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 23. 02:18
내게는 송씨 성을 가진 친구가 한 명 있었다. 중학교 입학식, 반 배정을 받고 책상에 앉았는데 그 아이가 옆자리로 와서 먼저 내게 말을 걸어주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부모가 맞벌이를 하고 할머니가 돌봐주는 집안 사정이 나와 똑같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심지어는 할머니의 태도가 다소 고압적이고 통제적인 것까지 같았다.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가뜩이나 초등학교에서 거의 혼자만 여중으로 오게 되어 모든 게 어색했던 내게 송의 존재는 대단히 든든했다. 나는 송의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대부분이 아파트에 살았고 나 역시도 그랬지만, 드물게 송의 집은 주택이었다. 좁지만 마당이 있었고, 무엇보다 개가 한 마리 있었다. 갈색 포메라니안이었다. 짧은 인생이지만 살면서 개를 키우는 게 유일한 소망이었던 나는 그 개를 보고 단번에 사랑에 빠졌다. 하루는 학교가 끝나고 개를 씻긴다기에 제발 돕게 해달라며 양팔을 걷어부치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송의 집으로 달려가기도 했다.
내가 다니던 여중에는 특이하게도 무용수업이 있었는데, 수행평가로 시험을 봤다. 천성이 뻣뻣하고 통나무 같았던 나는 수행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기대할 수 없는 애였다. 송은 나보다야 조금 나았지만 역시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 나와 송은 매일 그 아이의 집 거실에서 거울을 놓고 무용을 연습했다. 요즘도 가끔 요가를 하다가 그 생각이 나곤 한다.
송에게는 초등학교 때부터 친한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그 아이는 무용을 꽤나 잘했다. (이하 A) 송과 나는 같은 반이었지만 A는 다른 반이어서 어울릴 기회가 적었는데, A가 무용 연습을 도와주기 시작하면서 우린 셋이서 자주 어울렸다. 그 아이는 이따금 송과 나의 관계를 질투했고, 나를 불청객 취급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친했던 송이 어쨌든 자신보다 나를 집에 더 자주 들여놓고, 반이 같아서 등하교도 거의 같이 하며, 밥도 같이 먹으니 질투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A의 입장에선 내가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자리를 빼앗은 거니까. 가끔 송을 놓고 무언의 신경전이 오가긴 했지만 나는 원체 그런 걸 잘 모른 척 하는 여우같은 아이였기 때문에 우리는 큰 싸움 없이 잘 지냈다. 볕이 잘 드는 송의 집 거실에서 무용 연습도 하고, 마당으로 바깥으로 개 산책도 시키면서.
송의 아버지는 학원 원장이었다. 대전에서 학원을 차려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아파트에서 살지 않고 주택에 사는 게 대강은 이해가 됐다. (그 당시에도 아파트와 주택의 가격 차이가 조금 있는 편이었으니까.) 꽤 친해지고 난 다음에 듣게 된 이야기였다. 으레 아빠 이야기를 하고 나면 엄마 이야기를 뒤이어 해야 할 텐데, 송은 그러지 않았다. 그게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방 안에 붙어 있는 사진들도 전부 아빠, 할머니와 찍은 사진 뿐이었다. 나는 송에게 송의 엄마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에. 송은 아빠 얘길 계속 했다. 아빠는 자기가 더 좋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고 전화를 할 때마다 강조한다고 말했다. 그때 송의 과목 평균 점수는 88점이었고, 그건 결코 낮은 점수가 아니었다. 아빠가 얼마를 받아오라는데? 물었더니 98점을 받아오라고 했다고 대답했다. 평균 10점을 올리는 건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송은 내게 물었다. 안 되면 90점대라도 받으래. 그래야 학원 건물에 현수막으로 걸어놓을 수 있다고. 너는 어떻게 평균 92점이 나와?
송은 내게 공부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A는 평균이 70점대 후반이었다. 그래서 이런 얘기를 그 애한텐 아예 안 한다고 했다. 어쨌든 A는 성적에 더 예민할지도 모르니까. 나는 송에게 내 필기노트를 빌려주었고 우리는 더 친해졌다. 거의 매일같이 놀러오는 나를 마땅치 않게 여겼던 송의 할머니도 내가 송에게 공부를 가르쳐주기 시작하자 태도가 변했다. 방으로 불쑥불쑥 들어와 주스며 과일을 갖다주기도 했다. 어쨌든 우리는 더 긴밀해졌고 송은 점점 더 내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아빠가 성적 얘기만 자꾸 하는 게 힘들어서 방문을 다 닫고 선풍기를 틀고 죽으려고도 해봤다고. (그때는 선풍기 괴담이 실제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나는 그 말에 충격을 받았다. 나도 행복하다고 생각하면서 산 적은 없었지만 자살을 생각해본 적은 없었으니까. 나는 성적을 꼭 올릴 수 있을 거라고, 다시는 그런 행동을 하지 말라고, 네가 없으면 네 개와 네 친구들과…나는 어떡하냐고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서툴기 그지없고 오히려 해서는 안 될 말들 뿐이었다.
송은 그 이후로도 나와 공부를 열심히 했다. 하지만 성적은 평균 88점, 89점 사이에서 맴돌았다. 학기가 끝났고, 방학이 시작되었다. 방학동안엔 버디버디로 매일같이 연락하면서 지냈다. 노래방엘 자주 갔고 A와 셋이서 스티커 사진을 찍기도 했다. 송의 성적에 대한 고민도 방학동안엔 잠깐 멀어져 있는 것처럼 보여서 안심했다. 그리고 학년이 올라가 중학교 2학년이 된 3월, 송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월 둘째주 토요일.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날이다. 주말에도 학원을 다니던 나는 어김없이 학교가 끝나자마자 (이땐 토요일에도 학교를 갔다.) 학원을 갈 예정이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면 있는 농협 앞에서 나랑 송은 매번 인사를 하고 헤어지곤 했다. 어김없이 인사하려는데, 송이 테크노 마트에 놀러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평소 같았으면 안 돼 나 학원 가야 돼, 그렇게 말했을 텐데 나는 갑자기 송과 함께 테크노 마트에 가고 싶어졌다. 그래서 학원 가야 되긴 하는데, 조금만 기다려 봐, 하면서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딱 잘라 거절당했고 나와 송은 결국 테크노 마트에 가지 못했다.
토요일 저녁, 학원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버디버디에 접속했다. A와 송이 접속해 있어서 인사 쪽지를 날렸는데 A는 바로 답장이 왔지만 송은 답장이 없었다.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었지만 평소에 답장이 느리던 애가 아니었기 때문에 뭐하냐고 재차 쪽지를 보냈지만 역시 답이 없었다. 바쁜 거겠지, 생각하고 나는 송의 블로그에 들어갔다. '장례식 조문객 예절'이 스크랩 되어 있었다. 이상했다. 아무래도 위화감이 심했다. 물어보려고 버디버디 창을 다시 켰더니 송은 로그아웃을 한 상태였다. 의아함의 연속이었다. A에게 물어봤는데 A는 별로 대수롭지 않아 했다.
그날 밤, 송이 다시 로그인을 했길래 나는 송에게 또 인사 쪽지를 보냈다. 그건 A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갑자기 단체 대화방이 만들어졌다. 송이 나와 A를 초대한 것이었다. 갑자기 뭐냐는 말에 대답이 없던 송이 말했다. 나 송의 아빠인데, 송이 가출을 했다고. 혹시 뭐 아는 것 없냐고. 우리는 당연히 당황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저랑 잘 헤어졌었어요, 그런 말 따위를 했더니 송의 아빠는 송이 최근 심경의 변화를 겪었거나 한 건 없냐고 물었다. 나는 송이 성적 때문에 힘들어 했다는 걸 털어놓았지만 그렇게 심각하게 말하진 않았다. 송의 아빠는 몇 마디를 더 묻더니 알았다고 하고 로그아웃을 했다. A는 말했다. 송이 가출이라니, 며칠 이따가 피어싱하고 머리 염색하고 나타나는 거 아냐? 우리는 불길하게 키득거렸고 찾으러 가봐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만 주고 받다가 찝찝한 채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일요일. 나는 테일즈 위버라는 게임을 하고 있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서 받았더니 송의 아빠였다. 뜬금없이 우리 엄마의 전화번호를 물었고 나는 왜냐고 물어보지도 못하고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다시 게임에 몰두했다. 30분쯤 후,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송이 죽었다고. 자살했다고. 장례식을 가야 한다고. 나는 황망하게 전화를 끊고, 잠시 멍하게 있다가 A에게 전화를 걸었다. A는 송의 아버지에게서 따로 전화를 받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나조차도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로 송의 부고를 A에게 알렸다. A는 나처럼 멍하게 있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대성통곡을 하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더욱 어안이 벙벙해졌다.
월요일, 교복을 입고 장례식에 갔고, 송의 아버지가 나를 붙들고 주저앉아 울었고, 나는 눈물이 나오지 않아 곤혹을 치렀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나와 A가 갔던 월요일이 발인이었다. 지금 생각하건대 자살자는 장례를 빨리 끝낸다고 하니 일요일에 발견되어 바로 장례식을 열고 월요일에 발인을 한 건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가장 친한 친구의 장례식을 다녀온 나를 학교로 보냈다. 학교를 빠질 수는 없지 않냐고 했다. 지금이야 엄마가 얼마나 몰이해적인 사람인지 알 수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땐 경황이 없어서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줄 알고 학교에 갔다. 학교에는 이미 송이 전학을 간 걸로 처리가 되어 있었다. 선생님이 나를 따로 불러 송은 전학을 간 게 되었으니 아이들에게는 비밀로 하자고 말했다.
이해 할 수 없는 일 투성이었다.
나는 졸업할 때까지 송의 죽음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A는 장례식 이후로 두문불출해 나와 급속도로 멀어졌다. 나도 A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고 A도 나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그러다 몇 년 후에 J여고로 진학한 A도 성적비관으로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셋이 찍은 스티커 사진에서 살아남은 아이는 나밖에 없다.
나는 송을 잃고 학창시절의 거의 대부분을 후회로 보냈다. 그때 내가 테크노 마트를 송과 함께 갔더라면, 아니면 그 전에 송이 선풍기를 틀어놓고 자살을 기도했다는 말을 했을 때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하고 반응하고 진심으로 위로해줬더라면 뭔가 달라졌을까 생각했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서 엄마와의 갈등도 심해졌고, 엄마는 또 자신만의 사정으로 우울증에 걸려 내게 폭언을 쏟고 물건을 집어던지기 일쑤였다. 나는 그때마다 샤프로 내 손목이나 손등을 찌르며 생각했다. 송도 이렇게 괴로웠을까. 이런 생각이 내 학창시절을 차지하다보니 친구가 남아있을 리 없었다. 외롭기 싫어서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더 외로워졌다. 그런 나날들이었다.
재수를 하고, 뜻밖에 글로 대학에 들어가고 내 나름대로 삶과 정면으로 부딪히면서 송에 대한 것들은 대부분 잊혀졌고 그 죄책감도 희미해졌다. 송을 보내는 글을 대학교 1학년 때 페이스북에 길게 썼던 적도 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꽤 자주 송을 떠올렸다. 그리고 내가 채 제대로 닿아보지도 못한 A에 관해서도 떠올리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송의 얼굴도 A의 이름도 선명하지 않다.
지금에야 다시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내가 송 때문에 우울함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부채감을 가지고 살아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을 구제해주고 싶어 했다. 송에게 실수를 저질렀으니 내 근처로 온 사람들이 상처 입어 피를 흘리고 있으면 그걸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이 자살할까봐 두려웠다. 하지만 그것 또한 물론 나를 위한 것이었다. 송의 죽음으로 나는 매우 큰 상처를 입었고 그때 삶이 한 번 바뀌었으니까. 또 누가 자살해서 나를 상처준다면 그때는 정말 아플 테니까, 그 고통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고 슬픈지 아니까 또 그 고통을 받기 싫어서 남을 구원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자신의 우울함을 드러내는 사람들을 보면 조바심이 나고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게 그를 위한 거라고 생각했다니 참 나도 웃기는 사람이다. (당연히 내가 상처받기 싫어서였는데.) 어쩌면 그들에게 위로를 핑계로 빨리 좋아지라고, 빨리 우울에서 벗어나라고 윽박을 질렀는지도 모르겠다. 이걸 인정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아니, 아직도 인정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솔직히 지금도 가까운 사람을 잃게 될까봐 무섭다. 정말 무섭다.
나는 당신들이, 내가 더는 우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제는 그 바람이 이기적일지도 모른다고 가정할 줄 알게 되었다.
내가 당신들에게 어떻게든 위로를 줄 수는 있지만 당신들의 우울을 낫게 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도 인정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정신과 의사도 아니고, 모든 상황을 다 이해하지도 못하며, 또 나조차도 죽을만큼 외롭고 우울해서 견디기 어려울 때가 많은 사람이다.
당신이 소중한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 싫어서 울음을 참고 우울을 가까스로 견디고 있는 것도 안다.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것도 어려운 사람에게, 당신이 사랑하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요구인지도 이제는 깨달았다.
함부로 살아있자고, 살아보자고, 더 나아질 거라고도 단정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오늘도 내가 만져줄 수 없는 다른 사람의 우울과 스스로도 만질 수 없는 나의 우울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소중한 사람의 앞에서 무너지고 싶지 않은 마음도 이해하지만, 여전히 당신이 내 앞에서 무너져 당신이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구나 느끼게 해주길 바란다.
내가 당신에게 최선을 다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면 한다. 이기적이게도.
언젠가 열 다섯 살의 송을 다시 만난다면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나도 제법 열심히 싸웠노라고.
삶이란 매순간 견디는 것임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고. 이제는 너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이해하는 데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미안하다고.
이 이야기는 2020년에 <괄호는 괄호와 괄호사이 괄호가 될 수 있을까>의 <송>이라는 작품으로 희곡화 되었다. (물론 허구 반 사실 반 반반 무 많이로) 마치 씻김굿을 하듯 나는 희곡으로 송에게 다시 육체를 입히고 오래도록 대화를 나눈 다음 영영 떠나보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