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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시담 Dec 07. 2022

숨기고 싶었던 마음들

위로하지 못한 위로


“너마저 가버리면 내가 런던에 남아있을 마지막 이유가 사라져 버리잖아….”

누구에게나 머릿속을 하얗게 만드는 장면이 있다.     

 

 

런던에서의 삶은 꿈결 같았다.

오로지 그녀만의 의지와 뜻이 이끄는 대로 세상 곳곳을 탐험할 수 있었고, 즉흥적이고 산발적인 선택을 통해 직접 삶의 모든 귀퉁이들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만족감의 이면에는 그 무엇과도 연결되어 있지 않는 듯한, 제 삶이 지표면으로부터 둥둥 떠있는 듯한 분리감이 뒤따랐다.

그녀를 종속하는 것은 그 무엇도 없었지만, 그것은 그녀가 이 도시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녀는 점차로 근원을 알 수 없는 고독감에 깊이 침잠됨을 느꼈다.

 

마침내 그녀는 런던을 떠나 자신이 본래 속해있던 현실로 돌아가야겠다고 다짐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다짐을 그 누구에게도 선포할 수는 없었다.

작별을 말해버리는 순간 정말로 이 꿈에서 깨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이 그녀를 엄습해 왔으며, 자신에게 허락된 이 꿈의 마지막 페이지를 이별의 슬픔으로 채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런던에서의 마지막 날이 언제나와 같은 일상의 평온처럼 지나가기를 희망했다. 마치 휴가를 맞이하여 잠시 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모두에게 그렇게 기억되고 싶었다. 자신 곁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이 그녀를 영영 떠나가버릴,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람으로 생각할 그 어떤 가능성도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속 깊은 우정을 나눈 영국인 친구가 있었다.

영국 북부 요크셔(Yorkshire)의 짙푸른 황야와 숲을 친구삼아 자란 그 친구는 더 넓은 세상을 만나기 위해 고향 땅을 뒤로 하고 런던에 왔다고 했다. 그는 늘 장난기가 넘치고 시답잖은 농담과 언어유희를 즐겼지만, 아주 조금만 알고 지내도 쾌활하고 유머러스한 겉모습 아래 숨겨진 진지하고 단단한 면모를 느낄 수 있었다.

 

둘은 관심사는 물론 개그코드, 취향까지 비슷했다.

그녀는 이제껏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아즈텍, 마야문명의 발자취를 탐험하기 위해 남미에 가고싶다'는 말에 동감하는 친구를 한 명도 만나볼 수 없었지만, 그는 한 술 더떠 아즈텍 문명의 설화를 술술 읊는 알아주는 ‘문명 덕후’였다.

런던에 지내는 동안 대영박물관에 더 자주 가기 위해 어학당을 홀본(Holborn)역 근처로 잡았던 그녀에게 그는 자신의 대영박물관 멤버십 카드를 선뜻 건네곤 했다.

그 둘은 하루에 한 봉지씩 초콜릿을 먹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았기 때문에 서로의 일일 당 섭취량을 챙겨주기도 했고, 못말리는 블랙티 중독자들이었기 때문에 우유를 먼저 넣을지 차를 먼저 넣을지, 어떤 회사의 차잎이 맛있는지를 논하는 즐거움을 공유했다ㅡ하지만 얼그레이와 잉글리시 브랙퍼스트티 사이의 우월성에 대해서는 좀처럼 타협점을 찾을 수 없음을 아쉬워했다ㅡ

 

서로를 알게 된 곳은 일터였지만, 그 둘은 동료라기보다는 친구와도 같았다.

특히 먼나라 한국에서 온 그녀에게, 그는 낯선 땅 영국과 자신을 연결해주는 유일한 접점이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12월의 마지막 날이 다가왔다.

그에게서 송년 식사자리에 초대받은 그녀는 더 이상 작별통보를 미룰 수ㅡ감출 수ㅡ 없겠다고 생각했다.

부엌에서 분주히 요리를 하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그녀는 나지막이 몇 달 뒤에 있을 안녕을 예고하였다.

“저기 사실, 나 두 달 뒤면 한국에 돌아가. 다음주까지만 출근할 것 같아. 아직 아무한테도 얘기 안했는데, 너에게는 먼저 말해야 할 것 같아서…”

그는 놀란 듯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토마토를 볶는 달큰한 소리가 정적을 메웠다.

 

아버지가 고향 동네의 요리사였다고 말한 그의 볼로네이즈는 꽤 근사했다. 그 날의 저녁식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범했고, 그녀는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바탕 즐거운 대화를 마치고 현관문을 나서려는데, 늘 쉽게 풀려버리는 운동화 끈이 또 말썽이었다. 대수롭지 않아하며 신발끈을 묶는 그녀의 등 뒤에 그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너도 참 한결같다. 신발끈 좀 잘 묶고 다니라니깐.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같은 데에 끼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묶어도 자꾸만 다시 풀려버리는걸. 한국에 돌아가면 신발부터 다시 사야겠어. ”

“그러고 보니 너 신발끈 풀리는 거 보는 게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 이리 와 봐, 이번엔 꼭 내가 묶어주고 싶어서 그래. ”

그녀에게 다가가 자세를 고쳐 앉고 신발끈을 묶던 그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기… 안 가면 안 돼?”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다.

 

“사실 런던은 내게 늘 힘든 곳이었어. 모두가 떠났어, 가족도 친구도 모두. 이 곳엔 아무도 남지 않았어. 너만이 나와 이 도시를 연결해주는 유일한 연결점이었어. 그런데 너마저 가버리면 내가 여기 남아있을 마지막 이유가 사라지잖아….”

한 자 한 자 조심스럽게 꺼내는 그의 목소리에 약간의 울먹임이 번졌다.

 

“캐시, 안 가면 안 될까?”

정적을 깬 그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댕ㅡ 하고 그녀의 마음을 울렸다.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얘졌고,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너도 많이 힘들었구나, 나도 많이 힘들었는데. 사실 나도 가기 싫어, 하지만 돌아가고 싶어. ’

머릿속에 엉켜붙는 무수한 말들이 있었지만, 그가 숨겨온 묵직한 슬픔 앞에 그 어떤 것도 가벼이 뱉을 수 없었다.

 

늘 누구보다 밝고 단단하다고 생각했던 그였다.

그녀가 외로움과 향수에 이리저리 뒤척일 때도, 그는 영국인이기 때문에 이 같은 감정을 이해할 수 없으리라 지레짐작했었고, 그저 혼자 잘 이겨내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짐작은 오만이었고, 그 또한 이 곳에서 홀로 외로웠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를 몰아붙이는 외로움과 공허함으로부터 그를 붙잡고 지지하여 줬던 것이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매일같이 나누던 대화 속 그들은 서로를 위해 항상 무언가 중요한 것들을 외면하고 있었고, 숨기기에 바빴으며, 서로가 간직한 같은 얼굴의 슬픔을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어느 얄궂은 바람이 불어와 그 상자를 두드리기 시작했을 때, 그들이 나누지 못했던 수많은 이야기가 흘러나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서로가 서로의 마음 속 빚지고 있던 한 켠의 공간을 보게 되었을 때, 이제는 너무 늦어 말할 수 없는 진실을, 위로받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위로의 뒷모습을 마주하게 되었다.

 

먼 훗날 돌이켜 보았을 때,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를 위로할 수 없었던, 그 장면의 공백만이 떠올랐다.

그녀는 무거운 마음으로 그의 집을 나섰고,

거리에는 다가오는 새해를 준비하는 분주하고 들뜬, 행복한 얼굴들이 가득했다.


한 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불꽃놀이가 하늘을 빼곡히 수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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