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교육

부모에게 경의를

2025. 12. 20. 페북에 메모

by 김현희

어릴 적 나는 종종 집이 싫고 부모님이 답답했다. 우리 집이 물리적으로, 문화적으로 더 현대적인 집이길 바랐다. 내가 볼 때 아빠는 자주 필요 이상으로 무서웠다. 엄마가 책이나 드라마 속 여성들처럼 씩씩하고 호탕한 사람이 아닌 것도 못마땅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친척들이 모이는 김장날이나 명절이 좋았다. 사촌들과 신나게 놀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마는 큰집에만 다녀오면 이불속에서 끙끙 앓거나 아빠와 말다툼을 벌였다. 시집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자기주장을 펼치지 못하는 엄마도, 이 문제에 유독 꼬장꼬장한 아빠의 모습도 못마땅했다.


머리가 굵어지면서 엄마가 여성으로서 어떤 위치와 조건에 처했었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됐다. 6남매를 낳은 할머니는 남편을 일찍 잃고, 둘째 아들이자 유독 성실했던 우리 아빠를 남편처럼 의지하며 살았다. 그런 시어머니와 한 동네에 사는 삶이 어떤 의미인지 어린 시절의 나는 이해하지 못했었다.


또 우리 집이 분명 가부장적이라는 한계가 있었지만, 시대를 감안하면 꽤나 멀쩡한 가정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이를테면 우리 집에서 덩치 큰 아빠가 엄마를 때리거나 물건을 부수거나,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엄격한 훈육은 주로 아빠 몫이었는데, 두 분 사이에 긴장과 갈등이 있는 시기에도 우리가 상대적으로 만만한 엄마에게 버릇없이 굴면 아빠는 가만있지 않았다. 어릴 땐 그런 모습도 싫었다. 왜 엄마는 더 주체적이지 못하고 아빠의 보호와 도움을 받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판단은 조금 다르다. 교육적으로 이상적이지는 않았을지라도 야비하지 않은 훈육이었다.


내가 20대 때 잠깐 만났던 사람이 말다툼 끝에 카페에서 벽에 물건을 던지고 '너처럼 고집 센 여자는 안된다'라고 말했을 때, 망설임 없이 이별을 결심했던 이유도 돌이켜보면 자란 환경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나로선 사람이 특히 남자가 물건을 집어던진다는 건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내 기준에서 충분히 권위적이었던 우리 집에서도 '여자가 이래선 안된다' 따위의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금요일 밤이었던 어제, 배달된 지 20분이 지나 식어버린 피자를 식탁에 올려두고, 나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방학을 앞두고 요동치는 교실, 이해하기 어려운 어떤 학부모의 행동, 이 와중에 감기까지 찾아와 파김치가 된 상태였다. 나는 한숨을 쉬며 배우자에게 물었다. “도대체 우리 엄마 아빠는 그 모든 걸 어떻게 해낸 걸까?”


나의 부모는 50년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무일푼으로 가정을 일구고, 아이 셋을 낳아 길렀다. 두 사람 모두 꼭두새벽에 집을 나서 대중교통을 타고 일터로 향했고, 하루의 끝에 그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지금의 나에게 집이 휴식의 공간이라면, 부모에게 집은 끊임없는 노동현장이었다. 돌아오자마자 산처럼 쌓인 집안일을 해냈고, 그 와중에 엄마는 한 동네에 사는 시어머니와의 상시적인 긴장과 기싸움도 견뎌야 했다. 지금 나의 눈으로 보면, 미쳐버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기적 같은 삶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아이들을 돌보고 가르치며 삶의 윤리와 경계를 지켰다.


요즘 내 주위 아이들을 보면, 가정에서 훈육은커녕 최소한의 양육조차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의문이 들 때가 있다. ‘그들도 먹고사는 게 바빠 어쩔 수 없겠지’ 하고 이해하려다 보니, 결국 같은 질문이 돌아온다. 도대체 나의 부모, 이 세상의 수많은 부모들은 그 역할을 어떻게 감당해 왔던 것일까.


나의 부모는 다큐멘터리에 등장할 만큼 특별히 이타적이거나 숭고한 삶을 살지 않았다. 미화하고 싶지도 그대로 본받고 싶지도 않다. 그럼에도 나이가 들수록 설명할 수 없는 무게감이 밀려온다. 말없이 자신의 몫을 해내며 살아온, 존중받아 마땅한 수많은 부모의 삶들에 조용한 경의를 보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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