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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Jun 01. 2022

좋은 일꾼 되기는 글렀다

2022. 04.23.

2022. 04.23.


전교조는 활동가를 '일꾼'이라고 부른다. 지회장인 나도 공식적인 일꾼인데 나는 이 호칭이 좋게 느껴지지 않는다. 일꾼의 사전적 정의는 '삯을 받고 남의 일을 해주는 사람'이다.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일꾼이란 말을 들으면 '목표와 계획을 세우고 손익계산을 하는 주체'와 '수동적인 실행자'가 따로 있다는 느낌이 든다. 실제 '일꾼'이란 말을 주로 사용하는 대표적인 공동체는 교회와 북한이다. 그리스도의 일꾼, 하나님의 일꾼 등은 종교계에서 흔히 쓰는 표현이다. '일꾼'이란 단어를 검색하면 '작업 중인 북한 강계 강철공장 일꾼들', '농사일 동원된 북한 대암 협동농장 일꾼들'같은 기사가 뜬다. '대한민국의 참일꾼!'같은 표현은 선거기간 정치인들의 단골 멘트이기도 하다.


좋은 '일꾼'과 좋은 '리더'는 다르다. 물론 조직의 성격과 목표에 따라 다르지만, 경영과 조직 운영 전문가들은 이 둘의 덕목을 완전히 다르게 규정한다. 활동가들을 풀뿌리 조직의 리더가 아닌, 거대 조직의 일꾼으로 인식하는 조직의 리더십은 영원히 취약할 수밖에 없다. 현재 뿌리인 분회와 지회부터 최상부인 본부까지 전교조의 리더십은 내가 볼 때 총체적 난국이다. 일꾼으로 쓰이는 과정에서 많은 교사들이 뛰쳐나가거나 소진되거나, 혹은 애초 집행부 근처에 얼씬조차 하지 않는다. 결국 조직에 대한 충성심과 신념이 강하고, 봉사정신이 탁월한 헌신적인 활동가들만 남는데, 그들 한 명 한 명은 선의가 강한 사람들이지만 결과적으로는 불안정한 리더십 체계만 무한 반복된다.  


유명한 경영 이론 중 하나로 '피터의 법칙'이 있다. 수직적 계층 조직의 상층부가 필연적으로 무능해지는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일반 사원과 본부장, 사장 등에게 요구되는 업무 수행능력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에, 최고의 사원이 최고의 본부장이 된다는 보장이 없다. 하지만 조직은 해당 직책에 요구되는 업무 수행 능력보다, 지원자가 현재까지 보여준 업무 성과에 기초해 선발하기 때문에 상층부로 갈수록 구성원들은 무능해진다. 전교조만큼 '피터의 법칙'이 여실히 드러나는 조직도 드물 것 같다. 업무 능력이나 리더십보다 인맥, 무조건적 헌신, 해직 경험 등이 스펙이 된다. 헌신성과 불의에 맞서 싸운 결기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리더로서의 조직 운영 능력, 위기관리 능력, 구성원의 잠재력을 발견하는 능력 등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분명 생각해볼 문제다.    


고질적인 계파 정치 또한 전교조의 리더십을 취약하게 한다. 전교조에는 두 가지 계파가 있고, 나는 페이스북 분회를 운영하면서 계파 활동 그룹 일부와 스쳐본 적이 있다. 스치는 국면마다 충돌이 일었다. 첫 번째 계파는 교찾사다(교육 노동운동의 전망을 찾는 사람들). 2020년 코로나19 사태로 학교 내 교원과 공무직, 비정규직 간의 갈등과 충돌이 전면화되었을 때, 페북분회는 분회원들의 의견을 모아 제안서를 냈다. 갈등 상황을 방관하거나 회피하지 말고 단체의 대표들이 만나 상황을 중재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때 교찾사의 일부 활동가들은 페북분회의 명칭을 문제 삼고, 정치적 목적이 있다는 음모론을 펼치고, '소박하게 시작했으면 소박하게 머물라'라는 발언으로 인식의 바닥을 드러냈다. 또 다른 계파는 기존 참실련 계통이다. 해체했다고 들었는데 선거 때마다 후보를 세우고, 실제 지난 4년간 본부를 맡아 운영하기도 했다. 페북분회가 움을 틔우던 당시 나는 계파 따위 신경 쓰지 않았고, 풀뿌리와 중앙이 시너지를 내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을 대했다. 그들도 선의로 페북분회에 다가왔겠지만, 결과적으로는 페북분회의 네트워크를 이용만 했을 뿐, 나를 포함한 평조합원들이 민감한 교육계 사안에 대해 질의와 대화를 요구할 때마다 자취를 감추고 함구했다. 개인적으로 2020년 제안서 사건을 거치며 교찾사 진영 일부를 좀스럽고 오만하다고 판단했다면, 지난 몇 년 동안 NL계열의 본부 계파는 비겁하고 무능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위의 내용은 어디까지나 계파 외부자가 보는 인상 비평에 불과할 수 있다. 하지만 계파에 매몰된 '일부' 활동가들이 자발적인 풀뿌리 조직의 세력화를 반기지 않는다는 것만은 확신한다. 말로는 조합원 중심, 민주적인 조직, 현장 지원, 세대 교체를 외치지만 풀뿌리 조직이 전적으로 자신들의 편을 들어줄 때만 환영할 뿐, 비판이 가해지면 터무니없는 꼬투리를 잡거나, 무시하거나, 숨어버렸다. 


계파 활동가들은 충분히 아래로 내려가 풀뿌리 조직을 다지려 하지 않고, 사실 그럴 필요도 없다. 대다수 평조합원들은 위원장은커녕 지부장, 지회장 이름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고, 심지어 전교조에 계파가 있는 줄도 모른다. 실제 몇 년 전까지 나도 그랬다. '어련히 잘하고 계시겠지'라는 순진한 믿음과 무관심의 결과다. 현재 전교조 계파 활동가들은 계파끼리의 전쟁, 그들만의 리그에서만 승리하면 중앙을 장악할 수 있다. 물론 장악이래 봤자, 대다수 평조합원들의 무관심을 등에 업은, 한 계파의 수장 노릇일 뿐이지만 이런 형태의 리더십이 그들에게는 큰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사실 21세기의 교육자들이 '노동' vs'자주와 평화'를 기준으로 편을 나누는 것 자체가 코미디다. 교육은 노동, 평화, 젠더, 생태, 인권 등 모든 어젠다를 포괄하며 이를 교육에 자연스레 녹이는 것이 교육운동의 역량이다. 그들이라고 이를 모를 리 없다는 점에서 이념은 장식일 뿐, 계파는 인맥 그룹에 다름없을지 모른다.   


두 계파 모두 세력이 약해져 실체가 미약하고, 예전에 비해 갈등도 축소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난 선거 때 벌어진 양상만 봐도 축소니 해체니 하는 말이 나로선 믿기지 않는다. 내가 지회장이 된 이후, 계파 소속으로 알고 있는 한 활동가는 노골적으로 내게 적대감을 표출했다. 사실 열성 활동가들의 고생과 헌신을 모르는 바가 아니라 나도 한편으로 늘 미안한 마음이 있었고, 적대감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민망할 정도로 노골적인 적의가 실망스러웠던 건 사실이다. 나로서도 내 개인의 이익을 위해 던졌던 발언들이 아니기 때문에, 상대방도 공과 사를 구분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중심적 망상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종종 사방이 적인 듯한 기분도 없지는 않다. 이 글을 공개하는 게 현 상황에 도움이 될 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생각을 써서 밝히는 이유는, 


사실 지난 두 달간 마음고생을 조금 했다. 지회장이랍시고 크게 하는 일도 없고 지부에서 압박을 주는 것도 아닌데, 정신이 갑갑하고 영혼이 말라가는 기분이었다. 현실을 직면하고, 내 생각을 가감 없이 표현하는 일이 조직에 해를 끼칠 것 같아 글 한 줄도 쓸 수 없는 상태가 되기도 했다. 아무리 작은 직책이라도, 일단 맡은 이상 이래서는 안 되지 않나 싶었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두 달 만에, 내 한계를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좋은 일꾼이 되기는 글렀다. 당장 모든 걸 접고 포기하겠다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일꾼의 틀'에 나를 억지로 끼워 맞추지 않겠다는 뜻이다. 


지회장을 맡은 덕분에 나는 좋은 경험도 하고 있다. 지부 집행회의나 교육청 현안 협의회에 참석하며 배우는 것도 많고, 전교조라는 끈이 아니면 절대 만날 수 없었을 사람들과의 우정도 쌓고 있다. 학교에서 만난 나이스한 사람들과 차 마시며 나누는 한담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공적인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며 쌓는 공동의 소중한 경험이다. 내가 좋은 일꾼이 될 수 없다고 해서, 좋은 교육자가 될 수 없는 건 아니다. 좋은 일꾼이 아니라도 나는 지금보다 나은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 그러니 잘 지내고 있다, 씩씩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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