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잡문

딜레마

2025. 06. 13.

by 김현희

중학교 1학년 겨울이었다. 친구와 길을 걷는데, 1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단정한 청년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교회에 공부하러 가자고 했다. 친구는 교회에 다녀본 적이 있었지만, 나는 1년에 한 번 석가탄신일마다 할머니를 따라 절에 가는 게 전부인, 종교와는 거리가 먼 아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경을 쓰고 맑은 피부를 지닌 청년에게 마음을 뺏긴 우리는 엄마 뒤를 따르는 새끼 오리처럼 그를 따라갔다.


여러 개의 방으로 나뉜 곳에서 사람들은 모여 앉아 작은 목소리로 기도하고 있었다. 내가 TV에서 보던 성당이나 교회의 이미지와는 꽤 달랐지만, 우린 그곳에서 열렬한 환대를 받았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책을 읽고 기도를 하는 시늉도 해봤다.


세 번째 방문쯤이었을 거다. 기도 시간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큼지막한 액자 속 문구를 읽어가다가, 눈에 걸리는 문장을 발견했다.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지만, ‘한국인 안모 씨는 대속하고 부활한 하나님’이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청년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사람이 신이에요?” 그는 엄숙하게 답했다. “공부하다 보면 깨달을 수 있어요.”


나는 즉시 탈출 계획을 세웠고 어리둥절해하는 친구를 질질 끌고 나왔다. 친구는 (어쩌면 나도) 오랫동안 청년을 잊지 못했다.


첫 번째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 얼떨결에 3만원을 내고 도인들과 함께 제사를 지낸 적도 있다. 당시엔 ‘도를 아십니까?’라는 말이 유행하기 전이라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따라갔다. 언니뻘 되는 자칭 '수도승'은 세상의 이치를 탐구 중이라고 했고, 알 수 없는 허무함이나 고독함에 시달리던 나는 그 말에 이끌렸다. 하지만 금세 깨달았다. 예수도, 석가모니도 믿지 않는 내가 사람 하나를 모시며 살아갈 순 없었다.


그 이후로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전혀 사이비가 아닌) 일반적인 교회나 절에 종종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 과정을 통해 확실히 알게 된 건, 나는 종교를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유형의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깊게 발을 담가본 적은 없었지만. 종교의 순기능을 인정하는 편이기에 내심 아쉽기도 하다.


딜레마는 여기서 시작된다. 운동과 종교는 겉보기에는 다르지만, 실상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사회운동도 종교처럼 집단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의례적인 행위(예를 들어 집회나 퍼포먼스)를 통해 신념을 확인하며 연대를 강화한다. 종교적 열정과 운동적 열정은 서로 닮아 있다.


짧은 시간이나마 경험한 바로는, 현재 운동판에서 가장 강력한 정파의 활동 방식은 종교의 포교 방식과 유사했다. 믿음과 신념이 강하고 일사불란하다. 문제는 내가 바로 그 종교적 색채와 사고방식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지닌 인간이라는 것이다.


지부장 시절, 조합에서 ‘조합원 집중 확대 기간’을 설정하고 활동 지침을 마련했을 때 나는 (짜증을 내며) 반발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교회에도 비슷한 기간이 있다. 이른바 ‘전도폭발 기간’. 사회운동의 전략과 종교의 포교 매뉴얼은 비슷한 작동 원리를 공유한다.


꼬장꼬장하게 논리적 정합성을 따지며 움직이는 정파가 좌충우돌하다 침몰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현실의 구조와 제도를 바꾸려는 사회운동, 내면의 구원과 영성을 추구하는 종교의 세계는 분명히 다르지만 때로는 같은 전략과 같은 언어를 쓴다. 나는 그 둘 사이 어딘가에서 여전히 불편한 시선을 유지한 채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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