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주린 병사들 앞에 고깃국이 놓였습니다.
그러나 병사들은 먹기를 주저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국에 들어간 고기의 출처는 방금 전까지만해도 살아있던, 장군의 애첩이었기 때문입니다.
장군은 눈물을 흘리는 병사들에게 그 고깃국을 강제로 먹였습니다. 오직 성을 지키겠다는 일념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식인은 첩에서 노비로, 노비에서 백성으로 이어졌고, 끝내 성 안의 백성 3만 명 가량이 식량으로 소모되고 나서야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오늘은 국가를 위해 인간이기를 포기했던 당나라의 '장순'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등주(鄧州) 남양(南陽) 출신의 어느 장씨 젊은이가 진사에 급제했습니다. 어릴때부터 영웅호걸들과 어울리고 전쟁을 다루는 온갖 서적에 능통했던 그는, 지방 현령에 부임한 뒤 곤경에 처해 의탁해오는 자가 있으면 재물을 아끼지 않고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호걸의 이름은 순(巡), 때는 당나라 개원 말이었습니다.
임기가 끝난 장순이 장안으로 불려갔는데, 당시 현종에 의해 총애를 받고 있던 양귀비의 친족인 어느 양씨는 황제에 의해 친히 국충國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는, 당대의 재상 이임보의 권위에 도전할 정도로 그 위세를 떨치고 있었습니다. 이에 어떤 사람들은 앞날이 창창한 장순을 찾아가 양국충의 일파가 될 것을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장순은 조정이 어지럽다는 핑계를 대며 다시 한 번 지방의 현령으로 내려가기를 자처합니다.
피난을 가는 현종
장순이 우려하던 대로, 번영하던 당나라의 성세는 지방절도사의 반란과 할거로 인해 마침내 끝장났습니다. 중앙조정에서의 권력다툼으로 인해, 지방에서 세를 키우던 절도사 세력이 딴 마음을 품게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755년 11월, 평로, 범양, 하동의 절도사를 겸하고 있던 안록산이 난을 일으키고 스스로를 대연의 황제라 자칭하는, 이른바 '안사의 난'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때 장순은 진원현의 현령으로 있었는데, 진원현이 속해있던 초군의 태수를 비롯하여, 수많은 주현의 태수와 현령들이 반군에게 일찌감치 항복했으나 장순만은 격렬히 저항했습니다. 결국 장순은 헌원의 사당에서 대성통곡을 하고는 직접 군을 일으켜 황실에 봉사하고자 하니, 이 때 장순을 따르는 군사들의 숫자가 무려 일천여 명이었습니다.
장순은 이 병사들을 이끌고 옹구(雍丘) 근처를 지키던 가분의 세력과 합쳐 병력은 이천이 되었는데, 이 때 옹구현령 영호조(令狐潮)는 현을 통째로 들어 반란군에게 바치고는, 본인은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가 회양의 정부군을 격파하여 관군 포로 일백여 명을 붙잡아왔습니다. 결국 처형당할 운명이었던 그 포로들이 기회를 틈타 난을 일으키니, 성안이 온통 난리에 빠졌고, 장순과 가분은 그 혼란을 틈타 옹구성을 점령하고는 영호조의 처자식을 도륙하여 성 위에 매달았습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분노에 휩싸인 영호조가 일만 오천의 군세를 이끌고 다시 돌아와 옹구성을 공략하자, 가분은 나가서 싸웠으나 결국 병력의 열세에 패해 병사들에게 짓밟혀 전사했고, 장순은 무수히 많은 상처를 입었으나 간신히 살아돌아오니 무릇 제장과 병사들이 장순을 우두머리로 삼았습니다. 이후로도 장순은 여러차례 반군의 공격을 물리쳤는데 적을 거의 1만가까이 죽이는 동안 장순의 군대는 겨우 일천의 사상자만을 내었습니다.
영호조는 이회선, 양조종, 사원동 등 반군 측의 여러 장수들을 대동한 채 다시 4만의 군세를 이끌고 옹구성을 침략해왔습니다. 이 때 옹구성에는 겨우 2천의 수비 병력밖에 없었기에, 성내의 군민들이 하나같이 떨었습니다. 장순은 부하들을 독려하고자 직접 일천의 병사를 이끌고 여러 작은 소부대로 나누어 갑자기 돌진해 나가니 반군이 크게 패해 후퇴했습니다.
다음날 반군이 다시 모여 석포를 동원한 채 성을 공략했는데, 성루와 담장이 모두 부서지는 와중에도 장순은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없이 목책 위에 서서 방어전을 지휘했고, 성벽의 무너진 부분을 타고 반군이 기어올라오자, 장순은 기름먹인 짚단에 불을 붙여 던지도록 지시하는 등 분전했습니다. 밤이 되면 직접 앞장서 적진의 병영을 기습하는 등 그렇게 육십일 넘도록 삼백번 넘는 크고 작은 전투를 하며 옹성을 굳게 지켰습니다. 이에 영호조는 군대를 물려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영호조는 또 다시 군대를 데리고 옹성으로 돌아와 40일간을 공성했습니다. 이 때 이미 수도인 장안이 무너져 현종은 사천 땅으로 도망했는데, 조정과의 연락이 끊긴지 오래였기에 장순은 이 사실을 알 수 없었습니다. 이에 영호조가 서신을 보내 천하의 대세가 기울었음을 알리니 제장들이 크게 당황했습니다. 이 중에서 개부(開府)니 특진(特進)이니 하는 높은 작위에 있는 장수 여섯이 특히 항복할 것을 주장했고, 이들이 군사들 사이에서 인망이 높았기 때문에 장순은 짐짓 허락하는 체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장순은 당상에 천자의 화상을 걸어놓고는 사람들을 모아 조례를 거행하니 군민 모두가 눈물을 흘리는 와중, 그 여섯 장수의 불충함을 꾸짖고 단칼에 참수시켜버림으로써 결사항전의 뜻을 굳혔습니다.
옹구가 오랫동안 포위되어 식량이 부족해지자, 장순은 야간에 거짓 출진을 가장하여 적의 군량선을 탈취하였고, 이렇게 빼앗은 곡식이 모두 일천여 곡斛에, 얻지 못한 나머지 양식은 모조리 불을 놓아 태워버렸습니다. 영호조가 분노해 다시 맹렬하게 공세하니, 장순은 허수아비에 검은 옷을 입히고 밧줄로 묶어 성 아래로 내려보냈습니다. 영호조의 병사들이 이를 장순의 군사들이라고 여겨 맹렬히 화살을 쏘자, 다시 이것들을 거두어 들여 십 수만 개의 화살을 손들이지 않고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장순이 화살을 빌린다(張巡借箭)'는 고사가 유래하는데, 어쩌면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이 화살을 빌리는 장면의 실제 역사적 기원이 여기 있는걸지도 모릅니다.) 이런 허수아비 전술을 계속하자 점차 영호조의 병사들이 이 꾀를 알아차려 화살을 쏘지 않았는데, 어느 날은 진짜 오백의 결사대를 내려보내 화살을 전혀 맞지 않고 본영으로 돌격시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옹구가 굳세게 버티며 겨울이 되자, 마침내 옹구 북면에 성이 세워져 성안으로 들어가는 보급선이 완전히 차단되었습니다. 결국 장순은 군을 요충지인 수양(睢陽)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 장순은 수양태수 허원과 함께 반군인 양조종의 군사에 맞서 전투를 치렀는데, 이 때 참수한 적의 수급이 일만여 급이었고 시체가 변수를 가득 메워 물길이 그로 인해 흐리지 못할 지경이었다 합니다.
조정은 여러 차례 공을 세운 장순을 하남절도부사로 임명했지만 따로 하사품을 내리지는 않아 장순군의 사정은 매우 곤궁해졌습니다. 그러나 장순은 군대를 이끌고 수양거(睢陽渠)의 요충지인 수양성에 들어가니, 곧 그곳을 지키다 죽기를 각오했습니다. 피골이 상접한 군사들로는 포위를 뚫기도 힘들고, 수양을 잃으면 곧 강회를 잃게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전쟁의 형세는 장순에게 더더욱 불리하게 작용했습니다. 수없이 많은 공방전이 이루어졌으나, 장순은 그때마다 격퇴했고, 수없이 많은 공방전에서 적들을 격퇴하자, 마침내 적들은 그저 포위를 굳건히 한 채 장순의 군대가 굶어 죽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옹구성의 재현이었으나, 이제는 달리 움직일 곳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우 일천여 명 남짓으로 줄어든 장순의 수비대는 매일 한 홉의 쌀에 나무껍질과 종이를 곁들여 먹기 시작했습니다.
성 안에 있는 참새와 까마귀들에게는 그물이 걸렸고, 쥐구멍이 파헤쳐졌으며, 가죽으로 된 갑옷은 삶아져 국에 들어갔습니다. 여기에서 '최악의 상황'을 이르는 나작굴서(羅雀掘鼠)라는 고사가 유래했습니다. 그러나 참새와 쥐는 그나마 사정이 나을 때의 이야기였습니다. 성 안의 모든 살아있는 생물들이 사그라들기 시작하자, 마침내 장순은 '사람을 먹여 사람을 살리라'는 명령을 내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장순이 사랑하는 애첩이 먼저 잡아먹혔습니다. 거부하는 병사들에게 장순은 그 고깃국을 강제로 먹였습니다. 신당서(新唐書)에는 당시의 절절한 상황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장순이 아끼던 첩을 끌어낸 뒤 말했습니다.
"그대들은 여러 해 동안 먹을 것이 부족했음에도 충의가 조금도 쇠하지 않았다. 내 살을 베어 여러 그대들에게 먹이지 못함을 한탄한다. 어찌 첩 하나를 아껴 군사들이 굶주리는 것을 보고만 있겠는가?"
그러고는 그녀를 죽여 큰 잔치를 벌이니, 앉아있는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장순은 억지로 그들에게 먹였고...
(巡出愛妾曰:『諸君經年乏食,而忠義不少衰,吾恨不割肌以啖眾,寧惜一妾而坐視士飢?』乃殺以大饗,坐者皆泣。巡強令食之...)
그 다음 차례는 장순의 밑에서 손발이 닳도록 일하던 노복들이었습니다. 장순의 휘하에서 함께 싸우던 장수들도 앞다투어 자신의 사랑하는 가족들을 병사들의 한 끼 식사로 바쳤습니다. 마지막은 늙고 병들어 싸우기 힘든 자들과 귀부인들, 그리고 어린아이들이었습니다.
(茶紙既盡,遂食馬;馬盡,羅雀掘鼠;雀鼠又盡,巡出愛妾,殺以食士,遠亦殺其奴;然後括城中婦人食之,繼以男子老弱。)
마침내 성이 함락됐을 때 원래 있던 6만의 호구(戶口)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단지 400여 인 남짓이었고, 포로가 된 장순은 반군 장수 윤자기(尹子奇)의 앞으로 끌려갔습니다. 윤자기가 장순에게 물었습니다.
"듣자하니, 그대는 매번 싸울 때마다 이를 악물어 부숴버린다고 하던데,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聞君每戰, 皆裂嚼齒皆碎, 何至此耶?)"
장순이 간신히 혀를 굴리며 소리쳤습니다.
"나는 역적을 기세로 잡아먹어버리려고 하였으나, 다만 힘이 미치지 못했을 뿐이다!
(吾欲氣吞逆賊, 但力不遂耳!)"
분노한 윤자기가 장순의 입에 칼을 집어넣고 벌리자 겨우 치아가 서너 개만 남아있음을 보게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화를 참지 못했던 윤자기도 계속해서 욕설을 하는 장순의 기세에 이내 크게 감탄하며 그를 살리고자 했으나 결국 굴복하지 않는 장순을 처형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장순의 충의와 식인 행위의 충격적인 대비는 당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훗날 안사의 난이 끝난 직후의 당 조정에서도 성 안의 사람들을 잡아먹은 행위의 잔혹함에 대한 비난이 제기되었습니다. 이 때, "말을 잡아먹다 모자라자 여인과 노약자를 포함한 2~3만여 인人을 잡아먹었다."는 구체적인 숫자도 제시됩니다.
이 지적의 골자는 성 안의 백성들을 잡아먹으면서까지 저항하는 것보다는, 어떻게든 살려서 빠져나오는 것이 더 도리에 맞지 않느냐 것이었습니다.
(與夫食人,寧若全人).
그러나 이 지적은 '강회를 지켜 천하를 보전하였다'는 표면적인 이유를 든 반박에 가로막혀 당대에 기각되었는데, 장순을 두둔하는 이 주장의 핵심 또한, 실상 강회를 지켜낸 장순의 전략적 공로를 추켜세우는 것보다는 반란이 일어난 당시 수많은 장수들이 칼 한번 휘두르지 못한 채 덜덜 떨며 항복하는 상황에서 비록 잔혹할지언정 '충심'을 다한 그의 마음가짐을 옹호하는 데 있었습니다.
남송의 충신 문천상(文天祥) 또한 정기가(正氣歌)에서 "우주의 정기가 장수양(張睢陽)의 치아가 되었다."며 칭송했고, 대의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행하는 식인 정도는 사소한 일에 불과하다는 기조가 명청시대에 이르기 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전근대 유교 사회의 엘리트들에게 있어, 충과 효는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절대적인 가치란 것은, 그것을 위해 그 어떤 극단적인 행동이라도 용납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병에 걸린 부모나 시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자신의 살점 일부를 잘라 바치는 의례적 식인 행위는 조선을 포함한 동아시아 일부 지역에서 미담으로 전해져 내려옵니다. 부모를 위해 자신의 살점을 바치고, 나라를 위해 가족의 살점을 바치는 것, 그것이 아름답게 여겨졌던 세상이 분명 과거에는 존재했던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