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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Dec 24. 2020

피키 블라인더스 Peaky Blinders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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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차 안에서 라디오를 듣는데 음악평론가로 추측되는 분이 어떤 영국 드라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BBC 제작, 킬리언 머피 주연, 갱스터물, 굉장한 흡입력이 어쩌고 하는 말을 흘려듣다가 주제곡이 닉 케이브 Nick Cave의 노래란 말을 듣고 즉시 뇌에 제목을 저장했다. 닉 케이브가 아니었다면 내가 '피키 블라인더스'를 볼 일은 없었다. 정신없이 몰입해 일단 시즌3까지 시청했는데(현재 시즌5까지 나옴)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중간 리뷰를 쓴다.  


새로운 음악 별자리:  Peaky Blinders 사운드 트랙


별들은 그냥 하늘에 떠 있다. 사람들은 그저 제 자리에 떠있을 뿐인 별들을 이어서 전갈자리, 사수자리, 처녀자리 따위를 만들고 서사를 부여한다. 피키 블라인더스의 사운드트랙이 내게 그런 존재다. 내 머릿속에 흩어져있는 곡들이 연결되어 '피키 블라인더스 사운드트랙'이라는 별자리가 생겼고 이야기가 창조됐다. 내 음악 취향을 이해하는 별자리 하나를 만들어 준 사람, 피키 블라인더스의 음악감독은 Pulp의 전 베이시스트 안토니 겐 Antony Genn이다.  


어릴 때부터 주위에 비슷한 음악 취향을 가진 사람이 거의 없는 환경에서 살면 타협하는 버릇이 생긴다. 누가 좋아하는 음악을 물으면 '장르를 가리지 않고 좋으면 다 듣는다'라고 얼버무리고, 상대가 음악에 관심이 있어 보여도 비교적 말랑한 카드를 먼저 꺼낸다. 오아시스, 사운드가든, 라디오헤드 정도다. 내 또래 중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이런 밴드들 음악 속에 자랐을 가능성이 높고 대화 거리도 풍성하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둔 뮤지션 무리가 따로 있다. 너무 소중해서라기 보다, 말해봤자 아는 사람이 없을 것 같아 그냥 마음속에 가둬둔다. 내 마음 속 외딴방에 오랜 시간 처박혀 있던 무리 중 한 명이 닉 케이브다. 20대 초반 매우 암울했던 교대 시절에 자취방에서 'Nick Cave and The Bad Seeds'의 'no more shall we part'를 5천4백21번 정도 들었지만 닉 케이브에 관해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내게 '피키 블라인더스'의 사운드트랙은 매우 흥미롭고 특별하다. 분명 걸출한 유명 뮤지션들이지만 교류할 사람이 없어 마음속에 처박아 두었던 들의 곡들이 빼곡하다. 나를 위한 사적인 마법처럼 느껴질 정도다(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사운드트랙은 엄청난 호평을 받았고 팬층도 두텁다). PJ Harvey, Jonny Cash, Tom Waits 가 White Stripes, Arctic Monkeys와 같은 뮤지션들과 연결되고 심지어 Radiohead 노래가 여기저기서 불쑥 튀어나온다. 1920년대 영국 버밍엄을 배경으로 한 어둡고 폭력적인 범죄 드라마의 모든 장면과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고, 주인공들의 서사와 얽혀 곡의 에너지와 감정이 증폭된다.  


일단 주제곡인 'Red Right Hand'는 말이 필요 없다. 어둡고, 축축하고, 폼 잡는게 보이지만 어쩔 수 없이 간지가 흐르는 드라마의 스타일과 너무나 완벽하게 어울린다. PJ Harvey와 Arctic Monkeys가 부른 곡들도 그들 색대로 훌륭하다.  

https://youtu.be/KGD2 N5 hJ2 e0

Nick Cave And The Bad Seeds - Red Right Hand (Peaky Blinders OST)


Tom Waits – Soldier’s things     


톰 웨이츠의 곡 'Soldier's things'이 흐르는 장면을 잊을 수 없다. 시즌 3 초반부에서 주인공 토미 쉘비의 아내 그레이스가 총에 맞아 죽는다. 비탄에 빠진 토미는 살해를 사주한 찬그레타를 납치한다. 늙은 그를 벌거벗겨 앉히고 혀, 귀, 손가락, 발가락을 잘라버리겠다고 으르렁댄다. 해명을 듣고 싶다고 절규한다. 그럼에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혼란에 빠지는데, 결국 이 모든 상황과 토미의 심리상태를 이해한 아서가 토미 대신 찬그레타의 머리를 날려버린다("I heard the blackbird sing"). 그리고 이 곡 'Soldier's things'이 흐른다.


'soldier's things'의 가사는 추측건데 늙은 참전 군인이 남겨진 자신의 '물건들'을 뒷마당에 펼쳐놓고 야드세일을 하고 있는 장면이다. 박스 안에 담긴 모든 물건은 단 1달러. 톰 웨이츠의 읊조리는 톤과 담담한 피아노, 지독한 허무와 공허가 공명한다.

Oh, and this one is for bravery, Oh, this one is for me, And everything's a dollar in this box
- Tom Waits - 'Soldier's things'


인공 토미 쉘비는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군인이었다. 그의 가족들은 그가 전쟁에서 돌아온 후 조용하고 어두운 사람이 되었다고 말한다. 토미는 무너진 땅굴에 갇혀 적과 사투를 벌였고 전쟁은 끝났지만 끝없는 악몽에 시달린다. 당시 많은 군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토미 역시 진흙 구덩이 속에서 죽음과의 싸움을 이겨냈지만 남은 건 알량한 훈장과 트라우마뿐이다. 토미는 참전 경험이 남긴 의미와 동료들과의 관계를 간직하지만 훈장은 도랑에 버렸다. 시나리오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나는 훈장이 악몽 같은 경험을 합리화하거나, 인간으로서의 주체성을 증명해 줄 수 없는 허무한 쇳덩이에 불과하다는 걸 토미도 알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아내를 죽인 적의 혀와 귀와 손발을 잘라도 남는 것은 결국 허무, 허무, 허무뿐. 그래서 토미는 찬그레타를 앞에 두고도 그렇게 망설이지 않았을까 싶다.  


https://youtu.be/rNwC8 ETa0 pg

Tom Waits – Soldier’s things


Radiohead -  You And Whose Army? /  Life in glasshouse


'You and whose army?'는 톰 요크의 사회비판적 메시지로 유명한 곡이다. 그는 2천년대 초반 소위 '테러와의 전쟁' 당시 미국 다음으로 많은 수의 군을 파견한 영국 정부에 관한 환멸을 곡에 담았다. 이 곡은 피키블라인더스가 자신들을 이용하려 했던 러시아인들과의 사건을 처리하는 장면에서 나오는데, 가사와 대사가 너무 절묘하게 어울린다. 'don’t fuck with us'라는 대사로 정리되는 장면 속에서, 톰 요크가 'Come on if you think you can take us on'(우릴 짓밟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해봐)라고 노래하는 거다! 'Life In a Glasshouse'는 시즌3의 엔딩 장면에 흐른다. 라디오헤드의 수많은 명곡 중에서도 내가 특히 좋아하는 곡 중 하나인데, 모든 것이 혼란 속에 무너져내리는 극의 서사 속에서 곡도 유리비처럼 부서져 내린다.

https://youtu.be/hKrAPSootn4

Radiohead -  You And Whose Army?


David Bowie – Lazarus      


시즌 3, 5화에서 토미 쉘비가 사경을 헤매는 장면에서 흐른 곡이다. 데이비드 보위의 마지막 앨범 'Black Star'에 수록된 곡으로, 타협 없는 뮤지션의 삶을 살았던 데이비드 보위가 인생의 마지막에서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아름답고 당당한 곡이다.

You know, I'll be free. Just like that bluebird. Now ain't that  just like me? Oh I'll be free.    
David Bowie – Lazarus

개인적으로 몇 주 간 심한 우울감 속을 헤매다가 이 곡을 들으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유는 설명하기 어렵다. 죽음을 앞두고 '나는 자유로워질 거야. 이게 나답지 않아?'라고 말하는 데이비드 보위나, 죽음에 관한 곡을 들으며 삶의 에너지를 되찾은 나나 말이 안 되는 건 마찬가지인 것 같기도 하다. 그립다 데이비드 보위. 그리고 끝까지 고맙다.

https://youtu.be/y-JqH1 M4 Ya8

David Bowie – Lazarus



자기 연민 없는 서사 


시즌 초반에는 음악에 비해 각본이 다소 약하고 뜬금포로 빠지기도 한다는 생각을 했다. 또 주인공 토미 쉘비의 매력에 무섭게 빠져들면서도 가슴 한편에서 질문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무자비한 갱스터이다. 돈, 가족, 명예를 위해 살인과 방화를 서슴지 않는다. 아름답지만 잔인하고, 열정적인 공허함 끝에 뭐가 있을까. 아직 완벽한 답변은 받지 못했지만, 시즌 3의 후반부에 이르자 적어도 작가가 단순하고 평면적인 세계관에 갇혀 있지 않다는 확신은 생겼다.    


알피 솔로몬스(톰 하디)는 런던의 범죄조직 보스 중 한 명으로 토미와 협력과 배신의 관계를 반복한다. 너의 배신 때문에 아들이 인질로 잡혔다며 분노하는 토미 쉘비에게 알피는 이렇게 말한다.

So, what, they took your boy, did they, eh? They got your boy? And what fucking line am I supposed to have crossed? How many fathers, right, how many sons, yeah, have you cut, killed, murdered, fucking butchered, innocent and guilty, to send straight to fucking hell, ain't ya? Just like me! You fucking stand there, you judging me, stand there and talk to me about crossing some fucking line. If you pull that trigger, right,  you pull that trigger for a fucking honorable reason. Like an honorable man, not like some fucking civilian that does not understand the wicked way of our world, mate.   

그래, 그들이 네 아들을 데려갔다고? 그래서 빌어먹을 내가 무슨 선을 넘었는데? 얼마나 많은 아버지를 얼마나 많은 아들을 네가 난도질하고 죽이고 살해하고 썰었는지 몰라? 무죄든 유죄든 전부 골로 보내버렸지 나처럼 말이야! 근데 넌 거기 서서 감히 날 비난하고 내가 망할 선을 넘었니 어쨌니 지껄이고 있어 그 방아쇠를 당길 거라면 고결한 이유를 가지고 당겨. 고결한 사람처럼 말이야. 우리 세계의 잔인한 질서를 이해 못하는 민간인처럼 굴지 말라고!


써놓고 보니 대사는 약간 오글거리지만 극 중 장면의 에너지는 정말 대단했다. 도발과 정당방위, 부당한 액션과 정당한 리액션, 폭력의 합리화와 변명, 그리고 자기 연민. 이런 종류의 장르물이 빠지기 쉬운 함정과 클리쉐 그리고 나의 의구심을 하디의 대사와 멋진 연기가 날려버렸다. 너무 멋져서 번을 돌려 다시 봤다.    

https://youtu.be/06 RlyZxUnVM

What fucking line am I supposed to have crossed?


일단 끝까지 봐야 알겠지만 '브레이킹 배드', '베러 콜 사울'과 함께 내 인생 티비 시리즈가 될 가망성이 높다. 부작용도 있다. 배우들 특유의 악센트에 실린 'fucking'이란 단어가 끊임없이 귀를 맴돌고, 킬리언 머피가 담배 피우는 모습이 너무 멋져서 갑자기 필 줄도 모르는 담배가 당길 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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