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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침형 모험가 Jul 20. 2023

걱정이 되지만 우리라서 될 것 같다(3)

20일간의 제주올레길 일기 

#4/27 

추자도에 들어가는 날, 무거운 짐, 멀미, 숙소 이동 쓰리 콤보다. 

나는 멀미에도, 멀미약에도 취약했다. 생각보다 멀미가 심하지 않아 걱정 없이 섬에 입성한 오빠와 달리 난 멀미약에 취해 녹초가 되었다. 무거운 짐을 어쩔 줄 몰라할 때 "가방 여기에 내려놔." 

왠지 날이 서있는 싸늘한 말투에 기분이 나빴다. 


숙소에 도착하고 섬 경관이 눈앞에 펼쳐져도 흥이 오르지 않았다. 

오늘 코스는 어느 방향으로 돌건지 오빠 혼자 파악했고 내가 설명한 대로 잘 이해했는지 확인하는데 "그렇게 할 거야."

다시 날 선 말투로 화살이 돌아왔다. 잘못된 말은 없지만 기분 나쁘게 들렸다. 

아마 각자 예민한 탓이겠지. 결국 잘 모른 채로 코스를 비효율적으로 걷다 하루가 끝났다.



#4/28

아팠다. 식습관과 환경이 변한 지 일주일이 지나자 화장실을 제 때 가지 못했다. 아랫배가 꽉 차 먹는 것들이 소화가 안 됐다. 걷기도 싫고 쉬어야겠는데 난 혼자가 아니었다. 나의 컨디션 보다도 제주를 즐겨야 하는 오빠를 배려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점심이 되어서야 불편한 휴식 시간이 생겼다.


그래도 허리를 30도쯤 접고 걸어대는 나의 상태를 보고 약국부터 찾아주었다. 약사 처방대로 도움 되는 채소들을 챙겨 먹자는 오빠에게 고마웠다. 아픈 시간을 보내며 화장실과의 사투를 끝냈다. 힘이 다 빠졌다.

추자도, 좋은 섬인데 내 기억에 짙게 남은 건 화장실뿐, 다시 와야겠다.



#4/29 

추자도를 나와 오게 된 구좌 

종달리 감수굴펜션

집에 온 듯한 아늑함이 좋았다. 

아직 컨디션이 회복되지 않았지만 더워지기 전에 올레길을 계획대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걸음을 피할 수 없었다. 힘듦에도 불구하고 걷고 있는 나 자신이 대견하고 멋졌다. 아파도 잘 이겨내고 일어서는 것도 내 힘인 것 같다. 다행히 짧은 코스를 가볍게 마쳤다. 

비가 오기 시작했을 때 찾은 뜨끈한 지리탕이 속을 풀어주었다. 날 위해 장 보며 사과, 바나나, 오이, 요구르트까지 필요한 걸 아낌없이 사주는 오빠에게 고마웠다. 



#4/30 

성산일출봉 앞 광치기해변 윤슬이 반짝거렸다. 

해안을 따라 걷는 길이 편안했다. 올레길을 걷기 시작한 지 열흘이 되어 가고 있다. 

일기는 밀렸고 피로는 쌓인다. 말을 하지 않고 걸음만 쳐다보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생각할 시간이 많지만 특별한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문득 떠오르는 주제로 시시콜콜 대화하고 있다.

코스를 마치고는 짧은 낮잠도 자고 기분 좋은 식당에서 저녁도 먹었다. 저녁에는 영화도 한 편 봤다. 

웃긴 영화를 보며 누리는 여유가 반갑다. 


#5/1

귀여운 일이 있었다. 버스를 타면 자주 들리는 '동동'의 뜻을 알게 됐고, 천 원짜리 한라봉을 만난 일.

길 가다 최고 모양 돌을 봤고 쭈쭈바를 먹은 일. 


저녁에 그동안 사용한 예산 점검이 있었다. 

계산해 보니 하루에 각자 7만 원을 매일 사용하며 걷는 제주였다. 순간 '그만큼 남는 게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에게 물으니 추억, 경험, 도전, 성취 같은 것들이 남는다고 한다. 맞다.

힘든 때일수록 그만큼 보람찬가, 괜히 따지며 재보게 되더라.

그럼에도 누군가와 24시간 붙어있으며 같은 것을 보고 느끼고 알게 되는 것들이 무척 많은 것 자체가 값지다. 우리에겐 사진, 글, 영상, 같이 가진 기억, 함께한 도전이 남았다. 흠뻑 비에 젖기도, 길에 앉아 물집을 터트리기도 하며 같이 걸어 나가는 우리가 대단히 멋있었다. "보기 좋아요."하고 걷는 사람들에게 듣는 말처럼 자랑스러운 도전을 하고 있다 믿는다. 싱그러운 웃음소리 듣는 게 좋고, 아프고 기쁠 때 함께 하고 있음에 의지가 된다. 



#5/2

우도에 다녀왔다. 일찍 눈이 떠진 바람에 다녀오고도 반나절 시간이 남아 밀린 일기를 쓴다. 

그동안의 제주가 필름처럼 지나가며 새록새록 떠올랐다. 아팠던 것도 말끔히 회복했다.

좋아하는 것들로 채운 이 시간을 기록하며 소중히 여기고 있다니 감사하다.


제주에 오기 전까지 다녔던 직장은 5월이 되면 참 바쁜데, 지금 내 5월은 누구도 찾지 않아 평화롭다. 

평소 친구들과 연락이 잦지 않아 핸드폰이 울릴 일이 없다. 지금 옆에 온종일 함께 하는 사람이 있으니 심심함을 느낄 틈이 없다. 


하루동안 소확행이 수 없이 많이 차있다. 새소리를 듣고 동물을 발견하면 반가워하고, 계획하고 결정하며 우리의 신뢰통장을 탄탄히 만드는 중이다. 오늘의 마지막 소확행은 피맥 하면서 영화 보기다. 


#5/3

4코스를 시작하자마자 흙길을 걸어 다니던 게를 발견했다.

지나가다 보이는 알록달록 꽃, 날아다니는 제비나 물 위의 오리, 하찮아 보이지만 성실히 움직이는 달팽이나 게.

옛날에는 있는 줄도 모르고 지나쳤는데 오빠를 만나고 내게도 자연의 섬세한 부분이 시선에 들어온다. 

오빠는 생명을 발견하면 한껏 귀여워해주고 해맑게 웃어준다.


내가 오리나 제비라면 커다란 사람의 시선이 두려워도 오빠의 악의 없는 웃음에는 관심받고 싶지 않을까 싶을 만큼 무해하다. 

게가 있다고 하니 뒤돌아온 오빠는 "여기 있음 안되지~" 라며 장갑 낀 손으로 잡아 올린다.

바닷속 물에 담가주러 벌레가 잔뜩 기어 다니는 바위를 지나 내려갔다.

바다에 게를 보내주고 안전한 길로 다니라며 훈수를 놓은 다음 우리 갈길을 이어갔다.

그동안 지켜본 오빠는 작은 생명체들은 대부분 귀여워하는 것 같다. 겨울이 지나고 피어나는 작은 나뭇잎까지도.


제주 와서 비를 참 많이 맞았다. 제주에서는 비옷을 입고 버스를 타도 왠지 괜찮을 것 같아서인지, 같이 맞아주는 사람이 있어서인지, 비를 맞아보겠다고 사 입은 바람막이 덕분인 건지, 자연을 그대로 느끼자고 왔기 때문인 건지 서울에서 안 하던 행동이 제주에서는 허용되어서 좋았다.


#5/4

숙소를 옮기는 날인데 폭우가 내렸다.

배낭 무게를 줄이자며 당연하게 우산을 안 챙긴 우린 오늘도 구입하지 않았다. 

가족들에게 걱정이 담긴 문자가 왔지만, 꿋꿋이 우비를 입고 그 비를 맞으며 이동했다.

우비를 입고 이마트 앞을 걸어 다니는 우리를 어이없게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 나도 느꼈다.


숙소에 들어오니 이렇게 마음이 편안할 수가 없다. 오늘은 올레길을 걷지 않았지만 사실 내일도 걱정이다.

뉴스에는 폭우로 항공편이 다 결항했다는 속보가 나오고 있었다. 창 밖으로는 '이 날씨에 돌아다니다니'라고 말하는 듯한 비가 쏟아져 내렸다. 

4개의 벽과 지붕이 주는 안정감이 이렇게 소중할 수가 없다.


#5/5

솔직히 오늘 걸을 줄 몰랐다. 비가 너무 많이 왔지만 걸을 수 있다는 오빠..

(내 기준) 위험할 정도로 비가 많이 내렸다. 

이러다 다치면 구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면목이 없을 거 같고, 무서웠다. 

'혼자였음 밖으로 절대 나오지 않았어'라는 생각만 곱씹으며 뒤 따라나섰다. 

3주 동안 깔끔하게 남긴다며 앞, 뒤로 메모지를 붙이고 있던 스탬프북은 비에 젖고 잉크가 번져 엉망진창이 되었다. 안 젖겠다며 입은 우비와 바람막이를 뚫고 등에도 빗물이 세어 들어오는 오늘을 잊을 수가 없겠다. 




서울에서는 절대로 시도할 수도 없는 폭우 속 걸음이었다. 우리였기에 가능했다.


 


#5/8

내려오기 전부터 신경 쓰였던 어버이날. 눈 뜨자마자 부모님께 연락도 드렸지만 그동안과는 다르게 종일 부모님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하루를 보냈다. 여기에서는 동년배보다 부모님 연배를 쉽게 볼 수 있었는데, 육지에서 넘어와 노후를 보내는 제주도민이나 부부끼리 도전하는 올레꾼이나 한달살이 하는 어른들이 오늘따라 보기 좋았다. 성공하면 우리 부모님부터 챙겨야지 생각이 드는 하루다. 


닭장 같았던 서귀포 숙소에서 산방산 펜션으로 옮겨왔다. 좁은 곳에서 세탁, 환기, 짐정리 불편한 점도 많았지만 공간이 주는 갑갑함. 기록도 계획도 무뎌지는 무기력함을 경험하다 벗어난 숙소는 쾌적할 뿐 아니라 피로회복까지 경험시켰다.  


어른의 따뜻함을 느꼈다. 숙소를 옮길 때 잘못 탄 버스 덕에 계획 없이 찾은 '우리 사계식당'도 정류장에서 우리에게 버스가 오는 시간과 내려야 할 역에 큰 소리로 알려주셨던 도민분. 관광지 한복판에선 느끼기 어려운 정감과 엄마의 손길이 잔뜩이었던 하루였다. 아마 제주도에서 남은 한 주를 우리도 아쉬워하듯 제주도 우릴 향토 경험 속으로 안내하기 위해 황당한 '사계'에 내려주지 않았을까.


시작부터 숨차게 오르기만 하는 9코스를 오후 1시부터 시작해 매운맛을 제대로 맛보고 왔다.

"우리 올레 걷는 동안 사진 한 장도 못 찍는 날이 오겠지?" 시작하며 말했던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더웠고 지쳤고 피로했다. 

도착지까지 3시간 30분. 무더위 아래 우리가 마칠 수 있었던 힘은 결코 고도, 시간, 난이도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를 잘 알고 체력을 안배한 영향이 컸다.  

미리 걸을 길을 공부하고 최선을 다해 쉬는 것. 즐거움을 고난 속에서 찾는 것. 

말도 사진도 힘도 없었던 9코스도 역시 무사히 끝내고 도착지에서 하이파이브를 쳤다. 

배고파 찾은 한식집에서 두루치기와 막걸리를 먹으며 고생한 하루를 격려했다.

두루치기를 좋아하는데 얼마 만에 찾은 식당, 오늘 코스를 오르며 만난 화가 많았던 사람들, 막걸리를 먹으며 생각난 전 팀장 이야기까지 기분 좋게 이야기했고 술잔을 부딪칠 때마다 소리 없는 격려가 느껴졌다. 감사하고 기억남을 오늘이다. 


#5/9

어제 너무 힘들었던 탓에, 오늘은 여유를 가지고 걸어보기로 했다. 이 다짐이 마치 선물을 주는 듯한 하루였다. 여유를 가지자는 마음가짐이 주는 힘을 느끼며 걸었다.

지나가다 꽃이 보이면 사진을 남겼고, 매점이 있으면 간식을 사 먹으며 좋아하는 장르로 노래를 3곡 선곡해 들었다. 잠시 멈춰 머물러야 나눌 수 있는 대화가 있었고, 발도 쉼을 주어 고맙다는 뜻인지 더 힘차게 나아가졌다. 바다가 멋지면 같이 사진을 남겼고 좋아하는 파전이 팔면 들어가 막걸리를 한 잔 했다. 

밖은 뜨거운데 시원한 실내에 앉아야 나눌 수 있는 대화가 있었다. 화장기 없이 땀 흘린 모습이었지만 서로 웃고 있는 오늘을 간직할 수 있어 좋다. 



#5/10 

남은 올레 코스가 단 2개란 걸 알게 됐을 때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매일 많은 일이 있었기에 하루가 빨리 지나갔고 돌아볼 세도 없이 내일모레면 올레길 완주를 눈앞에 두게 된 거였다. 


그동안 책을 읽고 싶어 했던 우리였기에 남은 시간 종이책을 읽어보자며 서점을 찾았다. 

고심 끝에 각자 책을 고르고 계산대 앞에서 사장님과 대활 나눴다.


 "걸으시나 봐요. 책과 걷기는 떼려야 뗄 수가 없죠." 

책방지기가 산행과 걷기, 책을 좋아한다니 비슷한 점이 많은 사람과의 만남이었다. 

오랜만에 종이의 냄새, 지속가능함, 여행자들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반가운 시간이었다.


어제저녁 한 공간에서 각자 휴대폰만 하며 대화가 없던 시간이 있었다. '함께하는 시간이 쌓일수록 더 말이 줄어들겠지'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오늘 이 생각을 공유했다.

오빠는 말했다. "자연스러운 걸 수도 그렇지 않은 걸 수도 있다. 피곤해 보이면 쉬게 해 주면 되고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라며 태연하게 받아주었다. 이런 대화를 한지 얼마 후 방문한 서점에서 선물 받은 굿즈 위의 문구가 인상 깊게 다가왔다. 

'당신과 아침에 싸우면 밤에는 입 맞출 겁니다'


걷는 동안 카페는 잘 가지 않았는데 책을 샀으니 마음먹고 카페에서 읽기로 했다. 이상하게 어떤 곳은 사람이 너무 많아 자리가 없고 어떤 곳은 열지도 않아 실패를 반복하다 '자운당의 문화카페'라는 곳에 들어갔다.

입구부터 물음표가 한가득인 곳이었다.

마당에 들어섰을 때 우릴 반긴 건 닭이었고, 문을 열자 주인도 없이 신비로운 곳이 펼쳐졌다. 멀뚱히 서서 사장님을 찾았다. 

방 같은 공간으로 안내받았고 메뉴판은 없었는데 오미자가 맛있다고 추천을 받아 오미자를 주문했다. 

상담가 재질 한가득이신 사장님은 걷기를 통해 외적내적으로 무얼 얻었는지, 우리의 과목이 무엇인지 궁금해했고 벽에 메모된 아주 취향스러운 글귀들은 빠르게 우릴 공부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상담가셨던 사장님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 때까지 곁에 있어야 한다는 명언과 함께 볼 일이 있다며 우리만 남겨두고 가셨다. 

"걷는 사람은 모두 철학가다." 

인상 깊고 생각하게 만드는 말을 잔뜩 들은 날이었다. 

뜨겁고 긴 여정 끝에 뜻밖의 만남에서 난 힐링했고, 새로운 사람의 삶을 알게 된 게 오랜만인데 즐거웠다. 

서울에 돌아가서도 나만의 의미를 부여하고 갖춰진 삶, 남들과 같은 형식 없이도 느끼고 배우는 삶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최남단 모슬포, 여행이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만남과 신기한 기억을 가져간다. 






우리의 3주 제주살이, 올레길은 이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내려오기 전 싸우면 어쩌나, 다치면 어쩌나, 중도포기하게 될 일이 생기면 어쩌나 했던 고민이 무색하게 역시

우리라서 해낼 수 있었다. 


생각보다 덤덤하게 받고 온 완주인증서는 집 어딘가 고이 꽂혀있다. 

두 달이 지나서야 남긴 이 기록을 포함해 23년 덥지도 춥지도 않은 제주를 같이 느끼고 온 시간은 두고두고 추억해도 소중하고 충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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