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필로마테스 Feb 04. 2023

어느 수학도(數學徒)의 초대

브런치를 시작하며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을 갖기 마련입니다. 저는 주로 이름과 나이, 그리고 직업을 언급하지요. (요즘은 종종 MBTI도 이야기합니다.) 먼저 이름을 말하고, 나이는 새해가 될 때마다 자꾸 헷갈려 몇 년생인지로 대신합니다. 그리고 대학원생이라고 덧붙이지요. 그러면 응당 따라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전공이 어떻게 되나요?"


조금 머쓱한 표정으로 답합니다.


"수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나 하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십니다. 네, 제대로 들으셨습니다. 제 전공은 수학입니다. 역시 응당 따라오는 반응이 있습니다.


"와, 전 고등학생 때 수학이 가장 싫었는데!"




사람들은 왜 수학을 싫어할까. 그 공포는 무엇에서 기인한 것일까. 수학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그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파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행히도 주변의 많은 소위 '수포자'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얼추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수학이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오는 공포와, 아무리 공부해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오는 공포. 이것을 조금 거창하게 기지(旣知)에서 오는 공포미지(未知)에서 오는 공포라 이름 붙여볼까 합니다. 그런 양가적 두려움이 만연한 덕분에, 수학을 사랑하는 이는 항상 낯선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왜 저런 끔찍한 것을 좋아하지? 거참 특이한 사람일세."


그렇다면 저를 포함해 다른 수학도와 수학자분들은 왜 수학을 좋아하게 되었을까요. 이 질문은 앞선 질문, "내가 좋아하는 것을 왜 다른 사람들은 싫어할까"라는 질문만큼이나 어려웠습니다. 좋아하는데 이유가 어딨어? 하지만 그렇게 이 의문을 매듭짓자니 제 자신에게 실망할 것 같았습니다.


나름의 고민 끝에 그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들이 수학을 좋아하는 이유는 다른 이들이 수학을 싫어하는 이유와 놀랍도록 닮아있다고 말입니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며 오는 즐거움과, 아직 모르는 사실을 마주하며 오는 즐거움. 이 역시 기지에서 오는 즐거움미지에서 오는 즐거움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즐거운, 그런 양가적 즐거움이 저를 포함해 많은 수학자들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아닐까.


여기서 작은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어쩌면 수학자들은 특별한 존재들이 아닐 것이라는 그런 희망을.




뷰티풀 마인드라는 영화를 처음 보게 된 것은 초등학생 때였습니다. 자신의 천재성을 입증하려다 오히려 고꾸라져 삶의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존 내쉬의 이야기는 놀랍도록 고대 그리스의 비극을 닮아 있습니다. 영화를 본 어린 날의 저는 '수학자는 모두 미쳐버리는구나'라는 막연한 공포증이 생겼고, 결코 수학자가 되지 않으리라 다짐했습니다. 참으로 우습죠. 세상에 누가 수학자를 시켜준다는 것도 아닌데, 혹시 수학자가 되어버리면 어떡하지 하고 전전긍긍하는 이 어린 소년의 모습이 말입니다. 그런 바보 같은 고집으로 저는 수학을 너무 좋아하지 않기 위해 거리를 뒀고, 대학도 물리학과로 들어가게 되었지요. 존 내쉬의 인생만큼이나 제 인생도 뻔하디 뻔한 고대 그리스의 비극과 닮아있었습니다. 수학자가 될까 봐 수학으로부터 도망치려 안간힘을 썼는데 결국 수학자의 문턱 앞에 선 제 모습이, 참으로 얄궂은 운명의 장난이 아니라면 무엇일까요.


뷰티풀 마인드는 실화를 각색한 이야기지만, 그 외에도 많은 영화나 미디어는 수학자를 '특이한 광인'으로 묘사하곤 합니다. 관심사는 편협하고, 타인과 어울리기를 거부하는 은둔형 외톨이로 묘사되는 경우가 잦습니다. 물론 세상에 그런 수학자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만나본 수학자 중에선 없었습니다. 오히려 평범한 분들이 대부분이었지요. 실없는 농담도 던지고, 어처구니없는 실수도 연발하는. 때로는 질투하고, 어리석은 고집도 부리는. 타인과 소통하기를 원하고, 열정을 공유하기를 바라는. 용서와 화해, 사랑이 필요한 보통의 존재들. 평범한, 너무나도 평범한.


가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어린 날의 제가 '수학자들도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란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더라면. 어쩌면 나는 조금 더 일찍 고집을 거둘 수 있지 않았을까.




제 대부분의 일과는 펜과 함께 합니다. 연습장에 수식과 증명을 써 내려가고, 논문에 밑줄을 긋거나 끄적이곤 합니다. 수학자에게 펜은 의사의 청진기와 같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지요. 물론 의사가 24시간 내내 환자를 보는 것이 아니듯, 저도 잠시 펜을 내려놓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 시간에 타자를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수학자에 대해 '특이하다'라는 인상을 갖고 있는 이유가 사람들이 수학자와 소통할 길이 없어서였기 때문이진 않았을까. 그렇다면 나는 이야기를 나누는 수학자가 되어야겠다. 수를 더불어 글을 풀어내는 수학자가 되어야겠다. 그런 생각으로 타자를 타닥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여기 브런치라는 작은 빈 공간이 있습니다. 이제 이 공간을 도화지 삼아 다양한 생각들로 채워보려 합니다. 어느 수학도의 살아가는 방식, 그가 마음에 품고 사는 것들, 그의 일상과 고민 등. 때론 사변적이고 현학적인 이야기가, 때론 평범하고 잔잔한 이야기가 이 자리에 둥지를 틀 예정입니다.


우리는 타인의 글을 통해 서로가 다른 존재임을 발견하지만, 서로가 같은 존재라는 사실 또한 깨닫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우리가 마음속에 품고 사는 것들이, 우리의 일상이, 그리고 고민이 사실 닮음꼴인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기대감을 동봉해 이 글을 당신께 보냅니다. 어느 수학도의 초대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