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not your fault.
선생님, 저는 영어를 못해요.
학생들이 곧잘 하는 말이다. 영어 교과전담을 담당한 이래 자주 들었지만 여전히 매번 놀란다. 특히 이제 막 학교에서 영어수업을 시작한 3학년 아이가 '나는 영어를 못한다'라고 말하는 건 마치 갓 돌 지난 아이가 책을 읽지 못한다고 걱정하는 것처럼 들려 당황스럽기도 하다. 아이들은 국어, 사회, 과학 등의 과목에 대해서는 ‘못한다’ 보다는 ‘재미없다’, '싫다'라는 표현을 더 자주 사용한다. 유독 영어에 대해 ‘못한다’라는 말을 쓴다.
초등 영어는 듣기, 말하기 활동을 강조하고 학교에 원어민 교사가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아이들의 영어 능력이 오히려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국어, 수학, 사회, 과학 과목의 경우 평가를 하는 상황이 아닌 이상 학생의 인지구조나 해당 과목의 역량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지 않다. 영어는 다르다. 영어를 '할 수 있는' 아이들은 원어민과 대화하고, 영어로 질문을 하고, 글을 쓴다. 영어를 '할 수 없는' 아이들은 원어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말을 하거나 글을 쓸 수 없다. 그래서 10살밖에 안된 아이가 친구와 자신을 비교하며 ‘나는 영어를 못해요’라고 말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는 수영을 할 수 있는 사람과 할 수 없는 사람이 물에 들어갔을 때 식별 가능한 능력 차이를 보이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I’m sorry. My English is not good.
어른들은 아이들보다 한 술 더 뜬다. 영어 못하는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고 심지어 외국인에게 사과까지 한다. “I’m sorry. My English is not good.” 왜 한국에 사는 한국인이 한국에서 만난 외국인에게 영어를 못한다고 미안해하는지, 왜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중 유독 영어권 국가의 사람들은 한국어를 배우지 않는지 등 복잡한 생각들이 줄을 잇는다.
자신의 영어 능력에 대해 사과까지 하는 걸 보면 한국인들은 영어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모든 사람은 영어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영어를 못하는 건 내 잘못이다'. 자기 자신 다음으로 자주 책망하는 건 교육 시스템이다. 한국 교육이 무능하기 짝이 없어 학교에서 10년 넘게 영어를 배웠어도 원어민을 만나면 제대로 된 영어 한마디를 못 뱉는다는 식이다. 과연 그럴까. 영어를 못하는 건 개인의 무지와 게으름 탓인가. 개인들이 반성하고, 영어능력 신장을 위해 노력하고, 교육제도와 수업 방법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면 한국도 핀란드처럼 80% 이상의 시민이 영어에 능통해질까.
언어학자 카츠루(Braj Kachru)는 영어 사용 국가들을 세 그룹으로 분류했다. 첫째는 내부그룹(Inner circle)이다. 영어를 모어로 쓰는 국가들로 영국, 미국, 캐나다, 아일랜드, 호주 등이 해당된다. 둘째는 외부그룹(Outer circle)이다. 영어가 모어는 아니지만 제2언어나 공용어로 영어를 사용한다. 인도, 싱가포르, 홍콩, 필리핀, 케냐, 우간다 등 50여 개 국가가 이에 속한다. 마지막은 확장그룹(Expanding circle)이다. 영어를 외국어로 사용하는 일본, 스페인, 이탈리아, 러시아, 중국 등이며 한국도 확장그룹에 속한다. (카츠루의 동심원 모델은 복잡한 언어 상황을 편의상 거칠게 일반화시킨 모형이다. 예를 들어 캐나다와 남아공 등은 내부그룹에 속해있지만 불어, 줄루어 등 다양한 언어를 사용한다. 같은 그룹 내에 있는 국가들도 언어 환경이 다르다)
Outer Circle (외부그룹)
모어가 영어인 내부그룹이 영어를 잘하는 건 당연하지만 외부그룹에 속한 인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홍콩, 필리핀, 케냐 같은 국가들의 영어 사용능력이 좋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 국가들의 공통점은 100년~300년에 이르는 식민지배의 역사다. 이들은 모두 영국 혹은 미국의 식민지배를 받았다. 그래서 현실적인 여건 상, 독립하는 과정에서도 영어를 수용 혹은 최소한 소극적으로나마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싱가포르는 100년 이상 영국의 지배권 아래 있었다. 또 580만 인구의 작은 국가이지만 민족 구성이 다양하고, 싱가포르의 공용어는 영어, 중국어, 말레이어, 타밀어 총 4개이다. 독립 이후 다양한 민족 간의 분열과 언어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영어를 중심으로 다양한 언어들을 공용어로 지정했기 때문이다. 영어를 잘한다고 알려진 인도 역시 300년 이상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럼에도 13억 인도 인구 중 영어로 소통할 수 있는 비율은 최대 5% 미만이란 게 중론이다. 외부 그룹에 속한 케냐, 홍콩,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도 제국주의 시대에 비슷한 질곡을 겪었다.
영어를 국제화 시대의 필수 무기, 만병통치약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영어를 잘하면 경제와 정치가 발전하고 문화 수준도 높아질 거라 기대한다. 하지만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외부그룹들이 영어와 맺어온 관계의 역사는 침략과 지배, 약탈의 상처로 얼룩져있다. 케냐, 필리핀, 우간다처럼 영어를 두루 사용하지만 경제 구조가 견실하지 못한 국가들도 많다. 외부그룹의 많은 국가들에서 영어와 토착어 사이의 긴장과 갈등은 끊이지 않는다. 영어 능력을 기준으로 사회 양극화와 분열 현상도 만만치 않다. 이러한 침략의 역사, 다민족 국가들의 전략과 고충은 무시한 채, 한때 한국도 외부그룹 국가들처럼 영어를 제2언어, 공용어로 쓰자는 망상이 활개를 쳤다.
Expanding Circle (확장그룹)
확장그룹의 스펙트럼은 다채롭지만 거칠게 나누면 한국, 일본, 프랑스처럼 영어를 잘 못한다고 알려진 국가들과 네덜란드, 핀란드, 덴마크처럼 영어능력이 높은 나라들로 나눌 수 있다. 확장그룹에 속해있지만 영어를 잘하는 국가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일단 인구수가 적은 반면 민족 구성이 다양하다. 한 국가 안에서 다양한 언어를 쓰는데, 이들에게 영어는 생존 내지 생활의 언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 핀란드는 여러모로 선망의 대상이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누구나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핀란드처럼 영어교육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교육체계가 다른 건 자명한 사실이지만, 한국과 핀란드의 영어능력을 가르는 가장 큰 변수가 교육시스템은 아니다. 핀란드의 인구는 550만인데 이는 남한 인구의 1/10 정도이다. 2018년 기준 한 해 핀란드를 방문하는 관광객 수는 680만 명이었다. 즉 핀란드 인구를 훌쩍 뛰어넘는 수의 외국인들이 핀란드를 방문하고 이들은 대부분 영어를 사용한다. 그러니 핀란드인들은 일상생활에서 영어를 활용할 일이 한국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유럽에서 영어 사용능력이 가장 우수한 국가 중 하나인 덴마크 역시 인구 580만의 소규모 국가이다.
이 국가들은 인구수가 적은 데 반해 민족과 언어 구성은 우리보다 훨씬 다양하다. 예를 들어 핀란드는 핀란드어와 스웨덴어를 함께 사용한다. 룩셈부르크는 인구가 63만밖에 되지 않지만 룩셈부르크어 뿐 아니라 프랑스어, 독일어까지 공식 언어로 쓴다. 벨기에 역시 네덜란드어, 불어, 독어가 공식 언어이다. 서울대 이병민 교수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다언어, 다민족 국가에서 영어라는 외국어를 추가로 하나 더 배우는 일은 부담스럽지 않다. 이미 언어 습득에 대한 노하우가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영어는 왜 실패하는가, p.60). 한편 네덜란드의 공식 언어는 네덜란드어 하나이지만 80% 이상의 시민이 영어를 구사한다. 네덜란드는 영국과 역사적, 지리적으로 가까울 뿐만 아니라 서게르만어라는 뿌리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인구수가 적은 나라는 자국의 언어만으로는 국제적인 생존을 도모하기 어렵다. 최근 영어는 특정 학문 분야, 그중에서도 정보통신영역의 공용어 기능을 하고 있다. 실제 전세계 전자 형태 정보의 80%가 영어이기도 하다. 네덜란드, 덴마크, 핀란드처럼 영어능력이 높은 국가들은 공영방송채널에서도 영국이나 미국에서 만든 TV 프로그램을 자막 처리해 내보낸다. 영어능력 신장을 위해서가 아니다. 인구 규모 때문에 방송 시장 확보가 어렵고, 영어권 방송 프로그램을 수입해 자막을 입혀 내보내는 것이 더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영어는 교육의 대상이 되는 언어라기보다 특유의 정치, 경제, 언어 환경에서 비롯된 생존과 생활의 언어이다.
한국인이 영어를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은 영어권 국가의 식민지였던 역사가 없다. 수 천년 간 단일 언어로 하나의 의사소통 체계를 구축했으며 이는 국제적으로 거의 유례가 없는 사례다. 민족 구성도 상대적으로 단일하기 때문에 이로 인한 언어 갈등도 없다. 또한 남한의 인구는 5천만이 넘는다. 핀란드처럼 자국 인구의 1.2배에 달하는 관광객이 들어오는 건 현실적으로 상상하기 어렵다. 충분한 인구 규모 덕분에 방송시장이 확보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영어권 방송을 수입할 필요도 없다. 즉 한국인은 영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경제, 사회, 문화적인 여건에 있기 때문에 영어를 못한다. 한국과 비슷한 케이스는 일본 정도가 유일하다(중국도 사실상 다언어 국가다). 일본도 영어 능력을 기르기 위해 노력하지만 한국보다 영어를 더 못하는 걸로 유명하다. 그러나 일본은 번역 산업이 발달해서 영어를 비롯한 다양한 외국어를 폭넓은 영역에서 가장 빠르게 번역해 공급하고 있다. 일본이 높은 경제와 문화 수준을 이룬 이유 중 하나다.
카츠루의 동심원 모델에 일반화 위험이 있다고 해도, 한국이 영어를 외국어로 쓰는 확장그룹, 그중에서도 독특한 언어환경을 갖는다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간 한국의 교육정책과 사회적 요구는 한국을 외부그룹처럼 인식하거나 외부그룹처럼 만들고 싶어 했다. 2008년 무렵 몰아친 영어 몰입교육과 영어공용화 논란 속에 학교는 사회적 논란의 하수구 처리장 역할을 했다. 교육당국은 교사의 영어 능력을 신장하고, 교육방법만 개선하면 학생들의 영어능력이 향상될 것처럼 오만가지 검증되지 않은 이론, 방법론, 노동력을 학교에 들여왔다. 원어민을 수입하고, 영어로만 진행하는 영어수업을 부르짖고, 교사와 학생들 대상으로 각종 인증제를 실시하며 영어교육에 엄청난 예산을 퍼부었다. 영어 말하기 대회, 영어연극대회, 심지어 영어교과서 외우기 같은 영어 관련 행사가 한동안 학교를 휩쓸었다. 한편 개개 한국인들의 목표는 외부그룹처럼 되는 정도에 있지 않았다. 많은 한국인들은 자신 혹은 자신의 자녀가 내부그룹, 그중에서도 영국 혹은 북미권 원어민과 같은 영어 구사능력을 갖길 원한다. 영어 몰입교육을 실시하는 영어유치원은 여전히 성업 중이고 사교육비 지출에서 영어는 부동의 1위다.
그렇게 돈과 시간을 투자했지만 전 사회적 차원에서 영어능력, 학습자들의 만족도는 향상한 것 같지 않다. 다만 초등학교 3학년 아이가 '나는 영어를 못해요'라고 말하고, 어른들은 원어민 앞에 죄인이다. 지금부터라도 한국의 역사, 경제, 언어 환경 등에 관한 정확한 분석과 진단을 토대로 교육목표부터 재설정해야 한다. 사람들은 흔히 '한국인들은 10년 간 학교에서 영어를 배웠다'라고 말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실제 수업시간은 수백 시간에 불과하고, 그마저도 실제적으로 영어를 사용한 시간을 계산하면 그보다 훨씬 적은데, 목표만 터무니없이 높은 것이 현실이다.
좋은 영어 공부 방법은 언제나 넘쳐난다. 나는 한국 영어교육에 총체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미시적인 방법론에 치우쳐서는 달라질 게 없다. 오로지 방법만의 문제였다면, 악착같은 한국인들은 벌써 50년 전에 이 난관을 뚫고 영어에 능통해졌을 거라는데 5백원을 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한국인이 영어를 못하는 건 우리 개인들의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초등학교 3학년 아이가 '저는 영어 못 해요'라고 말하며 기가 죽는 웃지 못할 현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의 잘못인 것 같다.
*참고 도서:
1. 당신의 영어는 왜 실패하는가?, 이병민, 우리학교 (특히 1부 - '나라 밖 영어환경'을 많이 참조)
2. 영어를 잘하면 우리는 행복해질까, 문강형준, 뜨인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