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 시절 ‘결혼의 여신’이라는 드라마를 보며 픽션인걸 알면서도
12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 결혼 잘했구나! 묘하게 안심하며 기억하고 있는 대사가 있다.
"결혼은 어떤 남자랑 하는 게 좋아?" 주인공의 물음에
"가을운동회 같은 남자,
건강하고 건전하며 명랑하고 씩씩하고 예민하지 않은...
네 형부가 그래"라고 주인공 언니가 대답한다.
살아보니 내게 남편은 가을운동회 같은 사람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말이 없는 편인 나는 누구보다 편한 남편에게 가장 많은 말을 한다.
수다스럽지 않은 내가 좋다고 하면서도 그는 내심 내가 조금 더 이야기 해주길 바라고
나는 아주 많이 그렇다. (그의 모든 것이 아직도 궁금하고 충분히 더 듣고 싶다.)
함께 걸으며 내가 쫑알거릴 땐 보통 조용히 들어준다.
속상했던 이야기를 어쩌다 살짝 꺼내 놓으면
나보다 더 흥분해서 펄쩍 뛰며 드물지만 내 맘을 대신해서 화를 내기도 하는데
(알고 보니 이 사람 ‘모’ 아니면 ‘도’ 스타일인가?)
그럴 땐 내가 뭘 잘못 말했나 싶어 ‘어이구야’ 후회할 때도 있다.
요즘 '눈물의 여왕'에서 김지원보다 더 아파하며 매일 우는 김수현을 보며
과하게 공감하는 스타일인 나는 멋지다! 느끼지 않을 수 없고
아주 가끔은 나 몰래 일찍 일어나 날 위해 새벽에 뜨겁게 기도하는 남편이길 바라며
그의 한결같은 발랄함과 해맑음에 서운한 적도 있었지만
난 내 감정에 크게 영향 받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남편을 좋아하고
그가 그런 모습이길 바란다.
(쓰고 보니 어느 장단에 춤추라는 것인지… 그의 진심을 이미 아는데도
조금은 티나게 또 진지하게 표현해주기 바라는 나란 사람ㅠㅠ)
정말로 힘이 들 땐 혼자 끙끙거린다.
“왜 그러니?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남편이 다정히 묻고
나는 아무 말없이 숲 속의 아름드리 나무 끌어안 듯
남편의 등을 껴안고 한참을 가만히 있으면 한결 나아진다.
(그는 자연을 닮은 사람이었어.)
평소 과묵하지만 심각하게 느껴지던 일도 별일 아닌 것처럼
가벼워지게 내 긴장을 풀어주고 유머와 재치로 결국 나를 깔깔거리게 만들고
애어른처럼 자란 나를 유치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천진난만한 사람
수영을 못하는 내가 너무 깊이 가라앉거나 멀리 떠내려가지 않도록
수면 위로 계속 끌어올려주는 내겐 구명조끼나 산소통 같은 존재이다.
말하지 않아도 그 무게가 너무나 잘 보이는데 자신은 항상 괜찮다고 하며
나의 비통함 속에 들어가 함께 보이지 않는 작은 소망에 머물며
묵묵히 자신만의 방식으로 오늘도 나를 나로 살게 지켜주는 그를
가끔은 나도 기쁘게 업어 사랑으로 한껏 밀어 올려주고 싶다.
내게 마음껏 기대보라고 하기엔 아직 연약하고
혹 내가 당신보다 더 아파하며 고통스러워할지 모르나(더 굳세질 수도 있고)
내게 기댄 당신을 안고 확실히 받아주시고 붙잡아주시는
안전한 주님의 품인 더 깊은 바다로 함께 들어가게 될지라도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로 무사히 인도해줄거라 믿기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