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로 시작한 우정
2016년, 영화 <노팅힐>의 부푼 꿈을 안고 런던에 도착했다.
줄리아 로버츠와 휴 그랜트의 운명적인 첫 만남에 대한 동경은 ‘꼭 노팅힐 게이트 근처에서 살겠다’는 노팅힐 판타지로 이어졌지만, 노팅힐 근처 하우스 렌트비를 검색해 본 후 나는 조용히 그 꿈을 접게 되었다.
대신 난 좋은 기회로 노팅힐 인근,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노팅힐에서 tube(영국의 지하철)로 한 정거장 정도 떨어진 카페에서 일할 수 있게 된다.
런던을 ‘Melting pot of cultures (문화의 용광로)’ 라고 부르던가, 나는 이 카페에서 근무하며 비로소 내가 문화의 용광로 속에 걸어들어왔음을 매일같이 체감하였다.
아주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과 함께 일을 했다. 영국, 이탈리아, 스위스, 포르투갈 등 유럽국가는 물론 대만, 방글라데시, 브라질 등 다양한 국가와 인종의 팀원들과 함께 일하였는데, 비영국 국적의 인원수가 영국 국적의 팀원 수보다 5배는 많았던 것 같다.
우리는 그렇게 런던 시내 한복판에서 하나의 미니 지구촌 마을을 형성하며 매일같이 조금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T는 내가 처음 사귄 방글라데시 친구였다.
나는 그 친구의 찡그린 얼굴을 본 기억이 없다. 항상 웃는 얼굴이 기본 장착된 그 친구를 볼 때면 초등학교 사회시간에 방글라데시가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라고 배웠던가,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비록 T가 본투비 워커홀릭인 코리안의 눈에 아주 조금은 게으른 친구로 비추어지긴 했어도, 항상 밝고 친절한 T에 대한 인간적 호감으로 인해 큰 불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애초에 근무시간이 자주 겹치지 않은 것도 한 몫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T와 점차 비슷한 시간대에 일하게 되면서 나는 한 가지 특이점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바로 그가 특정시간대마다 자리를 비운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화장실에 갔나보다, 그 다음에는 지하창고에 설탕을 가지러 갔나보다, 하고 생각했지만, 그렇게나 자주 자리를 비울 일인가, 설탕이 그렇게나 자주 떨어진다고? 하는 생각이 자연스레 고개를 들었다.
손님이 몰려드는 점심시간대에 그가 사라지고 나면, 나는 조금 화가 나기도 했다.
'아니, 하루 이틀도 아니고 어떻게 저렇게 매번 같은 시간에 자리를 비울 수가 있지? 좀더 책임감을 보일 순 없을까?'
이러한 생각들은 내 마음 속에서 점점 부피를 키워 T에 대한 원망과 야속함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조금씩 T에 대한 미움으로 변해가려 할 때, 나는 내 마음의 목소리에 스탑을 외쳐야 했다.
'그래, 그 친구에게도 무슨 사정이 있을 수 있을 거야, 기회를 봐서 한 번 이야기를 해 보아야지. 그는 좋은 친구잖아. '
어느 봄날, T는 여느 때와 같이 자리를 비웠고, 그 날은 정말 공교롭게도 설탕 재고가 딱 떨어진 날이었다.
‘지금이다!' 하는 생각이 든 나는 지하 설탕창고로 내려갔고, 그 곳에서 정말 뜻밖의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T가 한 방향을 향해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차’하는 생각과 함께 나는 중학교 사회시간에 배운 내용을 떠올려야 했다. 방글라데시의 국교가 이슬람교라는 사실을...
이런, 모든 것이 나의 무지로부터 시작된 오해였다는 사실을 부끄러움으로 고백한다.
사실 이슬람 국가 사람과 친구가 된 것이 그 때가 처음이었다. 이것은 다시 말해, 무슬림과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일이 내 일생에 처음 있는 일임을 의미했다.
서로 다른 국가, 문화적 배경을 가진 친구의 ㅡ내 기준으로서의ㅡ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마주했을 때,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 좀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었음에도 나는 그것을 놓치고 만 것이다.
T의 기도에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설탕꾸러미를 가지고 돌아온 나는 미안함과 부끄러움으로 한참을 서 있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서는 컴퓨터를 켜고 무슬림의 의례와 지켜야 할 의식들에 대해 검색해 보기 시작했다.
무슬림들은 매일 이슬람의 성지가 있는 메카를 향해 기도를 하는데, 일일 5번의 기도는 이슬람교에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율이었다. 기도시간은 새벽 5시, 오후 1시, 3시, 6시, 7시 하루 5번 진행된다고 했다.
이러한 이유로 T는 매일 비슷한 시간에 창고로 내려가 몇 분간을 보냈던 것이다. 이런 줄도 모르고 근무 중에 게으름을 피웠다고 생각하다니.
나의 무지에서 온 오해가 부끄럽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다음날 저녁, 먼저 퇴근한 나는 카페 마감을 하고 있는 T에게 가 저녁을 같이 먹자고 제안했다. 그 날은 T의 마감 시프트가 늦게 끝나는 날이었기에, 나는 백오피스에 앉아 책을 읽으며 그를 기다렸다.
T는 저녁 10시쯤이 되어서야 퇴근을 할 수 있었고, 우리는 그가 카페 주변에서 가장 좋아하는 케밥집에 들렀다.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케밥이 특별히 맛있게 느껴졌던 저녁이었다.
친구의 종교인 이슬람교에 대해 찾아보던 나는 2016년의 라마단 기간이 6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라마단 기간이 되자 T는 해가 떠 있는 시간동안 금식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때부터 나의 케밥 배달이 시작되었다. 근무가 일찍 끝나거나 휴무인 날 카페 앞을 지나갈 때마다 끼니를 챙겨먹지 못하는 T를 위해 케밥을 챙겨갔던 것이다. 가끔은 함께 퇴근한 후 케밥을 먹기도 했다.
7월초, 라마단 기간이 종료되었고, T와 나는 동료들과 함께 런던 동부 White chapel 인근의 한 유명 중동음식점을 찾았다. 그는 라마단이 끝난 후 3일을 축제기간으로 지내며 가족, 친구들과 맛있는 음식과 선물을 주고받는다고 했다.
T는 메뉴판을 보더니 ‘케밥’을 시켰다. 그동안 내가 알던 케밥과는 사뭇 다른 모양새였다.
쉬쉬라고 하는 꼬챙이 모양의 케밥, 요거트처럼 보이는 흰색 소스와 샐러드 위에 올려진 케밥 등 각양각색의 음식이 나왔다.
'캐시, 너가 그동안 나랑 먹던 케밥과는 좀 다르지? 라마단 기간이 끝나면 꼭 제대로 된 케밥을 대접해 주고 싶었어. 넌 내 공식 케밥 파트너잖아. '
T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알고보니 그동안 랩 형식으로 먹었던, 그러니까 내가 알고 있던 케밥은 빙산의 일각의 불과한 것이었다. 얇게 썬 양고기, 쇠고기, 닭고기를 꼬치에 꿰어 구워낸 요리를 전부 케밥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T 덕분에 나는 또 하나의 오해를 깨부수게 되었다.
모든 것이 낯설었던 2016년은 우물 안에 살던 나를 세상 바깥으로 꺼내준 소중한 해였던 사실은 틀림없다.
나는 앞으로도 아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나이, 종교, 인종, 국적, 문화적 배경, 더 나아가서는 가정환경이나 소득수준, 신체적 여건, 성적지향과 음식에 대한 지향점까지.
나와 조금 다르다고 해서, 혹은 내가 알고있던 것과 조금 다르다고 해서 섣불리 오해를 하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아마 나도 사람인지라 앞으로도 몇몇 오해의 순간들이 있을 테고 내가 오해를 사는 순간들도 존재하겠지만, 설사 오해의 순간들이 생긴다 하더라도 그것들을 현명하게 풀어나가는 사람이 되고싶다고 생각해 본다.
오해로 시작한 T와의 인연으로 나의 편협한 사고를 깨고 서로에게 오래도록 기억될 친구가 되었던 것처럼.
그리고 마침내 영예로운 ‘공식 케밥 파트너’ 호칭을 얻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