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시담 Nov 30. 2022

시간에 지지 않는 것들

빨간 목도리


계절은 돌고 돌아 다시금 코끝 찡한 겨울이 왔다.

나는 겨울을 좋아한다.

겨울을 좋아하는 일은 특별한 노력을 요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불빛으로 온 세상을 물들이는 크리스마스, 김장김치가 익어갈 때쯤 삼삼오오 만두를 빚곤 했던 어린 날의 향수, 봉지 가득 담긴 행복이 따뜻한 붕어빵까지. 코끝은 시릴지라도 주변을 둘러보면 언제나 손에 움켜쥘 만큼의 온기가 있었다.


겨울이 오는 길목에서 나는 전에 없는 부지런을 떤다. 부지런히 옷장 속에 갖가지 방한용품을 챙기는 일ㅡ사실 폭신폭신한 목도리와 장갑, 털모자들은 내가 일년 내내 겨울을 기다리는 이유 중 하나이다.     

특히 난 목도리를 좋아한다. 이불처럼 포근한 머플러를 두르면,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형체 있는 온기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나같은 방한품 매니아에게는 모든 목도리가 소중하겠지만, 유난히 큰 애착을 가지고 있는 목도리가 있다. 바라보기만 해도 따뜻함이 온마음 가득 들어차는, 장장 8년의 겨울을 함께 보낸 빨간 목도리.

태어나서 처음으로 선물받은 손뜨개 목도리였다. 어렸을 적 내내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인심 좋은 호호할머니가 무릎 위 고양이를 앉힌 채 토끼같은 손녀들을 떠올리며 차분히 떠내려간 듯한.


이 목도리의 역사는 2014년의 겨울로 거슬러올라간다.

그 해 가을, 나는 중국의 천진(天津)이라는 도시에서 어학연수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난생 처음 해보는 낯선 도시에서의 홀로살이에 무척이나 환상을 가졌던 것 같다. 하지만 나의 어떤 기대와는 달리, 그 곳에서의 하루하루는 꽤나 무료하게 흘러갔다.


매일 아침 8시부터 12시까지는 중국어 수업을 들었고, 혼자서, 아주 가끔씩은 다른 친구 몇몇과 모여 점심을 먹었다. 점심시간 이후의 시간은 오롯이 나의 것이었는데, 혼자 교정을 산책하거나 도서관에 가서 잘 읽히지도 않는 중국 책들을 들춰보거나 중국어 공부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중국으로 출발하기 전엔 ‘천진대에 가서 중국인 친구를 많이 많이 사귀고 와야지’하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지만, 막상 도착해 보니 현지인 친구를 사귀는 것은, 그들의 고유한 일상에 스며드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이렇게 무료한ㅡ그리고 가끔은 고독하기까지 한 나의 일상 속 가장 큰 기쁨이자 빼놓을 수 없는 일과는 매일 점심식사 후 학생식당 4층에 자리잡은 밀크티 가게에 들르는 것이었다.

4평 남짓한 작은 매장이었는데, 나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한 여학생이 밀크티를 팔고 있었다. 어쩌면 나와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알 수 없는 친밀감과 호기심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 여학생에게서는 왠지 모를 따뜻한 분위기가 풍겼다. 꾸미지 않은 수수한 얼굴에 웃을 때면 살짝 휘어지는 눈가, 둥글둥글한 코와 강단 있어 보이는 입매. 그리고 자신의 세계를 모두 담아내듯 웃어보이는 기분 좋은 미소까지.

우유부단한 성정과 서투른 중국어 실력의 합작으로 늘 메뉴판 앞에서 오래도록 밀크티를 고르던 나를 인내심 있게 기다려 주는 그녀였다.    

  

그렇게 출근 도장을 찍은 지 몇 주쯤 되었을까. 그 여학생과 친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머릿속을 스치었고, 그녀의 따뜻한 미소와 인내심에 기대어 나는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일단 자기소개부터 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잘 해야 했다. 당시 서투른 중국어 실력을 가지고 있었던 나로서는, 이것은 조금은 어려운 임무였다. 다짜고짜 말을 거는 낯선 외국인이 수상해보이지는 않을까 고민했던 것도 같다.


그녀에게 말을 걸기 전 나는 큼큼, 하고 낮은 목소리로 목을 한 번 골랐다. 그리곤 나를 중국어를 전공하고 있는 한국인 유학생으로 소개했다. 중국엔 언제 도착했는지, 어느 기숙사에 지내고 있는지, 어느 건물에서 수업을 듣는지, 그녀가 궁금할지 아닐지 모를 소소한 정보들도 전달했다.


그녀는 자신을 천진대 대학원에서 분자생물학을 전공하고 있는 대학원생이라고 소개했다. 대학원 마지막 학년이라 수업이 많지 않고, 수업이 비는 시간마다 짬을 내어 이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했다. 특이하게도 밀크티는 특별히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이름은 솽솽(双双). 한자 독음으로는 쌍쌍이었는데, 어릴적 즐겨먹던 쌍쌍바가 떠올라 싱긋 웃음이 나며, 내 긴장도 함께 사르르 풀렸다. (훗날 한국에서 파는 쌍쌍바 사진을 함께 찾아보곤 꺄르르 웃기도 했다.)


통성명을 마친 뒤 나는 선전포고와도 같이 당당하게 언니에게 말했다.

  “언니 저 여기 매일 와요. 우리 친구해요. ”

그리고 언니에게서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좋아. 사실 난 이미 너를 알고 있었어. ”
   “정말요? 어떻게요?”
   “여기 매일 오잖아. 네 머리 스타일이나 억양을 보아하니 한국인 유학생이구나 싶었지. 게다가 오랜 고민 끝에도 결국엔 늘 같은 밀크티를 고르잖니. 그 점도 참 귀엽다고 생각했어. ”

솽솽언니는 특유의 그 사람좋은 미소를 띠며 내게 답했다.    

  

사실 언니가 나를 눈여겨 보고 있었다는 말에 나는 적잖이 놀랐다.

천진대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첫 느낌은 광활함에서 오는 압도감이었다. 어린 나이여서 그랬을까, 그 시절 내 눈에 비친 천진대는 내가 살고있는 동네보다도 더 큰 곳이었다. 학교에 도착한 첫 날 호기심이 발동하여 어렵사리 학교 지도를 구해 교정 이 곳 저 곳을 돌아다녔지만, 두 시간이 지나도 모든 곳을 둘러보기에 역부족이었다. 내가 매일같이 수업을 듣는 건물은 기숙사에서 걸어서 40~50분 거리에 위치했다.


천진대는 그만큼 컸고, 학교 앞에는 생전 처음 보는 6차선 도로가 펼쳐져 있었으며, 교정에는 큰 호수가 5개나 있었다. 이 곳을 혼자 산책하노라면 마치 새로운 평행우주에 홀로 던져진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게 반드시 나쁘다거나 외롭다는 느낌을 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모든 것이 새롭고 흥미로웠다. 다만, 여기서는 아무도 나를 모르겠구나, 하는 느낌은 항상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낯설고 새로운 세상에서도 나를 눈여겨 보고있던 사람이 있었다니, 그리고 그 사람과 친구가 되다니! 어쩐지 내내 낯설었던 이 곳과 내가 조금은 연결된 것 같다고 느꼈다. 그리고 나를 찾아온 무수한 우연들의 조합에 감사했다.

     

우리는 그렇게 매일을 함께하기 시작했다.

언니는 밀크티 매장에서 간단히 끼니를 때웠고 나 또한 거의 매일 혼자 점심을 먹었기에, 오전 수업이 끝나고 신나는 발걸음으로 언니가 일하고 있는 밀크티 가게를 찾았다. 마지막 4교시가 시작될 때면 ‘오늘은 언니랑 뭘 먹지’하는 설렘이 나를 찾아왔다.

매일 점심 언니와 이야기를 나눌 때면 매번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다행히도 한 시간에 한두 무리의 여학생들만 찾아오는 한산한 집이었기에, 나는 마음 놓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그 때 처음 깨달았던 것 같다. ‘소통에 가장 중요한 것이 언어는 아니구나’ 하고. 때때로 친한 친구에게도 털어놓기 힘든 이야기를 언니에게는 할 수 있었다. 소통이 안되는 문장을 마주할 때면 손짓 발짓, 중국어 사전까지 써가며.     


아무런 공통점 없이 시작된 사이였지만, 우리는 점점 빠르게 가까워졌다.

함께 영화를 보기도, 밀크티 만드는 법을 배우기도 했는데, 특히 언니 덕분에 천진대학교의 많은 사람들을 알고 지낼 수 있었다. 언니의 소개로 매번 방문할 때마다 밥 한공기까지 시켜ㅡ중국인 친구들은 마라탕 국물에 밥까지 말아먹는 게 아니라며 나를 한사코 말렸지만ㅡ한 그릇씩 뚝딱했던 마라탕 식당의 할머니, 그리고 투또우미엔(土豆面)을 파는 언니와도 친해질 수 있었다.

그들은 어린 외국인 유학생인 나에게 한없이 관대하고 따뜻했다. 나중에는 꼭 식사를 하지 않아도 불쑥불쑥 찾아가 인사를 건네기도 했는데, 금요일 저녁 기숙사에 돌아가는 길에 중국식 요거트를 건네며 ‘쪼모우위콰이야~(주말 잘 보내세요~)’ 하고 인사를 건네는 것은 나의 큰 기쁨 중 하나였다.


언니의 기숙사 룸메이트, 대학원 친구들과도 친해질 수 있었는데, 그들은 한국인인 내게 관심이 많았고ㅡ당시 중국 대륙을 뒤흔든 엑소, 별에서 온 그대 등의 한류 영향도 있었다ㅡ모두들 솽솽언니와 같은 따뜻함을 가지고 있었다.멋진 하얀색 가운을 입은 언니들에 둘러싸여 실험실에서 함께 런닝맨 영상을 보기도 했다.

외로운 타지 생활이었지만, 언니 덕에 늘 따뜻한 인정(人情) 속에 지냈다.   

  

날씨가 쌀쌀해져올 무렵, 언니와 나는 ‘목도리’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내게 직접 뜬 목도리란 언제나 겨울철 로망의 대상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언제인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2~3학년 무렵부터 나는 빨리 빨리 나이가 들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이러한 염원은 ‘목도리 뜨기’를 배우는 고학년 실과시간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4학년이 되어도, 5학년, 6학년이 되어도 나는 영영 뜨개질을 배울 수 없었고, 듬성듬성한 헬로우키티 퀼트를 보며 한숨을 쉬곤 했다. 그 때 내가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다면, ‘모든 반이 다 목도리 뜨기를 배우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담임선생님의 손재주나 뜨개질 솜씨에 따른 것이었다.

서른살이 되어서야 ‘그래, 모든 어른이 다 뜨개질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암’ 하는 생각이 들지만, 어렸을 때는 그게 어찌나 야속했던지. 매해 담임선생님이 바뀔 때마다 지난 반에서 뜨개질 수업을 했는지부터 확인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어린 시절 가졌던 겨울에 대한 가장 큰 로망은 그렇게 영영 실현되지 못한 꿈으로 남게 되었다.     


내 이야기를 조용히 듣던 언니는 내게 한 가지 제안을 해 왔다.

  “시담, 그럼 우리 같이 뜨개질 해볼래?”

  “언니, 나 한 번도 배워본 적 없어. 사실 초등학교 때 교과서에 나온 대로 혼자 해보려고 했는데, 손재주가 없는지 영 쉽지 않더라고. ”

  “그래? 뜨개질 별로 어렵지 않아, 내가 도와줄게! 너 어렸을 때 꿈이었다며. ”

용기를 북돋아 주는 언니의 말에 힘입어 우리는 교내 털실가게에 가서 털실을 한 뭉치씩 골라들었다ㅡ나는 회색, 언니는 빨간 색. 우리는 매장에 손님이 없을 때면 함께 뜨개질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언니는 이번 크리스마스 때까지 목도리를 완성해서 내게 선물로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교정이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든 어느 가을날, 언니는 어두운 얼굴로 머지않아 고향집에 내려가야 한다는 말을 전했다.

  “사실 며칠 전에 본가에서 연락이 왔어. 취업도 힘들고 하니 이제 그만 하고 내려오는 게 어떻냐고 하시더라고. 사실 나도 좀 힘들기도 했고. 거기서 다시 시작해보는 게 어떨까 싶어. ”

취업난. 언니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몇 번 언급되었던 주제였다. 중국의 취업난 또한 한국의 구직난만큼이나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던 것 같다. 매일같이 함께 시간을 보내던 언니가 멀리 떠난다는 사실이 믿기 힘들었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에게 힘든 내색을 잘 하지 않는 언니가 남몰래 힘든 시간을 보냈으리라믄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 날 저녁, 처음으로 언니네 기숙사에 초대를 받아 언니와 언니 룸메이트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였고, 언니 덕분에 알게된 맛있는 중국 음식들과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밀크티가 있었지만, 어쩐지 서글픈 마음에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 이별의 날이 다가왔다. 교정 저 끝에서 나를 보며 환하게 손을 흔들고 있는 언니가 보였다. 언니를 보자마자 나는 한달음에 달려가 언니를 꼭 안아주었다. 짐은 다 쌌는지, 몇 시 기차인지 이야기를 하던 솽솽언니는 내게 하얀 종이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그 안에는 언니가 직접 짠 붉은색 목도리가 들어 있었다.

  “언니, 이걸 언제 다 짰어?”

  “이번 크리스마스까지 주기로 약속했잖아. 갑자기 이렇게 떠나게 돼서 시간이 좀 촉박했네. 너무 짧아져버려서 미안해. 나 그래도 약속 지킨거다?”

  “내려갈 준비하기도 바빴을 텐데 언제 이걸 다 만들었대...나는 아직 완성도 못했는데. ”

  “괜찮아, 나는 손뜨개 목도리 많아. 뜨개질한 목도리 갖는 게 너 소원이었다며. 꼭 주고 싶었어. ”

매일밤 기숙사의 어두운 침대등에 의존해 목도리를 짜고 잠들었을 언니를 떠올리니 눈물이 핑 돌았다.

언니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돌아가는 밤, 나는 길 위에서 펑펑 울었고, 목에 두른 빨간 목도리 위로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언니는 평생을 한국에서만 지냈던 내 첫 해외생활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든든한 친구이자, 언니이자, 엄마와도 같은 존재. 내가 천진에서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던 이유이자 원동력.

그렇게 든든한 버팀목과 멀리 떨어져야 한다는 슬픔, 같이 더 해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무엇보다도 언제 또 볼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무쳐 하염없이 눈물이 났던 것 같다.  


매일 오후를 수다로 물들인 가을이 엊그제 같은데, 세월은 빠르게 흘러 벌써 8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다행히 그 이후로 언니네 본가인 덕주(德州)에 놀러가기도 했고, 아직도 가끔씩 메신저로 인사를 주고받기도 한다. 언니는 그동안 결혼을 했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그만큼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언니가 내게 건네었던 온기는 아직도 내 마음 한 켠에 자리잡아 차가운 겨울을 녹인다.

언니는 내게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손수 떠준 빨간 목도리를 아직도 기억할까? 내가 그 목도리를 두를 때마다, 겨울이 올 때마다 언니를 떠올리는 것도 알까?


이제는 너무나도 많은 시간이 흘렀고, 매일같이 이야기를 나누던 20대 그 때의 가을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설상가상으로 3년 전부터 시작된 코로나는 나와 언니의 나라 간 왕래를 쉽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서로 나는 온기를, 그리고 그 감사를 오래 기억할 것을 안다. 시간에 빛이 바라지 않는 그 무언가를, 우리는 알고 있다.

언니의 특훈을 받고도 아직도 서투른 뜨개질 솜씨이지만, 그 해 언니에게 선물하지 못한 하얀 목도리를 언젠가는 꼭 선물하고 싶다. 우리의 거리는 멀어졌어도, 그 시간 내내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을 그리워했음을, 또 감사해했음을.

이번에는 내가 그녀에게 전하고 싶다,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따뜻함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