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학년 영어 수업을 마치고 학생들을 교실로 보내고 있는데, 저 멀리서 학생 두 명이 ‘하일 히틀러’(나치식 경례)를 하면서 뚜각뚜각 영어실을 걸어 나가고 있었다. 해맑은 얼굴로 마주 보며 웃는 소리도 들려왔다. 깜짝 놀란 나는 아이들을 불러 세우려 했지만 이미 거리가 멀어졌고 다른 반 학생들이 영어실로 들어오는 바람에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다음 날 수업이 다시 시작됐고 수업 중 활동의 일환으로 각자 팀 이름을 정하는 시간이 있었다. 어제 하일 히틀러를 하며 사라졌던 학생이 손을 들고 말했다.
"우리 팀 이름은 ‘나치’로 할게요!"
교실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고,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보드마카 뚜껑을 힘주어 닫으며 물었다. 어제 복도에서 했던 나치식 경례에 혹시 무슨 맥락이 있는지, 정말 여러분은 팀 이름을 나치로 정하고 싶은지 말이다. 아이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직 여러분들이 어려서 모를 수 있어요."라는 말로 나의 일장연설이 시작됐다. 히틀러가 일으킨 전쟁과 광기 어린 파시즘은 수천만 인명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홀로코스트, 인종청소, 장애인과 집시 말살 정책 등이 인류 역사에 남긴 상처는 거대하며 여전하다. 당시 수많은 독일 국민들이 나치즘에 동조했다는 점은 특히 뼈아픈 사실이고 우리를 포함한 인류 전체의 성찰이 아직도 필요하다. 교육의 공간인 학교에서 나치식 경례를 해서는 안된다고, 수업 시간에 나치를 팀명으로 정할 수 없다고도 선언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몇 번이나 "여러분이 아직 어려서...", "여러분이 아직 몰라서..."라고 말했었다. 내 딴에는 학생들에게 의도성이 없었다는 점을 강조해서 수치심을 느끼지 않도록 하고 싶었는데 그 아이들은 오히려 그 말이 거슬렸던 모양이다.
"저희도 알아요, 알고 한 건데요?"
순간 내 언성이 조금 높아지고 말았다. "알고 그랬다면 정말로 잘못한 거예요!" 몇몇 머리 굵은 여학생들도 목소리를 높였다. "알았으면 왜 그랬냐?", "조용히 하고 선생님 말씀이나 들어!"
사건은 일단락이 됐지만 나는 학생들이 주장했던 '안다'는 말의 의미를 여전히 탐색 중이다. '하일 히틀러' 행동을 했던 학생들은 실제로 잡다한 상식이 풍부하고, 역사에 호기심이 많은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내 기준에서 보면, 아이들은 결코 충분히 알고 있지 않았다. 내 주장과 설득은 그들에게 얼만큼 가닿았을까? 수업 시간에 나치즘과 홀로코스트의 끔찍함에 대해 묘사하면서 나는 6백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된 사실을 강조했다. 아이들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길래 우리가 사는 광역시 인구의 4배가 넘는 숫자를 상상해 보라고도했다. 하지만 6백만이라는 수의 거대함을 실감한다고 해서, 학살당한 생명의 무게와 절규와 고통에 대해 나는 충분히 '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학생들에게 나치식 경례는 다수 유럽 국가들에서 절대적으로 금기시하는 행동이라 공공장소에서 그런 행동을 하면 벌금이나 구금 등 법적인 처벌을 받을 수 있다고도 했다. 아이들은 내 말을 듣고 눈에 띄게 동요했었다. 하지만 반응을 보며 추측건대, 본인들이 생각하기에 별 것 아닌 행동에 대해 가해지는 금기와 처벌의 강도에 대해 더욱 놀란 것 같았다. 나는 교사로서 내가 아이들에게 전할 수 있는 지식과 메시지에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전달하는 자의 능력이나 진정성, 학생들의 이해력과는 별개의 문제다. 이건 아이들의 몫이자 시간의 몫이다. 오로지 자신의 손으로만 뚫을 수 있는 시간의 터널을 통과해야만 한다. 시간 속에서 체감하고 교감하고 소통하고 무너지고 다시 쌓는 재구성의 과정이 필요하다.
확실히 요즘 아이들은 많이 '안다'. 특히 영어 수업 시간에 살펴보면 아이들의 어휘력이 상당히 높다는 걸 알 수 있다. 다수 아이들이 학원에서 하루에 수십, 수백 개의 영단어를 외우고 시험을 보니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아이들이 아는 단어의 '수'와 별개로 나는 여러 의문이 든다. 예를 들어 나치즘에 대해 알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학교에서 '하일 히틀러' 흉내를 내며 웃는 학생이 있다면 이 아이는 나치즘에 대해 제대로 아는 걸까 모르는 걸까?
일전에 4학년 교실에서 아이들 몇 명이 투덕거리다 내게 뛰어와 대뜸 물었다. "선생님! 텔레스코프(telescope)가 망원경이에요, 현미경이에요?" 내가 대답을 해줬더니 한 학생이 다른 학생을 향해 으스대며 자랑을 했다. 혹시나 해서 여러분은 현미경과 망원경의 차이를 아느냐고 묻자 둘 다 제대로 대답하지는 못했다. 영어로 telescope가 망원경, microscope가 현미경인걸 알지만 둘의 차이를 한국어로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아이는 이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걸까 모르는 걸까?
곧이어 텔레스코프(telescope)를 현미경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학생이 다시 뛰쳐나왔다. "선생님 비동사는 일반동사가 아니죠?" 나는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싶으면서도 얼떨결에 대답을 했는데, 아이는 친구들을 향해 달려가면서 외쳤다. "거봐! 내가 비동사는 일반동사가 아니랬잖아! 내가 영어학원 더 오래 다녔거든?!". 비동사와 일반동사의 차이를 구분하지만, 영어문법에 대한 지식을 경쟁의 도구로, 영어를 타인을 깎아내리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경우의 언어 역량에 대해서는 어떤 진단을 내려야 할까?
넓지만 얇은 앎, 과시하는 앎, 빈수레의 요란함 등은 전인류의 근심거리인 듯 한데, 유독 영어 교과에서만큼은 역량의 '깊이'를 고민하는 이를 찾기 힘들다. 아이들의 학원 교재와 단어집을 살펴보면 내가 어렸을 때와 동일하게, 여전히 영단어와 한국어를 1:1로 매칭시켜 외우는 방식을 쓰고 있다. 그렇게 아는 단어의 '수'를 무작정 늘려서 문제를 빠르고 정확하게 푸는 능력에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한국인들은 매사 눈치를 보는 게 문제라며 영어에서는 정확성보다 '유창성'이 중요하다는 점을 유난히 강조하는 분들도 있다. 일리가 없다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유창성을 마치 별 의미도 없는 말을 마구 이어 붙여 단어를 늘어놓는 능력으로 착각하는 경향도 있는 듯해 우려스럽다.
무언가를 안다는 것, 심지어 작은 단어 하나를 공부할 때도 우리가 고려할 지점들은 많다. 먼저 주변 텍스트(co-text)이다. 같은 단어도 어떤 어휘와 함께 등장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spend'라는 동사는 'time'과 함께 쓰이면 '시간을 보내다'라는 뜻이고, 'money'와 붙으면 '돈을 쓰다'라는 뜻이며, 'effort'라는 단어와 함께하면 '노력을 들인다'라는 뜻이 된다. 상황 맥락(context of situation)에 따라서도 말의 뜻은 달라진다. 예를 들어 '너밖에 없어'라는 말은 던져진 질문이 "그 짐 같이 들어줄까?"인지 혹은 "내일 현장체험학습 가는 애들 누구야?"인지에 따라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문화적 맥락(cultural context) 역시 중요하다. 예를 들어 구직난에 시달리는 젊은 친구 둘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A: I can't get a job without experience, but I can't get experience without a job!
(경험이 없으면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는데, 일자리를 구하질 못하니 경험을 쌓을 수도 없어!)
B: It's a catch-22!
'Catch-22'는 1961년 미국 작가 조지프 헬러가 쓴 미국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대표작이자 반전 소설의 걸작으로 불린다. 소설의 주인공은 위험하고도 의미 없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으려 하는데 그러려면 자신이 미쳤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하지만 자신이 미쳤다는 것을 안다는 건 자신이 미치지 않았다는 걸 보이는 셈이므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 상황에 빠진다. 전쟁의 모순과 불합리함을 풍자한 이 소설은 고전의 반열에 올랐고 'Catch-22'는 보통명사로 사전에 등재되었다. 그래서 미국 문화권에서는 특별히 문학에 조예가 깊지 않아도 일상적인 딜레마 상황에서 가볍게 'Catch-22'라는 단어를 쓴다.
이렇듯 단어의 맥락은 무궁무진하며 언어에서 맥락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단편적인 단어 기억력이나 시험 점수만으로 '나는 이 단어를 알고, 너는 모른다!'라고 주장하는 것 역시 매우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이 될 수 있다.
넓이와 깊이는 조응한다. 방대한 어휘력을 소유했지만 이를 이용해 성차별적, 인종차별적, 계급차별적인 언어를 쓴다면 우리는 이 사람의 어휘력을 넓고, 깊고, 포용력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단어를 선택하고, 조합하고, 힘을 싣고, 의미를 생성하고, 전달하고, 또 이를 수용하고 해석하는 모든 일은 인간에게 달려있다. 언어 역량은 한 인간의 넓이, 깊이와 가장 밀접한 관련을 맺고 인간의 품위는 그 인간이 쓰는 언어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육이 한 사람을 넓고, 깊고 충만한 인간으로 성장하도록 조력하기 위함이라면 영어 교육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다른 과목에서는 이해력, 비판적 사고력, 창의력 등을 강조하면서 영어라는 언어는 단순한 '도구', 영어 과목은 단순 암기과목, 영어 역량은 피상적인 기능 정도로만 환원하는 현재의 풍토는 언어학의 측면에서 과학적이지 않고 물론 교육적이지도 않다. 나는 아이들이 넓고, 깊은 언어의 터널을 뚫어 넓고, 깊은 인간으로 성장했으면 한다. 터널을 뚫는 방법, 터널의 모양, 방향 등은 무수히 다양할테지만 하나는 확신한다. 맥락도 깊이도 없이, 조각난 단어의 '껍데기'들을 무작정 들이붓기만 하는 교육은 넓고, 깊고, 가지가 풍성한 터널을 뚫어나가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