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시대의 '기사도'를 한마디로 정의하는 건 벽에 젤리를 못박는 것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기사도는 시대나 상황에 따라 그 의미가 계속 변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가 흔히 아는 '낭만적이고 멋진 기사'의 이미지는 사실 이미 기사들이 사라진지 한참 뒤인 19세기의 필터가 씌워진 결과물입니다.
실제 기사들이 활약했던 서유럽의 중세로 눈을 돌려도, 이미 당대에서부터 기사도를 보는 관점은 크게 세가지 입장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이것들을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먼저, 중앙의 고귀한 귀족들이 읊은 '궁정 로망스'적 맥락에서의 기사도가 있습니다.
이러한 로망스에서 기사도는 용맹하고 충성스러우며 관용적이고 예의범절을 지키는 고결한 용사들을 이르는 표현입니다. 즉, 회사로 치자면 본사 임원이나 인사팀 입장에서의 '기사도'입니다.
2. 두번째는 기독교 교회 입장에서의 기사도입니다.
이 교회 기사도는 약자를 지키고 교회와 성지를 수호할 것을 촉구하는데, 회사로치면 감사팀 입장에서의 '기사도'입니다.
3. 마지막으로는 군사 귀족들 본인, 즉 당대에 '기사'로 불리며 전장을 휘저었던 그들 본인들이 직접 저술한 일단의 논고들과 무훈시에서 파악되는 기사도가 있습니다.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고 기도하는 자들에 대한 경멸을 공공연히 내비치던 이들은 말하자면 현장직인데, 이번 영상에서는 실제 필드에서 뛰던 이들의 목소리를 중점적으로 다룰 것입니다.
"농부는 '파밍' 대상."
"이제 이야기는 트리스탄이 기사가 되자마자 그의 아버지를 위해 매우 고귀하게 복수했다고 전한다. 그는 왕이 서거하던 현장에 있던 여덟 기사를 모두 죽였음에도 여전히 복수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는 이 기사들이 거하던 도시 브레시아로 말을 몰았고, 그 곳의 모든 남자와 여자를 죽였으며, 그 도시와 그 성벽의 기초마저 파괴했다. 이 모든 것은 트리스탄이 그의 아버지 멜리아두스 왕을 위해 복수하기 위한 일환으로서 행해졌으며, 트리스탄이 그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행한 것보다 더 큰 복수는 이제껏 그 어떤 기사에 의해서도 행해진 적이 없었다."
-15세기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역의 로망스, 트리스탄과 원탁(La Tavola Ritonda)
판타지 문학에서는 기사가 용이나 마녀를 잡지만, 실제 중세의 기사는 힘없는 농부나 수도사, 그리고 상인과 부녀자들에게 칼을 휘둘렀습니다. 기사들에게 이들은 보호의 대상이 아닌, 그저 파밍 대상인 NPC와 같은 존재, 마치 사람같이는 생겼지만 실은 인간 언저리인 것들쯤으로 여겨졌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땅에 매인 비천한 존재들'이고, 기사들은 '전쟁이라는 위대한 사업을 수행하는 자들'이라고, 기사들 스스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쌔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계12:7-9
현대인들에게 전쟁이란 평화를 깨는 비상사태 내지는 재난입니다. 그러나 중세인의 세계관에서 전쟁은 마치 '날씨'와 같이 늘 존재하는 일상이었습니다. 중세 세계관 가이드북인 성경에 따르면, 이 세상의 첫 전쟁은 하늘에서 일어났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곧 이루어지듯", 하늘나라 천사들의 전쟁은 땅에서 기사들의 성스러운 전쟁으로 재현되었습니다.
중세인들은 지상에서의 전쟁이 하늘에서 첫 전쟁을 치르신 신께서 인류에게도 기꺼이 그 영광을 나누어주신 증거라고 여겼고, 기사들은 그런 성스러운 전쟁(영구 폭력 상태)에서 신이 직접 발급한 일종의 폭력 면허증을 독점하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요컨대 기사들의 폭력은 죄악이 아니라 신께서 그들에게 부여한 신성한 직분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졌던 겁니다.
그리고 이 '폭력'은 몇몇 규범적 기사도가 주장하듯이 추상적인 도덕적 용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기보다는 피와 근육으로 상징되는 물리적이고 현실적인 차원에서 비롯되는 것이었습니다. 기사는 윤리의 보호자가 아니었습니다. 대신 오히려 그 어떤 윤리나 도덕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지배자이자 복수자로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를 신에 의해 그러한 권리를 독점적으로 보장받은 영광스러운 '귀족'이라 여겼습니다.
기사들은 또한 오직 전장에서의 승리만으로도 위대하신 주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증명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 관계는 성직자라는 중개자를 거칠 필요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기사들은 성직자들의 금식이나(전쟁 도중엔 흔한 일이었다) 밤새 기도를 하는 것(밤을 새는 것 또한 전장에선 흔한 일이었다) 따위보다 전장에 나가 목숨을 걸고 적들을 물리치기 위해 분투하는 것이 신 당사자와 원만히 해결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민간인 약탈은 실무진 오해"...?
낭만주의자들은 "기사들은 신사적으로 싸우려고 했는데, 밑의 하급 병사들이 통제가 안돼서 잔혹한 약탈이 벌어졌다"고 실드를 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끝도 없이 되풀이된 추악한 전쟁사에서 유일하게 중세만이 예외고, 오로지 중세의 기사들만이 시대와 문화를 초월한 보편 윤리 강령에 봉사하며, 이익보다는 명예를 추구하는 한 편 농민과 여성들의 권리까지 수호하려 했단겁니다.
이런 주장은 "간부들은 잘해보려고했는데 밑의 실무진 쪽에서 문제가 좀 있었던 거 같습니다" 류의 꼬리자르기나 다름없습니다. 기사들은 '영지의 수호자'가 아니었습니다. 만일 자신의 영지가 적에게 넘어갔거나 또 넘어갈 것이 거의 확실한 상황이라면, 아무런 거리낌없이 불태우고 노략질했습니다. 이게 교과서에서 배우는 청야전술입니다. 그리고 농노 수천의 삶이 위협당하는 끔찍한 전쟁들은 때때로 영주 개인의 위신에 해를 끼치는 아주 사소한 이유, 이를테면 사과 한 바구니를 훔치는 일만으로도 벌어질 수 있었습니다. 세상 어느 보호자가 그런 어리석은 이유로 자신의 의무를 저버릴까요?
낭만주의자들은 일부 중세 연대기 작가들이 '기사들의 비전투원 약탈'을 비판한 기록을 들어 실상 기사도가 '약자를 보호하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 맥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많은 연대기가 '우리팀'의 약탈에 대해서는 뭉뚱그리거나 오히려 칭송하는 경우를 훨씬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편파 중계인데, 중세시대에는 ABS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약탈을 통해 얻은 수익은 곧 명예와 직결됐습니다. 기사들은 영지의 수호자로서 농민들을 지키는 하찮은 일 따위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은, 기꺼이 '파괴자'라고 불리는 공작원들, 즉 공격자로서 적들의 영지에 불을 지르고 약탈하는 '우리편 파괴자들'을 지키는 데에 시간을 쏟았습니다. 그리고 영지를 수호한다느니 하는 따분한 것보다는 그것이 훨씬 명예로운 일로 여겨졌습니다.
*예컨대 장 프루아사르의 연대기에서 리모주 학살을 비난하는 구절을 보면, 어째서 '반역의 죄'를 저지르지 않은 '무기를 들 수 없는 빈곤한 자들' 또한 똑같이 값을 치러야했는지를 개탄하는데, 여기서 비난의 초점은 '기사도를 지키지 않음'이 아니라, 그리고 '학살을 자행한 것' 자체가 아니라, 저들 '영국인들'의 '무분별함'에 있었던 것이다.
*의미심장하게도 프루아사르는 약탈당한 도시의 주민들을 '순교자'로 묘사한다. 중세 전쟁 곳곳에는 이런 순교자들이 심심찮게 발견되며, 오늘날의 많은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리모주에서 있었던 학살은 유달리 잔혹하지 않았다. (프루아사르는 남녀노소 삼천명 가량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하지만 수치는 열 배 정도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민간인 삼백명이 학살당한 것을 두고 가벼운 일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중세 전장에서 이러한 일들은 흔하게 벌어졌다.)
*사실, 중세 연대기 작가들은 상대편이 저지르는 이런 무분별한 약탈에 대한 비판보다는 우리편(때로는 상대편!)이 저지르는 영광스러운 '약탈 찬양'을 훨씬 더 많이했다. 그리고 이러한 약탈을 주도한 기사들을 자랑스러운 연대기의 한 페이지에 당당히 위치시킨다. 예컨대 장 프루아사르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던 장 르 벨(Jean Le Bel)은 그의 '진정한 연대기(Vrayes Chroniques)'에서 더비 백작을 비롯한 영국군이 프랑스 시골을 휩쓸며 자행했던 끔찍한 약탈과 학살상을 두고 "이보다 더 크거나 훌륭한 군사작전은 결코 들어본 적이 없다."며 그로 얻은 재산상의 이익을 찬양한다. 제프리 르 베이커의 연대기에서도 도시를 불태우는 불과 적들을 도망치게 하는 칼, 그리고 밭을 짓밟는 말발굽은 승리의 명예와 병치된다.
전장의 기사도
14세기초, 마요르카 왕국 출신의 신학자(기사들이 책상물림이라고 조롱하던 부류) 라몬 류이(Ramon Llull)는 기사의 '수호자성'을 강조하며, "비전투원을 약탈하고, 농작물을 훔치고, 가축들을 죽이는 것이 기사들이 하는 직무라면, 기사도는 곧 그 반대를 향해야할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현장에선 이런 얘기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돌멩이를 들 수 있는 성인 남자라면 누구나 징집돼서 싸울 수 있는 마당에, 대체 누가 비전투원인지 어떻게 구별할까요? 심지어 성직자들도 기꺼이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이런 도덕적 딜레마에 부닥친 기사들은 농민도 성직자도 모두 죽이고 약탈하는 쪽으로 해결을 봤습니다. 백년전쟁 도중 자행된 끔찍한 초토화 전술은 정규군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현장 지휘관 역할을 했던 기사들은 누가 비전투원인지를 가릴 역량도 의지도 없었습니다. 교회를 약탈하고 파괴하는 것은 특히 중세 전쟁의 전형적인 특징 중 하나였습니다. 물론 정규군의 군율에 따른다면, 명목상으로는 (비전투원 언급은 없지만) 교회와 성직자를 보호하라는 구절을 지켜야 했을 것입니다. 그치만 이건 아무도 안읽는 이용약관이나 다름없었고, 최고지휘관들 또한 지키지 않았습니다.
수도원의 과수원과 수확물 저장고는 불탔고, 포도나무들은 뿌리채 뽑혔으며, 아직 수확되지 못한 작물들은 말발굽에 짓밟혔습니다. 그치만 이게 그렇게 불경한 짓은 아니었습니다. 왜냐면 애초에 전쟁이란 신의 뜻에 의해서 허용된 지상에서의 속죄이니, 학살당한 자들은 지상에서 지은 죄를 그덕에 얼마간 씻어낸 뒤 돌아갔을 겁니다. 적어도, 중세의 기사들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만일 현대인인 우리가 타임머신을 타고 가 중세 기사들에게 "농민들을 학살하고 약탈하는 것이 기사도적으로 옳은 것이냐" 따져묻는다면, 상대는 황당해할 것입니다. 이건 마치 미래인이 우리에게 "왜 매연을 뿜어내면서까지 출근을 하는거냐"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에게 교통수단을 이용해서 출근을 하는 게 일상이듯, 기사가 비전투원을 학살하는 건 그저 업무상의 일과에 다름아니었습니다.
기사들은 농민들을 같은 인간종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 당시에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은 '사회적 지위'였고, 귀한 신분의 귀부인들과 처녀들은 절대로 성적으로 침탈당해서는 안되었으나(물론 전쟁 중에는 이들도 심심찮게 고귀한 신분의 기사들에게 범해졌다는 증거들이 차고 넘치지만) 농민 출신의 천한 소녀들은 아무렇지 않게 폭력으로 범해지곤 했습니다. 12세기 후반에 쓰인 안드레아스 카펠라누스의 사랑의 기술(De amore)은 (비록 풍자적인 성격이 강하지만) 이러한 일면을 단적으로 드러냅니다.
"그들은 말이나 노새처럼 자연의 충동이 끄는 대로 자연스럽게 비너스의 일(성적인 일)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농민에게는 끊임없는 노동과 농기구가 주는 쉼없는 위안으로 충분하다... 만약 그대가 농민 여성에게 사랑으로 끌리게 된다면 그들을 칭찬으로 치켜세우라. 그리고 적절한 기회를 찾는 즉시 폭력적으로 끌어안아 그대가 원하는 것을 취하라.(Si vero et illarum te feminarum amor forte attraxerit, eas pluribus laudibus efferre memento, et, si locum inveneris opportunum, non differas assumere quod petebas et violento potiri amplexu.) 강제적인 치유책을 선행하지 않는 한, 그들의 완고한 수줍음을 누그러뜨리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 Capitulum XI: De amore rusticorum
결론
물론 궁정 시인들이 노래한 낭만이나 교회가 외친 평화의 메시지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첫번째 화살이 발사된 순간부터 실제 현장을 지배한 것은 오로지 '군사적 효율성'이었습니다. 기사들이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낭만적 이야기 대신 고아와 과부, 그리고 불타버린 폐허만 남았습니다. 언제나 가장 잔혹한 기사들이 가장 큰 부와 명예를 챙겼습니다.
기사는 스스로의 행동에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곧 걸어다니는 법원이자 신의 심판관으로 여겼기에, 학살을 저지르고도 죄책감은 커녕 도덕적 우월감마저 느꼈습니다. 그들은 자율적이었고, 판단하는 자들이었으며, 신의 뜻을 대리하여 그들의 앞길을 막는 자들이라면 그 누구에게나 사형 판결을 선고할 수 있었습니다.
기사의 잔혹한 마음가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가 하나 있습니다. 포로의 사지를 자르는 취미가 있어 '도살자'라 불린 올리비에 드 클리송(Olivier V de Clisson)의 좌우명은 아주 간단명료했습니다. "재미있으니까! (Parce qu'il me plest!)" 그의 잔학행위에 동료였던 뒤 게클랭조차 혀를 내둘렀지만, 재미있게도 그 또한 일전에 교황을 협박하고 무고한 비전투원들을 학살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참고문헌:
Keen, Maurice. Chivalry. Yale University Press, 1984.
Kaeuper, Richard W. Medieval Chival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