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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Aug 04. 2022

의미가치의 생성

교육희망 기고글 (2022/07/11)

(이 글은 교사신문 교육희망에 실렸습니다, 2022. 7. 11)


전교조의 조합비가 상대적으로 비싸서 문제라고 한다. 하지만 원래 사람들은 효용가치보다 의미가치가 높은 상품에 더 큰 액수를 지불하는 경향이 있다. 동네 시장에서 파는 가방보다 샤넬 가방이 비싼 이유는 샤넬 가방이 더 실용적이어서가 아니다. 실용성에서 낙제점에 가까운 람보르기니를 사람들이 선망하는 이유 역시 효용가치가 아니라 의미가치 때문이다. 조합비 문제는 냉철하고 합리적으로 계산해 풀어나갈 숙제다. 하지만 전교조가 '효용'을 뛰어넘는 '의미'를 생성할 수만 있다면 해결 지점은 의외로 다양한 지점에 위치할 수 있다. 물론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실용성과 합리성 부분은 조직 구조를 대대적으로 개편하고, 홍보와 소통을 강화하면 30년 넘게 쌓은 기술과 노하우로 어떻게든 헤쳐나갈 수 있다.  


진정 어려운 과제는 의미가치의 창출이며 이는 기술과 노하우보다 '감각'이 요구되는 일이다. 전교조의 의미가치란 전교조 소속 교사로서의 자존감과 긍지 형성, 전교조가 교사들의 좋은 경험과 성장의 발판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평조합원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활동가에게는 좋은 경험과 성장이 대단히 중요하다. 이것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활동가의 업무란 일방적인 희생 강요와 마찬가지이다. 나는 현재 지회장으로서 열심히 일하고 있지도 못하지만, 일해야 하는 의미와 가치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것도 사실이다. 고백하자면, 방황 끝에 임기마저 채우지 못할까 봐 눈을 질끈 감을 때도 있다.  


최근 전교조는 공식적인 '조직 확대 집중행동 기간'을 지정해 조합 가입 운동을 벌였다. 필요성에는 공감하지만 발상과 워딩의 근본부터 거부감이 일었다. 활동가들을 닦달하는 것보다 중앙과 지부들이 실책을 줄이고, 현장 감각을 높이는 것이 조직 확대에 더 효과적이라는 회의도 들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고민은, 나 스스로 주위 사람들에게 전교조 가입을 권유할 명분이 없고, 조합비가 절반밖에 되지 않는 타노조의 편익성을 뛰어넘을 의미가치도 제시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내가 생각하는 조직활동의 가장 큰 보상은 활동을 하며 얻는 좋은 경험과 성장이다. 하지만 한 개인으로서 정직하게 바라보고 말할 수 없는 상황에 거듭 봉착하고, '나는 왜 다른 활동가들처럼 착하고 헌신적이지 못할까'라는 자책의 반복이 좋은 경험이라 보긴 어렵다. 조합원들을 회유와 교육의 대상으로 보지 말라, 활동가들을 집토끼 취급하지 말라는 말이 위급한 현시점에 뜬구름 잡는 말처럼 들릴 걸 안다. 하지만 때로 가장 느린 걸음이 가장 확실하고 빠른 길이다. 조합원과 활동가들이 학교와 조직 곳곳에서 좋은 경험을 통해 교육계의 리더들로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이 필요하다. 일단 '일꾼'이라는 시대착오적인 명칭과 발상부터 버리시라.  


정부와 교육청 비판은 필요하다. 전교조가 주장하는 교사의 정치기본권 확보 역시 너무나 중요하다. 하지만 전교조는 지금 얼마나 민주적이고 투명하게 운영되고 있나. 전교조 정치에서 조합원들의 정치기본권은 얼마나 확보되어 있나. 벌써 수십 년째 전교조 선거 기간만 되면 조합원들이 활동가들에게 '누구 뽑아야 해요?'라고 묻고 있다. 전교조 소수 내부 정치의 주역들, 비공개적으로 진행되는 계파 활동에 대한 비판과 개선은 아직 제대로 시작되지도 않았다.  


민주노총, 시민단체와 연대도 중요하지만 더 급한 문제는 교사들, 조합원들 간의 연대다. 민주노총과의 연대가 전교조 구성원들의 연대에 위협을 가한다면 이는 직시하고 조율할 일이지, 무지와 오해로 일축해서는 절대 해결될 수 없다. 교직사회는 각자도생의 늪에 빠져가고 있으며 조합 역시 마찬가지다. 구성원들 간의 연대와 네트워크 구축은 오랜 시간과 노력, 중앙의 의도와 구성원들의 자발성의 균형이 필요하다. 공고하게 얽힌 다양한 네트워크 속에서 조직에 소속되는 의미가 자연스레 창출되도록 기반을 닦는 일은 건너뛸 수 없는 과제이다. 다만, 전교조의 의미가치를 창출하겠다면서 중앙이 주도해 의미와 구호를 정해 조합원들에게 일방적으로 하달하려 한다면 최악의 코미디가 펼쳐질 것이다.  


적어도 내게는 외부비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내부성찰이다. 조직 확대보다 중요한 건 내부 구성 정비와 기본을 지키는 자세다. 영광스럽던 승리의 경험이 빛을 잃어가고, 조합원의 이익추구와 보호라는 유인책을 타노조에게 내주고, 가치와 의미추구라는 동기까지 소실해가는 시점이다. '전교조는 아직 죽지 않았다!'라는 낙관과 위로는 정확한 현실 인식이 바탕이 되었을 때만 힘을 발휘한다.  


전교조가 생성해야 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최대교원노조의 자리를 잃은 시점에서 우리는 왜 전교조에 남아야 하나. 확신과 묘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단 기본부터 다시 구축하자. 조직의 뿌리부터 민주성을 확보하자. 조직 확대도 좋지만 내부 점조직들의 고리부터 연결하자. 조급하게 굴지 말자. 공부하고, 생각하고, 솔직하게 대화하자. 치열하게 반성하고 여유롭게 설계하자. 새로운 의미와 가치는 깃발에 새겨져 있지 않다. 21세기 전교조가 새롭게 생성해야 할 의미와 가치는, 민주 교원노조로서의 근간을 지키는 노력과 과정 속에서 우리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생성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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