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여성 스파이 열전 (1)
실제로도 소련에는 여성 스파이가 있었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가장 영화같은 일생을 살았던 인물에 대해서 한 번 소개해보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오늘 소개할 책은 벤 매킨타이어의 '에이전트 소냐'.
스파이 논픽션 분야에서 엄청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인데 한국에는 최근에 '스파이와 배신자'라는 책이 번역돼서 출판됨. 이 책도 요즘 재밌게 읽는 중인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소개해보도록 하고, 그럼 지금부터 '소냐'의 삶을 바로 알아보자.
'소냐'의 유년기
오늘의 배경은 백년전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이고, 주인공은 우르술라 쿠친스키라는 열 여섯 살짜리 소녀임.
일단 우르술라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남. 아빠가 로베르트 쿠친스키라고, 아주 저명한 인구 통계학자였는데 사상적으로는 좌익 계열의 지식인이었음. 이쪽 방면에서 아주 마당발이어서 쿠친스키 집안에는 되게 유명한 사람들이 자주 놀러왔는데, 그 중 제일 유명한 사람이 이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집안이 되게 부유해서, 요리사, 정원사 하인, 그리고 유모까지 둘 정도였는데, 이 때 유모였던 '올로' 아줌마가 우르술라에게는 거의 친어머니 수준의 유대감을 갖고 있었음.
돈 접어서 연날리는 아이들
우르술라는 07년생인데, 열 여섯 살 때는 독일이 1920년대의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임. 이 때의 독일은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뒤에 경제가 개판이 나있었음. 초인플레이션 때문에 빵 한 덩어리를 사려면 리어카에 지폐를 벽돌처럼 잔뜩 넣어두고 가야했고, 빈부격차가 극심했던 시절이라, 집안의 사상적 영향과 이런 환경에 더불어서 우르술라는 이제 사상적으로 뭔가, 뭔가...
급진적인 성향을 띠게 됨.
(참고로 자기가 독일을 바꿀 운명을 가졌다고 믿었던 어느 1차 세계대전 퇴역병도 막 연설을 하러 돌아다니고 있던 때였음.)
열일곱 살 생일을 2 주 앞둔 시점에, 우르술라는 노동절 시위에 나가는데, 여기서 불법시위 진압하러 온 경찰한테 부딪혀서 땅바닥에 철푸덕 엎어지는 일이 벌어짐. 근데 경찰이 이 쓰러진 우르술라를 곤봉으로 세게 내리침. 우르술라는 이 때 크게 다치친 않았는데 이 때 겪었던 일이 자기 인생에서 굉장히 크게 작용했다, 고 나중에 회고함.
우르술라는 열 아홉 살 때 독일공산당(KPD)에 정식 입당을 하는데, 이 때 선배들한테 총기 분해, 손질, 사격 등을 배워서 말 그대로 군필 여고생이 됨. 우르술라는 사격에 소질을 보였고, '언젠가 찾아올 혁명'을 대비해 루거 권총을 받아서 다락방 들보 뒤에 감춰두게 됩니다.
이 무렵 베를린 우르술라는 공대의 건축학도인 루디 함부르크를 만나 사랑에 빠짐. 우르술라가 볼 때 루디는 다정하고 착한 남자여서 남편감으로 손색이 없었는데 딱 한 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이었음.
그 때문에 마음을 확실히 정하지는 못했는지, 21살 시절에 우르술라는 잠깐 미국으로 떠나서 미국 공산당에도 가입했고, '대지의 딸'이라는 소설을 쓴 작가인 아그네스 스메들리에게 깊은 인상을 받음. 결국 우르술라는 다시 독일로 돌아와서 결국 루디랑 결혼하는데, 마침 상하이 시의회에서 루디에게 건축 일자리를 제공함.
우르술라는 '상하이'라는 동네가 대체 어떤 곳인지 전혀 몰랐지만, 공산주의는 국제적인 거라고 굳게 믿으면서 루디를 따라나기로 결심함.
동방의 매춘부
당시 상하이는 '동방의 매춘부'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우르술라는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사지말단이 없이 고통스러워하는 불구자들이나 끔찍한 질병을 겪고있는 어린아이들이 너도나도 구걸하는 장면을 보게됨. 근데 프랑스 조계지에 도착하자마자 너무 극단적인 대조, 막 중국인 집사가 하얀 장갑 끼고 샴페인 따르고 있고, 막 파티도 하고... 그런걸 보고 우르술라는 이제 다시 또 한 번 사상적 각성을 함.
여기서 우르술라는 독일인 교포 커뮤니티에 어울리질 못했는데, 왜냐하면 이 당시 독일인들이 '미래의 인물'이라면서 어떤 한 참전용사 출신의 청년 정치인을 찬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음.
당시 상하이를 지배하고 있던 장제스의 국민당은 공산주의자 숙청을 하고 있었음. 수천명이 넘는 좌익 계열 인물들이 이 때 테러로 사망했고, 소련은 붉은 군대의 정보기관들을 상하이에 투입시키기 시작함.
이 때 우르술라는 임신 5개월차였고, 우연히 직장에서 아그네스 스메들리를 만나게 됨. (21살 때 미국에서 감명깊게 읽은 책의 저자) 자연스레 둘은 친구가 되었고, 우르술라는 자신의 개인적인 고민들과 정치적 소외감에 대해서 토로하게 되었음. 근데 아그네스 스메들리는 이미 코민테른에 포섭된 소련의 스파이였고, 즉시 본인도 우르슬라를 포섭하기 시작함.
며칠 후 스메들리는 우르슬라에게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방문할 테니 문을 열어주라며, 시간을 고지했음. 정말로 약속한 시간이 되자, 우르슬라의 집사는 '리하르트 존슨' 씨가 방문했다고 알려왔고, 우르슬라는 문 앞에 서있는 남자를 보고 깜짝 놀랐음.
리하르트 조르게
왜냐하면 그 삼십대 중반의 남자는 왼쪽 손가락이 세 개 없었고 다리를 절었는데, 진짜 개존잘이었기 때문. 우르슬라는 이 남자가 진짜 어마어마하게 위험해 보이지만 매력적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이 사람은 사실 소련의 전설적인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였음. 그는 붉은 군대의 정보 장교이자 상하이 주재 최고위급 스파이였으며, 또한 아그네스 스메들리의 스파이 파트너이자 연애 상대였음.
007 시리즈 원작 작가인 이언 플레밍이 '역사상 최고의 스파이'라고 불렀던 리하르트 조르게는 알콜 중독, 그리고 엄청난 매력과 여성 편력으로 유명했는데, 어느 정도로 유명했냐면, 90년대에 북한에서 남파간첩을 훈련시킬 때 '리하르트 조르게처럼 현지의 여성을 꼬시되 스파이 활동에 이용하는 쪽으로 하라.'고 콕 짚어 지시할 정도였음.
독일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1차 세계대전 참전 이후 열렬한 공산주의자가 되어 '제4부'라고도 불리는 소련의 정보 당국, 즉 'GRU'에 합류함. 당시 그는 '램지'라는 암호명으로 상하이에서 첩보망을 구축하라는 임무를 갖고 있었고, 임신 6개월차였던 우르술라에게 중국 동지들을 도울 준비가 되었는지를 물었음.
조르게는 이때 무슨 2차전직 하기 전에 물어보는 거마냥 마지막 경고로서, '지금 이 시점에서는 아무런 불이익 없이 거절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달리 말하면 이건 한 번 이걸 하겠다고 하면은 나중에는 발을 뺄 수 없다는 이야기나 다름없었음. 근데? 이런 얘기 들으면 또 안할 수가 없지.
우르슬라는 즉각 준비가 되었다고 말함. 몇 달 후 우르술라는 아들 '미샤'를 낳았음. 조르게는 아기침대를 들여다보고는 이렇게 판단했음.
"그 누가 이제 막 갓난아기를 둔 초보 애엄마를 스파이라고 의심할까?"
그러던 어느 여름날, 조르게는 우르술라에게 오토바이를 타러가자고 꼬시는데(?), 검은색 준다프 오토바이를 몰고 폭주를 뛰자 우르술라는 엄청난 스릴을 느끼며 더 빨리 달리라고 재촉함. 우르술라는 폭주 이후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됨. 이 날 이후 우르술라와 조르게는 자연스레 연인이 됐음. (흔들다리 효과)
우르슬라는 이 날 이후로 조르게 첩보망의 핵심일원이 되었고, '소냐'라는 암호명을 받았습니다. 이 이름은 잠복 요원을 뜻하는 '쥐(dormouse)'와 '매춘부'를 동시에 뜻했음.
그런데 1931년 6월, 상하이의 소련 첩보망이 발각되는 사건이 벌어졌고, 조르게는 목숨이 위험한 중국인 '동지' 하나를 아파트에 숨겨달라는 임무를 맡김.
지금까지는 남편 몰래 스파이 활동을 하고 있었지만, 더이상은 숨길 수가 없었음. 남편 '루디'는 아내가 스파이 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털어놓자 격분했지만, 우르술라의 완고한 설득에 결국 굴복하고 마지못해 공모자가 되는 길을 선택하게 됨.
그러던 어느 날, 조르게의 연인이었던 아그네스 스메들리는 우르술라가 조르게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큰 충격과 함께 질투심에 휩싸임. 아그네스 스메들리는 결국 우르술라에게 "너는 혁명가가 될 자격이 없다."는 장문의 결별 편지를 써붙이고 홀연히 떠나버림...
1932년 12월, 우르술라가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있을 때 리하르트 조르게에게 전화가 한 통 걸려왔음. 리하르트 조르게는 짧은 작별 인사 뒤 우르술라의 행운을 빌고는 전화를 바로 끊었음. 우르술라는 자리에 주저앉았고, 그 때 이후로 다시는 리하르트 조르게를 보지 못했다고 함.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