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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원노조 전임 시절, 학교 내 직종 간 갈등은 정기적으로 폭발하는 폭탄이었다. 공무직 노조와 학비노조가 쟁의행위나 파업에 돌입하면 현장 갈등은 증폭했다. 유치원 방과후 전담사가 파업을 하면 유치원 교사의 업무가 폭증했고, 조리 종사자의 쟁의행위는 영양교사의 업무 마비와 민원 스트레스를 야기했다. 쟁의의 화살은 교육청을 향하는데 충격을 받아내는 건 학생과 교사들이었다.
조합원들이 고통을 호소해도 교원노조 전임자가 중재할 여지는 없었다. 타 노조의 쟁의에 개입하는 행동은 법적으로 부당노동행위가 될 수 있고, 윤리적으로도 정당성을 얻기 어렵다. 일각에선 연대의식을 촉구하지만, 각자도생의 현장에서 도덕적 호소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노동조합 전임자로서 마주한 가장 큰 벽은 업무의 양이 아니었다. 갈등의 한복판에서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었다.
2년간의 고뇌 끝에 내린 결론은 명확했다. 교사도 노동기본권을 쟁취해야 한다. 노동권이 모든 갈등을 해결해 주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대등한 법적 권리를 갖고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 있다. 연대는 당위나 선언이 아니라 설계이자 구조적 약속이다. 현재의 학교는 연대의 원리가 작동할 수 없는 구조다. 타 직종이 ‘노동3권’이라는 창을 들고 교육청과 싸울 때, 교사는 방패도 없이 이쑤시개 하나 들고 그 파편을 온몸으로 맞고 있다. 교사가 대등한 협상자로 나서지 못하는 한, 학교 내 갈등은 음지에서의 끝없는 감정싸움과 폐쇄 커뮤니티 속에서 혐오로 치달을 뿐이다.
‘교원노조법’이라는 빌런
흔히 교권 침해의 주범으로 학생의 문제행동과 학부모의 이기심을 지목한다. 하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눈에 보이는 갈등은 현상의 단면이자 결과일 뿐, 거대한 몸통은 ‘5.31 교육체제’와 ‘교원노조법’이라는 구조적 모순에 있다. 1990년대 중반 도입된 ‘5.31 교육체제’는 교육을 상품으로, 교사와 학교를 공급자로, 학생과 학부모를 소비자로 규정했다. 경제학자가 설계하고 관료가 집행한 시장 논리 정책 속에서 교사는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평가 대상일 뿐이다. 무한 경쟁과 수요자 중심주의가 지배하는 현장에서 경쟁은 심화했고, 교사는 민원의 총알받이가 되었으며, 학교는 쏟아지는 정책 실험 속 아노미에 빠졌다.
5.31 체제가 교사를 서비스 제공자로 규정했다면, 교원노조법은 교사가 자신의 처우나 노동조건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하는 족쇄로 작용해 왔다. 중학생도 배우는 노동3권 중 교사가 가진 건 단결권뿐이다.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은 사실상 박탈당했다. 교육체제는 교사를 시장으로 내몰고, 법은 교사에게서 최소한의 방어권조차 빼앗은 셈이다.
교원노조법은 교섭 범위를 ‘교원의 사회경제적 지위 향상’이라는 모호한 울타리에 가둔다. 학교를 둘러싼 핵심 의제들은 모두 교섭 대상에서 제외된다. 인사권? 안 된다. 예산 편성? 안 된다. 정원 논의? 정책 사항이라 거부당한다. 교육과정? 어림없다. 고교학점제나 AI 정책 같은 핵심 현안? 협상 테이블에 올릴 수조차 없다.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된다. 교육 관료들이 ‘정책 사항이라 교섭 대상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으면 그만이다.
교원노조와 교육부가 21년째 무단협 상태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싸울 무기도 다룰 의제도 없는데 무슨 협상이 되겠는가. 지부별 단체교섭 내용도 마찬가지다. ‘지양한다’, ‘지도한다’, ‘권장한다’ 같은 문구들로 가득하다. 실질적 구속력이 없는 이현령비현령식 협약이 현장에서 힘을 발휘하기는 어렵다.
결정적으로 교사에게는 단체행동권이 없다. 교육당국이 일방적인 정책을 투하해 현장이 아수라장이 되어도 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서명, 성명 발표, 집회가 전부다. 소리 높여 외쳐봤자 멈출 권리 없는 교사들의 말에 당국은 눈 하나 깜짝할 필요가 없다. 교사가 파업권을 주장하면 일각에선 ‘아이들을 볼모로 잡는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교사와 학생은 이미 정책의 볼모이자 인질이다. 흔히 교육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핀란드와 독일의 교사들은 작년에도 파업했다. 그들은 급여와 노동 환경은 물론 정원, 수업 시수, 보조 인력, 교육과정 등에 깊숙이 관여하며 노동기본권을 통해 교육정책 결정의 대등한 파트너로 존재한다.
‘교권’에서 ‘노동기본권’으로
교권 담론으로 현실을 돌파하는 건 한계에 다다랐다. 교권은 본래 인권, 노동권, 교육권을 포괄하는 개념이지만, 현실에서 교권은 존중과 신뢰라는 도덕의 틀 안에 갇혀 있다. 교육 당국이 교권 담론을 마다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 활용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이 프레임 안에서는 실질적인 구조 개혁 없이 ‘스승의 날’ 교권 존중 캠페인이나 각종 연수로 생색을 내며 현 체제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사는 ‘교권을 지켜달라’고 호소하는 대신, ‘노동조건을 협상하자’고 요구해야 한다. 교권이 보호를 요청하는 수동적 프레임이라면, 노동권은 교육 가능한 환경을 스스로 설정하는 능동적 협상의 언어다. 교사는 교권 침해의 ‘피해자’가 아니라, 교육의 본질을 훼손하는 정책에 선을 그을 수 있는 ‘주권자’가 되어야 한다. 교육할 권한은 고사하고 타 직종의 파업과 행정 혼란까지 오롯이 교사가 감당해야 하는 지금의 학교 구조는 이미 파산했다. 교사의 손발을 묶는 교원노조법은 폐지해야 한다.
교사일 수밖에 없다
교사 출신 정치인이나 장관이 학교를 바꿀 것이라 기대했으나 현실은 달랐다. 거대 관료 조직과 정무적 이해관계라는 벽 앞에서 현장의 목소리와 기대는 서류 더미 속으로 침몰했다. 이는 필연이다. 누구도 교사를 대신해 싸워주지 않는다. 교육개혁의 주체는 교사다. 매일 학생의 얼굴을 마주하고 무너지는 교실에서 실존적 고민을 이어가는 교사 말고는 누구도 현장을 바꿀 수 없다.
교사는 단순한 수업 기술자도, 감정 서비스 제공자도, 도덕적으로 무결한 성직자도 아니다. 전문직 노동자로 바로 서기 위해 필요한 건 시혜적 존중이 아니라 집단적 협상력이다. 노동3권은 학교가 더 이상 정책 실패의 하수처리장으로 전락하는 것을 저지하고, 학생 앞에 당당한 교육자로 설 마지막 방어선이다.
넘어야 할 벽이 태산이다. 노동조합 혐오가 공기처럼 숨 쉬는 사회에서 교사의 노동기본권 쟁취에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 예측조차 어렵다. 하지만, 이 한 발을 내딛지 못하면 교육 주체로서 교사는 없다. 언제까지 방패도 없이 이쑤시개 하나 들고 날아오는 파편이나 맞으며 서 있을 텐가. 보호받아야 할 피해자에서 교육의 조건을 결정하는 주권자로 이동하자. 교권이 아니다. 노동3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