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적인 수업이 만드는 '부진'한 아이들

영어를 가르치는 일은 윤리적인가(1)

by 김현희

초등 교사들끼리 영어 교과 부진 판별을 받은 학생들을 구분할 때 쓰는 두 가지 표현이 있다. 많이 느린 아이와 학원을 안 다닌 아이. '많이 느린 아이'는 말 그대로 배움의 속도가 느리다는 뜻이다. 이들은 다른 과목의 성취도도 낮은 경우가 대부분이고 난독, 난산, 난서증 등을 갖고 있는 경우도 있다. '학원을 안 다닌 아이'는 만약 영어 학원을 다녔다면 평균적인 성취도를 나타냈을 학생이라는 뜻이다. 수년간 영어 부진 학생들을 지도하며 살핀 결과 후자에 해당하는 학생들의 수가 상당하다. 아마 학교 외부에서 생각하는 기준보다 훨씬 많을 거다.


영어 학원이나 방과 후 프로그램들이 마법 같은 수업 기술로 학생들의 영어 능력을 향상하게 하는 걸까? 그럴 리가. 어디까지나 학습 시간과 강도의 차이다. 초등학교 3-4학년 영어 교과는 주당 2시간, 5-6학년은 주당 3시간 수업이다. 학생들의 수준은 천차만별이지만 학급을 단위로 모여, 일주일에 두세 번 40분씩 수업을 한다. 그나마도 학교 방학 기간이면 영어 학습은 중단된다. 학원은 더 자주, 더 강도 높은 수업을 하고 방학 기간 집중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한다.


교육과정도 다르다. 예를 들어 초등학교 3학년 1단원에서 학생들은 'Hi, Hello, Goodbye라고 듣고 말하기, A~D 읽고 쓰기' 정도의 학습량을 2주(4차시) 동안 배운다. 이 정도 학습량으로 2주간 수업한다는 건 학원에선 불가능할 듯싶다. 활동과 놀이 중심인 초등 영어 공교육 과정에 비해 사교육은 내용과 문법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예전에 근무하던 학교에서 영어 방과 후 수업은 인기가 매우 높았다. 사설 업체에서 파견한 방과 후 수업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굉장한 양의 단어와 문장을 암기시키고, 매일 테스트를 했다. 반편성 역시 학년 단위가 아닌 주기적인 레벨테스트에 기반한 능력별로 이뤄졌다. 2010년대 중반이었음에도 체벌을 했고, 가끔 옆 교실까지 꾸지람을 하는 고성이 들려왔지만 그 수업의 신청 경쟁은 늘 치열했다. 하루는 동료 교사가 수업 시간에 짧은 단어도 제대로 읽지 못했던 학생이 갑자기 자신감 있게 수업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고 뿌듯해 칭찬을 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학생은 이렇게 답했다고. “네! 이제 저도 영어 방과후랑 영어 학원을 다니거든요!” 일단 눈에 보이는 '점수'를 빠른 기간 내에 올려주는 건 사교육 프로그램이다.


다른 교과에서 '많이 느린 아이‘가 영어 실력은 나쁘지 않은 경우도 왕왕 있다. 여기에서의 영어 능력이란 부진 판별을 받지 않고, 학교 영어 수업 활동 참여에 어려움이 없는 정도를 뜻한다. 이런 아이들은 예외 없이 사교육을 꾸준히 받아왔다. 즉 영어에 노출된 시간이 많았고, 암기학습에 익숙한 상태다. 학기 초에 아이가 영어 교과 부진 판별을 받으면 어떤 담임교사들은 학부모에게 영어 학원에 등록하도록 권유한다. 공교육 교사로서 해도 되는 말인가 싶겠지만 딴에는 진심으로 아이들을 걱정해서 건네는 충고다. 학교 교사들 중 자녀들에게 영어와 수학 사교육을 시키지 않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학교 안팎을 막론하고 학교 영어수업만으로 아이의 영어 교육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초등학교에 있다 보니 학생들의 영어 능력의 기원, 부진의 기원을 투명하게 보게 된다. 영어 학습을 시작한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고, 영어 공부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묻지 않아도 학생들이 재잘재잘 전해온다. 내가 근무 중인 학교에는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아이들이 많다. 이 아이들은 학교 영어 시간을 재밌는 활동이나 게임을 하는 시간, 학원 문법 영어 시간에서 해방되는 시간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반면 사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아이들은 6학년 정도만 돼도 학교 영어 수업을 어려워한다. 물론 나는 개인적으로 6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영어 공부를 시작해도 얼마든지 영어 능력을 키워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지난 3년간 학습 결손이 누적된 이유가 해결된다는 전제에서 가능하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로 상징되는 사교육과 학생의 영어 실력은 대단히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영어를 시작한 나이, 공부 방법, 영어를 바라보는 시각까지 부모의 경제력과 연결되어 있다는 연구 결과는 차고 넘친다. 즉 한국에서 영어는 개인의 능력과 성품이라기보다 문화자본에 가깝다. 영어는 영어 능력을 갖지 못한 집단으로부터 성공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문화재생산의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 2021년 9월 '기초학력 보장법'이 제정되고, 2022년 3월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기초학력 문제는 후속조치보다 예방이 중요하다는 것이 교육계의 상식이다. 하지만 현재의 교육과정과 평가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할 경우 영어 교과는 예방은커녕, 부진의 덫을 파고 학생의 실패, 그것도 특정 계층 학생들의 실패를 기다리는 것과 다름없다.


학교에서 그것도 초등학교에서 교사가 교육과정대로 정상적인 수업을 하고, 학생들이 정상적으로 수업에 참여하는데도 학원을 다니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부진 판별을 받는 학생들이 매해 변함없이 발생하는 건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지 않나. 재미있는 활동과 놀이만으로도 초등 영어 공교육이 즐겁게 그럭저럭 굴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의 이면을 소위 영어 교육 전문가라는 분들이 바라보지 못하거나, 보려 하지 않는 것 같다.


국가 교육과정은 '일상생활 및 다양한 상황에서 영어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자며 영어교육에서의 재미와 흥미, 자신감과 정서적 고양을 한가로이 강조하지만, 내가 볼 때 재미와 흥미만으로 외국어 능력을 신장하는 건 가능하지 않다. 한국의 언어 환경은 영어를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며 '학습'이 필요하다. 일정 수준 이상의 학습 강도와 학습 지속 기간이 필수적이고, 영어학습은 능동적인 인지활동의 차원으로 접근해야 한다.


대다수 학부모들이 원하는 '자유로운 의사소통 능력'은 사실 상당한 수준의 영어 능력이며 한국의 언어 환경을 고려할 때 해외 체류 경험, 국내에서의 장시간의 집중 영어교육 프로그램의 힘을 빌리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심지어 초등학교 교과서는 워낙 활동 위주라 공부할 내용 자체가 거의 적혀 있지 않고, 초등학생이 혼자 예복습을 하며 공부를 하기도 어려운 교과다. 중등 교육과정 역시 의사소통능력 신장을 강조하면서 정작 수능시험의 구조는 학생들이 문제풀이 기계가 되길 요구하는 등 앞뒤가 맞지 않는 것들 투성이다.


급한 대로 다른 문제는 일단 차치하고, 영어 공교육으로 가능하지 않은 수준의 영어 능력을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일부터 멈추자. 세세한 교육과정과 평가 체제를 수정하기 전에, 일단 한국의 언어 환경에서 학교 영어 교육을 통해 도달 가능한 영어 능력을 과학적으로 검증하는 일부터 다시 시작하자. 수많은 아이들이 영어 실패자로 내몰리고,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일군의 학생들이 들러리가 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영어는 가장 타락하고 위선적인 교과이자, 민망할 정도로 극명한 재생산의 기제가 되고 있다. 이 상황이 변하지 않는 한 나는 내가 하는 일이 과연 사회와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인지, 오늘도 내일도 끝없이 묻게 될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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