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잡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현희 Oct 05. 2024

아무나 할 순 없다

2024. 09. 28.

지부장은 아무나 해도 되는 자리인 줄 알았었다. 지회장 경력 1년, 그것도 별로 하는 일도 없던 지회장 시기 1년을 거쳤을 뿐인데 "당신이 해야 한다,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라며 반쯤은 멱살이 잡힌 상태로 선거에 나왔던 2년 전. 한편으로 이런 생각을 했었다.


'나 정도 사람에게 이렇게 권할 정도면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인가 보다. 신규교사 때도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 없었지만 맨땅에 헤딩하며 해냈으니 지부장 일도 어떻게든 하면 할 수 있겠지!'


당시 상황을 돌이켜 보면 솔직히 아찔하다. 그 정도로 만만한 조직도 아니고 정치적 측면에서 안팎으로 쉬운 제반 조건도 아니다. 이 조직에 태평성대가 과연 있었는지 모르겠다. ('좋았던 시기'가 있었다는 말이 전설처럼 들려오긴 하는데...) 적어도 대전 지역은 그랬을 리가 없을 듯하다. 내 곁에 든든한 분들이 버텨주셨지만 전혀 외롭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특히 2023년 여름은 나침반도 없이 조각배 하나에 몸을 싣고 태풍이 몰아치는 망망대해를 헤쳐 나가야 했다.


이후 내부적으로 쉽지 않은 상황도 있었다. 그때 여러 고민 속에서 나는 왜 이곳에 있는지, 왜 이 일을 하는지 많은 생각을 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교육'에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이란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가끔 걷잡을 수 없이 밀려오는 허무와 비관과 한량의 욕망을 뚫고 나갈 수 있게 중심을 잡아주는 주제가 내겐 교육, 교육, 교육이었다. 어차피 한 번뿐인 인생이다. 부족한 사람이지만 내가 쓸 수 있는 공적인 에너지는 교육을 중심으로 미래 세대를 위해 풀고 형성해 나가겠다, 라고 마음을 다잡고 다시 큰 난관 하나를 뚫고 나왔었다.   


요즘은 매일 후임 세울 걱정을 한다. 어떤 사람이 리더가 되길 바라는지, 다음 지부장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도 생각한다.


내가 2년 간 만난 타지역 지부장들 대다수는 지부장이 되기 전에 처장이나 정책실장 같은 전임 경력이 있는 분들이다. 즉 그들은 체계를 알고 경험과 소양을 갖췄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모두가 학생 때부터 운동을 해왔다. 그런 경험, 문화, 신뢰, 네트워크, 삶의 양식 등은 이런 운동 조직을 이끌 때 좋은 조건이 된다. 그러한 밑바탕이 전혀 없는 나 같은 사람이라도 일단 일을 시작할 수는 있다. 하지만 경험, 네트워크, 조직에 대한 강한 애착 등이 부재한 빈자리를 메울만한 무언가가 필요하건 사실이다. 그게 나로선 '교육'이었지만 여러 여건상 쉽지 않았고 자주 고뇌가 들끓었다. (최근 내가 쓴 '교육과 그 밖의 것들'이란 글은 하고 싶은 말의 90%를 속으로 삼키며 썼다)


노동조합 전임직을 지나치게 어렵게 보고 겁을 내는 것도 문제지만(사람 구하기 힘든 건 전국적인 문제), 너무 쉽게 보는 것도 문제다. 전임직을 고단하고 지루한 학교 생활을 잠시나마 피할 수 있는 탈출구 정도로 생각해서도 안되는데 모든 노동조합에서 이런 사례가 늘어날 조짐도 보인다.


노동조합 전임에겐 학교 일보다 많은 자율성과 책임이 부여된다. 난도 높은 문제에 자주 직면하지만 설렁설렁 처리한다고 해서 악성민원인이 쫓아올 일은 거의 없다. 학교만큼 행정적 규율이 타이트하지 않다는 면에서 어떤 방식으로 일하느냐에 따라 학교의 업무보다 쉬울 가능성도 있다.


즉 어렵게 하자면 한없이 어렵고 쉽게 가자면 쉬울 수도 있는 일이다. 대부분의 선량한 조합원들은 우리들의 얼굴만 봐도 고맙고 안쓰러워하는 무언의 메시지를 보낸다. 그래서 더더욱 평균 수준 이상의 책임의식과 객관화 능력이 필요하다.


"저는 워라밸을 무엇보다 중시하며, 임기 동안 오로지 제가 하고 싶은 일만 하겠습니다"라고 공약을 발표하지 않는 이상, 전임자로서 특히 선출직으로서 안일하고 무책임한 태도는 모두를 향한 기만이다.


덧붙여 협업 능력도 중요하다. 학교 교실 수업 상황과 달리, 전임들은 예측 가능하지 않은 순간에 예측 가능하지 않은 문제를 맞닥뜨리고 매 스텝마다 머리를 맞대고 논의해야 할 일이 많다(물론 내가 처음이라 더욱 그랬을 거다). 학교 동료들 간의 관계보다 훨씬 밀착도가 높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갈등 발생 가능성도 크다. 매 순간 정치와 조율 능력을 발휘해야 하고, 부족하다면 기를 쓰고 성장시켜야 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정말 운이 좋았다. 배울 점이 많은 훌륭한 사람들이 곁에 있어줘서 언제나 감사한 마음을 품고 산다.  


요즘 후임 문제로 걱정이 많다. 누가 될지 모를 다음 사람들을 생각하며, 앞으로도 이런 두서없는 글을 계속 남기게 될 것 같다.


(사진은 지부장 3개월 차 때 주말여행에서 찍었던 사진이다. 3개월 차 때, 참 귀엽다 귀여워..)


매거진의 이전글 펄럭펄럭펄럭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