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0. 8. 03:38
3년이 지났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가 아직도 기억난다. 돌아가시기 전전날 할머니를 모셔두었던 요양병원에 갔었다. 할머니 상태가 안 좋아져서였다. 폐가 안 좋아져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산소 호흡기를 끼고 계셨고 눈도 뜨지 못하셨다. 나는 그런 할머니의 머리맡에 서서 어쩔 줄을 몰랐다. 엄마는 울고 또 울다가 자리를 도망치듯 벗어났고 나는 망설이다가 할머니의 손을 꽉 잡아보았다. 언제나 거칠거칠하고 두툼하고 따뜻하던 할머니의 손은 그 크기가 아주 작게 느껴질 정도로 힘이 없었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할머니의 귓가에 '할머니, 내 말이 들려?' 하고 물어보았다. 할머니는 손에 한 번 힘을 주었다. 할머니가 듣고 있다는 확신이 들자 나는 주절주절 말을 쏟아놓았다.
할머니, 엄마는 내가 잘 보살필게. 할머니 그러니까 절대로 걱정하지 마. 그리고 나 꼭 멋있는 작가님이 될게. 그러니까 그것도 절대로 걱정하지 마.
그렇게 말하니까 할머니가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힘을 꽉 주어 잡으셨다. 그 느낌이 아직도 선명하다.
다다음 날 할머니의 부고를 들었다. 비가 미친듯이 쏟아지고 있던 날이었다. 생각해보면 안 좋은 일은 꼭 비가 오는 날에 있었지. 새아빠나 엄마한테 담배가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나는 현관문으로 나와 기대어 서서 담배를 피웠다. 역시 눈물은 나지 않았다. 손이 너무 떨렸고 담배가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렇게 했던 것이었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앞이 안 보일 지경이었다. 7월 말의 일이었고 장마가 시작되었던 때였다.
장례식 얘기를 자세히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건 그냥 과정일 뿐이고 사실은 지금까지도 하나하나 전부 기억이 나지만 당연하게도 굳이 기록할 만큼 좋은 기억이 아니다. 그냥 할머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으니까 할머니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할머니는 엄마를 대신해 나를 키우다시피 했고, 내 유년시절의 대부분은 할머니로 채워져 있다. 유치원은 말할 것도 없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때까지 할머니는 나와 함께 계셨다. 우리집에서 모시기 때문도 있었지만 그건 건강이 안 좋아지셨을 때의 이야기고 그 전에는 사실 그냥 할머니의 도움을 받으며 살았다고 표현해야 옳다. 할머니 덕분에 언제나 '가정환경조사' 시간에는 몇 안 되는 아이들 틈에 내가 있었다. ("조부모님과 같이 사는 어린이 손".) 어쨌든 할머니는 엄마보다도 상세하게 내 글씨체가 변하는 과정을 지켜보았으며 누구보다도 내가 악필이 될까봐 걱정하셨다. (유치원 때는 또박또박 잘 쓰다가 초등학교 들어서는 괴발개발 날려쓴다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셨다. 매일 아침 엄마와 통화를 할 때마다 '쟤는 글씨를 정말 못 써서 큰일이다. 저렇게 글씨를 못 써서 어떡하니.' 그런 말을 하셨던 기억이 있다. 물론 지금의 나는 글씨를 잘 쓴다.) 또 내가 납치를 당할까봐 24시간 중 깨어있는 시간의 몽땅을 걱정으로 보냈다. (그 당시에는 태권도 학원을 다니면 선물(?)로 기니피그를 주는 이벤트(?)를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비인도적이기 짝이 없지만 어쨌든 그때는 기니피그를 키우고 싶어서 태권도 학원에 다녔다. 실제로 기니피그는 나 덕분에 나날이 탱탱하게 살이 올랐지만 정작 나는 학원이 오후 8시에 끝난다는 이유로-납치가 걱정되어서-한 달도 못 가 태권도 학원을 그만두어야 했다.) 걱정이 너무 심해서 친구도 물론 자유롭게 만날 수 없었다. (친구가 집에 놀러왔다가 돌아가는데, 도보 10분도 안 되는 거리의 횡단보도 앞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하고 함께 길을 나선지 3분 만에 할머니에게 '왜 아직도 안 오냐'며 전화가 온 적이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는 학교에서 하는 부채춤 반에 들어가 있었는데 연습이 3시에 끝나는 걸 5시에 끝난다고 뻥을 치고 친구네 집에서 놀다가 돌아왔더니 들어오자마자 머리채를 잡고 때린 적도 있었다. (엄연한 가정 폭력이다.) 하여튼 이제와서 '그때는 그런 것들이 지긋지긋했는데 지금은 그립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아직도 그때의 집착은 지긋지긋하다. 나는 할머니의 그런 간섭과 걱정 때문에 지나치게 독립적인 인간으로 자라버렸고 덕분에 아직까지 살아가는 데에 애로사항이 많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할머니의 영향이 이토록 컸다고.
안 좋은 기억만 나열했지만 좋은 점도 많았다. 초등학생 때까지는 할머니의 과잉보호가 곧 나의 힘이었기 때문에, 나는 마음껏 반의 남자 애들을 쥐어패서 울리고 다녔다. 남자애들이 반격이라도 해서 싸움으로 번지면 곧장 집으로 쪼르르 달려가 할머니한테 일러바치면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할머니는 치맛바람을 일으키며 다니는 걸 절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고 나도 초등학교 때는 그런 할머니가 자랑스럽고 든든했다. (다행히도 중학교 때는 할머니가 치맛바람을 일으키는 일이 없었다.) 또 나는 으레 어린이들이 그렇듯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꿈이 바뀌는 스타일이었는데, 판사부터 해서 아나운서, 선생님, 도서관 사서, 소설가, 가수 다시 판사, 변호사, 아나운서, 작가…등으로 바뀔 때마다 할머니는 꼬박꼬박 '판사님, 선생님, 작가님' 하고 불러주셨다. 가장 마음에 들고, 내심 바라셨던 직업은 판사님이었던 것 같지만. 그리고 할머니는 언제나 내 편이었다. 심지어 자기 딸(엄마)와 내가 싸웠을 때도 항상 내 편을 들었다. "그거(엄마) 내가 혼내줄게." 하시던 게 어찌나 든든하던지.
어릴 적부터 나는 할머니의 죽음을 매우 두려워 했는데, 예컨대 가상의 드라마에서도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죽으면 통곡을 했고 전국노래자랑을 보면서 늘 송해 할아버지의 안부를 걱정했다. (지금은 통곡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어쨌든 여전히 그렇다.) 그러다가 할머니가 처음 쓰러지시던 날, 나는 화장실에 넘어진 할머니를 먼저 발견하고 119에 전화를 했고 자고 있던 엄마를 깨워 함께 병원에 갔다. 입원 절차를 위해 오열하던 엄마를 달래서 잠시 집에 다녀오던 때, 나는 할머니가 우리 가족에게 더 이상 없을 수도 있다는 걸 처음으로 실감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차근차근 마음의 준비를 했던 것 같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할머니가 돌아가시기까지 6~7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지만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떠올리면 울고 마는 할머니의 표정이나 목소리 중에서도 가장 마음이 아픈 것은 할머니가 쓰러지신 뒤 입원했다가 퇴원을 하고 거동이 불편하신 채로 우리집에 오셨을 때의 일이다. 당시에 내가 고등학생이었으니 소위 말하는 야자를 하고 10시쯤에나 돌아왔는데 친구랑 이야기를 하느라 10시 30분쯤 집에 돌아간 날이었다. 꺼져있던 휴대폰을 켜니 엄마한텐 전화가 수십통이 와 있었고 집으로 가는 계단에는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불길한 예감으로 헐레벌떡 집으로 들어가니 할머니의 눈썹 위에 크게 상처가 난 자국이 있고 입술에도 큰 상처가 나 있었다. 왜 이랬냐고 물으니 할머니는 대답을 않고 엄마가 역정을 내며 네가 오지 않아서 나를 기다리려고 계단에 내려가 서 있으시다가 다시 올라오는 중에 넘어지셨다고 했다. 우리 아파트는 복도형이 아니고 두 세대가 마주 보는 형태의 층으로 되어 있었고, 그 사이 반계단 층층마다 창문이 커다랗게 하나씩 있었다. 다시 말해 할머니는 고작 30분을 늦게 오는 손녀가 걱정이 되어서 어두운 밤에 거동도 불편한 채로 반계단을 내려가서 창문에 기대어 한참 나를 기다리다가 전화라도 해보려고 다시 올라오다가 넘어지신 것이다. 나는 그때, 이게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다른 게 아니라, 할머니의 사랑이, 마음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굳이 엄마와 비교하지 않더라도 할머니는 나에게 엄마 이상의 존재였다. (예상했겠지만 엄마랑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 지금은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 내가 말하는 건 뭐든지 들어주고 내가 하고 싶다고 하는 건 뭐든지 응원해주는, 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무조건적인 나의 아군이었다. 이토록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은 할머니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다고도 몇 번이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자존감이 매우 낮았고 정신적으로도 매우 힘들었다.) 그날 밤에 혼자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바로 옆에 주무시는 할머니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울면서 나는 만약 할머니가 돌아가신다면 내 신이 되어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49제를 지내고 각종 안 좋은 일이 겹치면서 파리로 도망치듯 여행을 갔을 때 할머니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 꿈에 나와서 나의 손을 잡아주셨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영영 꿈에 나타나지 않으신다. 망자가 꿈에 나오면 좋지 않은 것이고, 망자가 꿈에 나오지 않는 것은 좋은 곳으로 떠났다는 증거란다. 그렇게 믿는다. 사후세계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이렇게 믿는 게 얼마나 모순적인지 알면서도 그렇게 믿는다. 왜냐하면 할머니는 좋은 곳에 계셔야 하는 분이니까. 그곳이 어떤 곳이든지 간에.
또 할머니가 내 신이 되셨다고 믿는다. 언제나 어디서나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지켜보고 계시리라고. 신이 존재한다면 그건 믿는 사람의 영원한 아군일 테고, 나에게 있어 영원한 아군은 할머니 뿐이었으니까 말이다. 할머니 사진은 아직도 내 지갑 속에 있다. 아프실 때 찍은 사진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리지만 꺼내볼 때마다 할머니를 되새기게 된다. 평생 그리워 할 사람이 있다는 건 그래도 몇 안 되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은 아프지만 슬픈 일이라고 분류할 수는 없는 그런 일. 우리 할머니. 할머니를 위해서라도 '멋있는 작가님'이 되려고 한다, 죽기 전까지. …이렇게 멋지게 마무리.
이제는 돌아가신 지가 10년이다.
여전히 나는 매년 할머니의 산소를 찾는다.
어려울 때면 할머니, 나 좀 도와줘. 할머니 나 좀 붙잡아줘 기도한다. 할머니는 여전히 나만의 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