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경험'이 되게
학창 시절에 나는 영어를 곧잘 하는 학생이었다. 사교육을 거의 받지 않았지만 학업성취도가 높았고 한번 치른 토익시험도 단번에 꽤 높은 점수를 냈다. 영어 수업 시간에 내가 텍스트를 읽거나, 발표를 하면 사람들은 발음이 좋다며 칭찬했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 나는 영어를 아예 못하는 사람이구나!'라고 깨달은 건 대학생 때다. 영어회화 수업 첫 시간에 원어민 교수가 자기소개 에세이를 써오라는 과제를 냈다. 그는 내 에세이가 매우 흥미롭다며 본인의 연구실에 따로 방문해주길 요청했다. 나는 얼떨결에 원어민 교수와 둘이 마주했고 그는 영어로 질문을 퍼부었다. '왜 전공을 바꿔 교대를 왔느냐', '고등학교로 다시 돌아온 것 같아 힘들다고 썼던데 잘 견디고 있느냐', '나도 음악을 좋아해서 반가웠다' 등의 말이었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한 마디도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한국인 중 상당수가 비슷한 경험을 해봤을 거다. 학교와 학원에서 수년간 영어를 배우고 그 어렵다는 수능과 토익 시험 등도 치렀지만 막상 외국인 앞에 서면 쉬운 말 한마디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충격적인 경험 말이다. 흔히 하는 판단처럼 '공교육의 실패'로 단언하기는 쉽다. 하지만 이후 내가 스스로 영어를 익히고, 학교 현장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니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영어 학습에서 가장 많이 이뤄지는 활동은 '모방'과 '암기'이다. 즉 영어 원어민의 말을 듣고, 그대로 따라 하고, 어휘와 문장과 문법 규칙을 외우는 활동을 많이 한다. 외국어 학습 과정에서 모방과 암기가 전혀 효과가 없다고까지는 보지 않는다. 하지만 시험을 위한 영어가 아닌, 실제적인 의사소통 능력 신장을 기준으로 보면 그 효과는 지극히 제한적이다. 영어 원어민의 말과 글을 모방하는 것만으로 자유로운 의사소통 능력을 기를 수 있다는 바람은 헛된 꿈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은 앵무새가 아니기 때문이다. 앵무새는 인간의 말을 모방할 수 있다. 그러나 앵무새가 따라 하는 언어는 인간의 음성 언어와 동일하지 않다. 동물학, 심리학계는 앵무새의 모방 언어는 인간의 그것처럼 의미와 맥락을 가진 언어가 아닌 소리 그 자체, 인간의 하품, 주름, 표정의 작동 방식과 비슷한 행위라고 본다. 물론 동물도 의사소통을 위해 여러 가지 형태의 신호를 사용한다. 하지만 그 신호 단위의 수는 인간의 어휘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다.
앵무새와 인간 언어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인간 언어의 창조성과 개방성이다. 인간은 매 순간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며, 한 번도 듣고 보지 못한 언어를 이해할 수 있다. 당신은 지금 내가 즉흥적으로 쓴 '따스한 햇빛이 지구의 상처를 어루만진다'라는 문장을 처음 보았지만 그 뜻을 이해한다. 우리는 수십만 개의 어휘와 언어 구조를 조합해 매 순간 새로운 언어를 생성한다. 반면 동물의 언어는 고정적이며 폐쇄적이다. 동물들이 주고받는 신호 체계로는 새로운 언어를 무한대로 생성할 수 없다.
내가 20대 초반에 원어민 교수에게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연구실을 나섰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당시 나는 학교 교육을 통해 어느 정도의 영어 기능을 갖췄고 꽤 많은 영어 어휘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영어를 사용해 누군가와 자연스러운 대화를 해본 경험이 전무했다. 학교에서 영어 연극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낸 경험이 있지만 그때도 대사를 암기해 연기했을 뿐이다. 마치 앵무새처럼 말이다. '연극'과 '대화' 상황은 천차만별이다. 연극을 할 때 우리는 시공간이 구조화된 상황에서 미리 계획된 언어를 내뱉는다. 반면 대화를 할 때는 누군가 즉흥적으로 발화한 언어를 즉시 해석하고 맥락에 맞게 새로운 언어를 창조한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쌓아온 어휘와 문법 실력 등은 실제 대화 상황에서 제대로 발휘되지 않을까? 내가 암기한 그 많은 단어와 표현들은 왜 특정 상황에서 완전히 무력해지는가? 그것들은 어디에 숨어 있는 걸까? 놀랍게도 이와 같은 의문을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메멘토(Memento, 2000)'는 탁월하게 설명한다.
주인공 레너드는 아내가 살해당한 후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그의 기억은 10분을 넘기지 못한다. 레너드는 메모와 사진을 이용해 아내를 살해한 범인을 쫓고 있다. 중요한 단서들을 몸에 문신으로 새기며 필사적으로 진실을 찾아 헤맨다. 그러나 그가 남긴 짧은 기록들은 일관성이 없고 산만하다. 동일 인물에 대해서도 어떤 메모에는 친구라고, 다른 메모에는 믿지 말고 살해하라 적혀 있다. 레너드는 여관 주인의 호구가 되고, 엉뚱한 사람을 공격하고, 자신을 이용하는 사람을 돕기도 한다. 각종 사건과 인물의 행동을 현재적 관점에서 주체적으로 재구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레너드의 정체성은 아내가 살해되기 이전의 기억 속에 못 박혀 있다. 초점 없이 세상을 떠도는 유령처럼 말이다.
우리가 모방과 암기를 통해 학습한 언어들은 레너드의 메모나 문신과도 같다. 레너드는 기록과 문신을 통해 사건과 기억을 소유하고, 진실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부분의 합은 전체와 같지 않다. 주체의 현재 상황과 맥락에 맞게 해석되지 못한 단편적인 메시지들은 그를 총체적 진실과 전혀 무관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낱낱이 흩어진 기록의 조각들은 그의 정체성과 연결될 수 없었다.
레너드가 필사적으로 문신을 남기듯 우리는 필사적으로 단어를 외운다. 분절된 언어의 조각들을 모방하고 암기한다. 레너드가 개별 기록의 합으로 진실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처럼, 우리도 언어 기호들을 소유하면 이를 자유롭게 사용해 의사소통하는 능력이 생길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의미는 각각의 언어 기호 속에 내장된 것이 아니다. 의미는 기호 ‘사이’의 '차이'와 '관계'에 의해 결정되고 생성된다. 낱낱의 퍼즐 조각들을 소유하고 암기하는 방식으로는 매 순간 언어를 탄생시키는 의사소통능력을 충분히 기를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어쩌라는 말인가, 라는 말이 돌아올 거다. 인간은 앵무새가 아니고 그래서 모방과 암기가 무의미하다면 현재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 외국어 교육을 진행할 수 있겠는가,라고 물을 수도 있겠다. 나는 한국의 언어 환경에 비춰볼 때 외국어 학습 과정에서 인위적인 모방과 암기를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다고 본다. 다만 마치 이것이 자연스러운 의사소통능력을 완성할 것처럼 호도하고, 헛된 바람을 주입하는 현상이 지속되지 않기를 바란다. 단기간에 승부를 내려하는 습관과 조바심부터 버려야 한다. 또한 우리가 공교육 기관에서 확보할 수 있는 외국어 학습 시간, 학교 상황에서 기를 수 있는 의사소통능력의 한계와 목표를 구체적으로 재정립해 이를 바탕으로 교육과정과 평가 방식을 개선해야 한다고 본다.
외국어 학습 현장에 있다 보면 학생들에게 어휘와 표현을 하나라도 더 알게 해주고 싶은 바람, 눈에 보이는 성과를 빨리 도출하고 싶은 욕망이 생길 수 있다. 나도 그런 유혹에 시달린다. 물론 조각난 언어들을 쌓아가는 과정이라도 그로 인해 학습자가 얻은 성취감이나 기쁨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 언어 학습 과정에서 쌓인 긍정적인 경험이 장차 외국어에 대한 깊은 호기심과 흥미로 이어질 가능성은 늘 존재한다. 다만 학습자들을 앵무새 혹은 빈 그릇과 동일시하며 주입과 반복학습으로 결판을 내겠다는 태도만큼은 반드시 버려야 한다.
학습자를 앵무새 취급하지 않고, 장기적인 언어 성장의 관점에서 외국어 교육을 해나가는 과정은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혁신과 참신함 없는 무척 조용한 수업으로만 보일 가능성도 있다. (흔히 영어 시간은 활발하고, 시끄러워야 한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언어능력이 생성되는 과정이란 본래 그렇다. 학습자가 외부의 자극을 내면으로 받아들이고, 그로 인해 생긴 변화를 외부로 환류하는 과정 자체에 시간과 힘이 든다. 또 외국어를 익히는 과정은 설렘과 즐거움 만이 아니라 고통에 가까운 답답함과 혼란도 수반한다. 이 모든 진실을 피하지 않으면서도 한 발이라도 내딛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것이 학습자를 앵무새로 만드는 외국어 교육보다 교육적이고 인간적이며 가치롭다. 또한 특정한 방법론만 취하면 단기간에 외국어 능력을 완성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영어교육시장의 무수한 방법들보다 정직하고, 과학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