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일상. 여행이 주는 즐거움의 원천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비일상이 주는 자극이 아닐까 한다. 낯선 풍경, 언어, 맛과 향, 사고 방식과 행동들은 매순간 크고 작은 자극이 된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다시 일상에 젖을 때쯤 마음 한 켠을 간지럽히는 그런 잊기 어려운 자극이.
분, 초 단위로 잘 짜여진 효율적인 여행도 좋지만 느슨한 여행을 선호하는 건 비일상이라는 즐거움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냥 끌려서 들어간 식당, 카페가 블로그 등에서 요란히 떠드는 '성지'보다 나을 때, 그곳은 모두의 핫 플레이스가 아니라 '나만의 스팟'이라는 특별한 곳이 된다.
타이베이 다안에 위치한 핸드드립 전문 카페 '앳홈 카페(At Home Cafe)'가 그렇다. 이 곳은 원래의 목적지가 아니었다. 몇가지 우연 덕에 발견했다.
가려던 카페가 문 열기 전 시간을 때우려던 스타벅스는 아침 일찍 만석이었다. 근처 다른 스타벅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3번째 스타벅스로 향하는 길은 멀었다. 타이베이의 여름 햇볕은 그 길을 다 걷기엔 따가웠다. 중간쯤 걸음을 멈추고 구글맵을 열자 머지 않은 곳에 앳홈카페라는 곳이 나왔다. 마침 오픈 시간이 3분 남은 상황. 선택의 여지는 없었고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었다.
앳홈카페의 문을 열고 서투른 중국어로 인사를 건냈다. 눈이 마주친 카페 주인의 표정에 당황스러움이 스친다. 그도 그럴 것이 공지된 오픈 시간은 됐지만 카페는 사실상 개점전이었다. 간밤의 후덥지근한 공기가 눅직히 남아 있었고 스피커의 침묵은 어색함을 더했다. 발걸음을 돌려야하나 잠시 고민할 즈음 카페 주인은 바 테이블로 자리를 안내했다.
에어컨이 켜지고 스피커에선 재즈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공기가 바뀌고 소리가 바뀌고, 마침내 그라인더가 커피를 갈며 콩 안에 갇혀있던 커피 향을 공간 가득 채우며 그 곳은 온전히 카페가 됐다. 벽에 붙어 있던 No Place Like Home이라는 문구가 이제는 무색하지 않게 됐다.
앳홈카페는 핸드드립 전문점이다. 에스프레소 메뉴는 없다. 커피에 대해 잘 모르면 어떤 원두를 선택해야할지 망설여지게 된다. 게다가 그 메뉴가 중국어로 적혀있다면? 카페 주인이 중국어 밖에 못 한다면? 이쯤 되면 내 눈이 흔들릴 차례다. 그런데 다행히 칠판에 적힌 메뉴판에서 작은 친절을 발견할 수 있다. 원두의 맛과 향이 그래프 위에 직관적으로 표시되어 있는 것이다. 길고 자세한 미사여구보다 반가운 프레젠테이션이다.
처음 눈이 맞은 순간 잠시 스친 당혹 이후 큰 표정 변화 없는 시크하고 잔잔한 사장님은 능숙하게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수없이 반복했을 동작은 우아했다. 무심히 커피를 갈고 필터에 채운 후 따뜻하게 데운 물을 리드미컬하게 흘려 한 잔의 커피를 완성한다. 눈 뗄 수 없게 하는 장면이다. 마침 흘러나오는 음악도 완벽하게 어울린다.
예가체프 커피의 맛은 산뜻한 산미가 돋보였다. 가벼운 터치감과 부드러운 질감도 좋았다. 주말 오전 채 가시지 않던 피로를 덜어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한 잔이었다.
카페에 들어서기까지 머릿 속에 가득하던 해야할 일들은 아직 꺼내지 않았다. 등 뒤에 난 유리창이 방금 전까지 쿡쿡 찔러오던 햇살에서 예리함을 거둬갔다. 한 모금의 커피는 몸 안을, 한 줌의 햇볕은 몸 바깥을 따뜻하게 해줬다. 그 순간에 온전히 충실하기로 했다. 모든 조건은 갖춰져 있었다.
잠시 후 문을 열고 들어온 손님들은 아주 익숙하게 자리에 앉아 공간에 녹아들었다. 아무도 말하지 않고 풍경이 됐다. 취향을 정조준하는 음악이 소리를 대신했다. 저장해 두고 싶은 시간이었다. 동시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소개해주고 싶은 순간이었다.
카페 벽면엔 개점 이래 약 8년간 쌓여온 카페 주인, 손님들의 흔적들이 붙어있다. 로컬 카페의 정겨운 풍경이다. 값비싼 고급 인테리어 용품으로 대신할 수 없는 소품이다.
뜻밖에 들른 앳홈 카페는 비일상의 즐거움을 새삼 느끼게 해줬다. 결코 요란하지 않게, 지극히 자연스럽게. 핸드드립 커피를 좋아한다면, 아니 커피에 대해 잘 알지 못하더라도 카페의 여유를 한껏 누리고 싶다면 오픈 시간에 맞춰 가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