Netflix   'My Octopus Teacher'


사랑에 빠지면, 이미 존재하고 있었지만 사람들이 무시하거나 무지했던 상대방의 면모가 보이기 시작한다. 상대방이 내뿜는 빛깔과 움직임에 고유성이 부여되고, 작은 습관과 몸짓들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하게 다가온다. 포스터와 문어가 마음을 열고 다가가는 과정도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할까? 그녀도 꿈을 꿀까? 꿈을 꾼다면 어떤 꿈을 꿀까?"  
"What goes through her mind? What's she thinking? Does she dream? If she dreams, what does she dream about?" ('나의 문어 선생' 中) 


경이로운 생명체에 매혹된 포스터는 문어에 대해 공부한다. 상호 신뢰가 맺어졌다고 생각한 순간 작은 실수로 문어가 놀라 사라지자 1주일 간 문어처럼 생각하고 느끼며, 문어의 흔적을 필사적으로 찾아 헤매기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은 '온전히 상대의 입장에서 상상하기'라는 불가능해 보이는 과제를 해낼 수 있다. 또 사랑은 열정과 관능만이 아닌 인내, 이성, 호기심,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읽는 능력이 요구되는 지적인 여정이다. 1-2년 남짓한 문어의 수명을 알면서도 포스터는 마음을 열었다. 물론 사랑의 끝이 아름답지 만은 않았다. 문어가 죽고 난 후 크레이그는 이렇게 말했다.   


"문어의 굴이 있던 곳에 지금도 자주 갑니다. 그 위에 둥둥 떠서 문어의 존재를 느껴요. (운다..) 당연히 그립죠. 하지만 마음이 놓인 것도 사실이에요. 날마다 바다에 들어가서 열성적으로 문어를 찾아다니고, 촬영하는 건 힘든 일이었습니다. 꿈에서도 그녀를 떨칠 수가 없었어요. 육지에서도 바닷속에서도 온통 문어 생각뿐이었죠. 당시 저는 문어처럼 생각하고 움직였어요. 그래서 한편으로 부담감이 어마어마했죠. 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이 문어가 정말 자랑스러웠어요" 

“나는 사랑에 빠졌었어요. 문어가 상징하는 야생을 사랑하게 됐고, 달라진 나 자신도 사랑하게 됐어요.” 


문어와 인간의 교감은 특별했지만 기이하진 않았다. 경계를 뛰어넘어, 완전히 새로운 세상과 관계에 발을 들였지만 사랑의 본질은 고집스러우리만큼 변하지 않았다. 가장 고유한 사랑은 가장 보편적인 모습을 한다. 사랑했던 사람, 함께 나눴던 음악, 음식, 장소, 냄새, 웃음 등은 이제 곁에 없어도, 내 정체성의 한 조각이 되어 남는다. 보면서 많이 울었지만 그 끝에 나를 침착하게 다독여준 장엄하면서도 소박한, 정직한 러브스토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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