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C 버클리 수학 연구소 SLMath 방문기
0.
제가 존경하는 작가님의 책 첫 문장을 비틀어 시작해 보겠습니다.
당연히, 이것은 수기(數記)이다.
1.
학회에 다녀왔습니다. 5년 차 박사과정생에게 학회란 사실 특별한 일은 아닙니다. 코로나 기간 동안 해외 학회는 참석하기 어려웠지만, 미국의 동쪽 끝과 서쪽 끝을 횡단하며 여러 학회에 얼굴을 비출 순 있었습니다.
물론 즐겁지 않은 학회가 어딨겠냐마는, 이번 학회는 즐거움을 넘어 벅찬 경험으로 가득했습니다. 감동과 기억이 휘발되기 전에 글로 남겨야겠단 생각에, 시카고에 돌아오자마자 타자를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2.
이번 학회는 UC 버클리의 수학 연구소 SLMath(구 MSRI)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연구소는 캠퍼스 인근 산꼭대기에 위치해 있는데, 제가 머문 숙소에서는 그리로 가는 교통편이 안타깝게도 없었습니다. 첫째 날 저는 그 산길이 얼마나 가파른지 모른 채 구글맵을 보며 무작정 걸었습니다.
땀이 비 오듯 흘러, 아침 일찍 일어나 만졌던 머리도 맥없이 주저앉았을 즈음에, 멀리서 사진으로만 봤던 건물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미국 내 굴지의 수학 연구소. 4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서부 수학 연구의 메카. 그것을 처음 보았을 때 느낀 감동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델포이 신전을 마주한 어느 그리스인의 심정과 같지 않았을까 가늠해 봅니다. 신탁을 받기 위해 파르나소스 산을 기꺼이 올랐던 그들처럼, 저 역시 다른 수학자들의 가르침을 받고자 시카고에서 오클랜드의 그 산꼭대기까지의 여정을 감내했으니까요.
델포이 신전 앞에 옴팔로스가 세워져 있듯, SLMath 앞에는 천싱선 선생님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미분기하학의 거장이시자, SLMath의 설립자, 그리고 초대 소장직을 맡으셨던 수학자시지요. 그분 앞에 놓인 테이블 위에는 이번 학회 참석자들의 이름표가 알파벳 순으로 나열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논문에선가 읽은 적이 있는 반가운 이름도 있었고, '와 이분이 정말로 오신단 말이야?' 학회의 기대감을 더해준 거장의 이름도 있었습니다. 아무도 못 알아볼 제 이름표를 매처럼 낚아채 목에 걸고 연구소에 입장했습니다.
3.
저도 수학 연구소라는 곳이 처음이다 보니, 마치 도시에 처음 올라온 시골쥐처럼 건물 내 이곳저곳을 둘러보았습니다. 1층에는 수십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강당이 있었고, 샌프란시스코 전경을 감상할 수 있는 휴게실도 있었습니다. 휴게실 벽면엔 연구소와 협력 관계인 전 세계 대학들의 이름들이 빼곡히 걸려있었지요. 또한 한쪽 벽에는 유튜브 골드 버튼도 있었는데, SLMath가 후원하는 수학 채널인 Numberphile의 골드 버튼이었습니다.
2층에는 여러 수학자들의 개인 사무실이 있었습니다. SLMath는 특출난 수학자들을 선별해 한 학기 동안 머물며 마음껏 연구를 할 수 있도록 비용, 환경, 설비를 지원한다고 들었습니다. 덕분에 연구소에 소속된 수학 교수들은 학생들을 가르쳐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그들의 일과는 완전히 자유로운 수학 연구. 수학자들을 위한 낙원이라는 말이 적합한 장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4.
학회시작 15분 전, 사람들이 속속들이 도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들의 무리에 과감히 들어가 인사를 건넸습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수학자들 중에선 유독 내향적인 분들이 제법 있습니다. 그들과 대화를 시작하기 위해선 조금 어색한 소통의 장벽을 극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을 이겨내는 마법의 주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시는 연구가 어떻게 되세요?" 그러면 대부분의 경우 어색하고 뚝딱거리던 모습을 벗어던지고, 격양된 목소리로 자신이 하고 있는 연구가 무엇이며, 최근에 어떤 결과가 있었는지를 열정적으로 설명합니다.
마치 저는 그렇지 않은 듯, 이 특이한 집단의 관찰자처럼 써 내려갔습니다만, 사실 저도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랍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제게 "하시는 연구가 어떻게 되세요?"라고 묻는다면, 저 역시 신나서 말을 쏟아내곤 하지요.
"저는 타원곡선의 환원에 관심이 많아요. 유리수체에서 정의된 타원곡선은 소수 p로 환원할 수 있지요. 그러면 이 환원된 타원곡선이 특정한 기하적 성질을 만족할 확률을 계산해 줄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만약 p에다 특정한 산술적 조건을 내건다면 그 확률이 어떻게 변할까, 그것이 제 주 관심사지요. 관심이 있으시다면 제 최근 논문 결과를 소개해드려도 괜찮을까요?"
5.
수학 학회의 거의 대부분의 일정은 강연입니다. 이번 SLMath의 일정도 다음처럼 요약할 수 있습니다.
강연 - 커피 - 강연 - 점심 - 강연 - 간식 - 강연 - 저녁
학회가 이틀간 진행되니 총 8번의 강연이 있었습니다. 이번 학회의 테마는 디오판투스 기하학이었기 때문에, 최근 이 분야에 흥미롭고 의미가 깊은 논문을 출간하신 젊은 여성 수학자 여덟 분이 강연을 맡으셨습니다. 인종도 언어도 제각각인 여덟 분의 여성 수학자가, 모두 열정적으로 디오판투스 기하학에 대해 설파하시는 모습은 너무나도 멋있었습니다.
스타일은 조금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학회의 수학 강연은 대개 비슷한 기승전결 구조를 갖습니다. '기'에서는 자신의 연구주제가 어떤 역사적 배경이 있는지를 소개합니다. '승'에서는 증명에 필요한 아이디어를 어디서 얻었는지를 언급하지요. '전'에서는 자신의 연구 결과와 증명 방법을 간략하게 설명합니다. 마지막으로 '결'에서는 아직 자신이 해결하지 못한 의문들을 던집니다. 덕분에 학회 강연은 백이면 백 위대한 해답에서 시작해 전인미답의 질문으로 끝납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모두에게 소개하고, 자신이 모르는 것으로 모두를 초대하지요. 제 지도교수님께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건네주신 조언이 있습니다.
어디 가서 20분짜리 발표를 한다고 하면, 처음 5분간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해라. 그다음 5분은 네 연구에 관심 있는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게 해라. 세 번째 5분은 너만 이해할 수 있게 해라. 마지막 5분은 누구도, 심지어 너 자신도,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 Nathan Jones
수학 강연의 또 하나 특이한 점은 질문이 '언제든지' 허용된다는 점입니다. 청중은 언제든지 손을 들어 강연자를 멈춰 세울 권리가 있습니다. 강연자는 그런 청중의 '방해'를 기꺼이 용납하고, 그들의 질문을 성심성의껏 답할 의무가 있지요.
여기에 덧붙여 SLMath는 SLMath만의 재밌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큰 규모의 강연, 특히나 온라인과 병행하는 강연에선, 질문자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애로사항이 있습니다. 물론 스태프분이 돌아다니며 질문자에게 마이크를 건네면 해결될 일이지만, 질의응답 시간이랄 게 따로 없는 수학 강연의 특성상 실행하기 어려운 방법이지요. 대신 SLMath는 Catchbox라는 이름의 던질 수 있는 쿠션형 마이크를 구비했습니다. 질문이 있다면, 그 쿠션을 들고 질문하고, 다음 질문자에게 던져줘야 하지요. 덕분에 강연 중간중간에 녹색 쿠션이 강당을 날아다니는 진풍경이 연출됩니다. 누군가는 메이저리거 뺨치는 훌륭한 제구력으로 정확히 다음 질문자의 손에 안착시키는 반면, 누군가는 전혀 다른 데다 던져 웃음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20대의 젊은 대학원생도, 70대의 노교수도 마이크 앞에서 모두 어린아이처럼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 되는 것이 참으로 귀여웠습니다.
6.
첫 강연이 끝나고 우연히 제 뒷자리에 타원곡선과 암호학의 거장인 조셉 실버맨 교수님께서 앉아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곧 일흔을 앞두신 브라운 대학의 수학 교수로, 타원곡선을 연구하는 거의 모두에게 은인과 같은 분이시죠. 그분이 집필하신 타원곡선 교과서는 내용도 훌륭하지만 쉽고 친절하게 쓰여, 지난 수십 년간 타원곡선계의 경전처럼 쓰여왔거든요. 저 역시 실버맨 교수님의 교과서 덕분에 타원곡선을 심도 있게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제겐 실버맨 교수님과 특별한 인연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바로 그분이 제게 타원곡선이라는 것을 처음 알려주신 분이셨지요. 저는 대학교를 미네소타의 작은 시골에서 다녔습니다. 거기에 제가 제일 좋아했던 정수론 교수님께서 어느 날 자신의 지도교수님을 강연차 초청하신 적이 있었지요. 그분의 지도교수는 그 작은 시골 학교까지 기꺼이 찾아오셨습니다. 예상하시다시피 그분이 바로 실버맨 교수님이셨고 저는 그 강연을 듣던 대학생이었습니다. 물론 강연의 주제는 타원곡선이었지요. 강연을 통해 타원곡선에 대한 동경이 피어올랐고, 이제는 그것을 연구하는 대학원생이 되었습니다.
실버맨 교수님께 다가가서 인사를 건네드렸습니다. '교수님께서 그때 저희 학교에 오셔서 타원곡선에 대해 강연해 주신 것을 듣고, 저도 이제 그것을 연구하는 대학원생이 되었습니다.' 실버맨 교수님께서는 굉장히 반갑게 맞아주시며 제 지도 교수가 누구인지 여쭤보셨습니다. 'UIC의 네이선 존스 교수님이십니다.' '아 네이선이구나, 알고 말고.' 교수님, 그 말씀 한마디가 어찌나 큰 영광이었는지요.
7.
그 외에도 정말 감사하고 소중한 인연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박사 초년생, 졸업을 앞둔 박사생, 박사 후 과정생, 초임 교수 등, 다양한 커리어의 분들과 함께 서로의 의문과 열정을 공유하는 귀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때로는 공통 지인을 발견해 반가워하기도 하고, 때로는 각자의 연구에 의외의 공통점을 발견해 영감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런 꿈과 같은 시간을 보내고 시카고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SLMath가 왜 훌륭한 수학 연구소일까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시설이 좋아서? 경치가 아름다워서? 재정이 많아서? 물론 그것들도 SLMath가 가진 장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습니다. 무엇이 그것을 훌륭한 수학 연구소로 만들었을까. 바로 그곳에 수학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그들을 교류하게 해 줬기 때문에 SLMath가 훌륭한 수학 연구소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수학자들은 직업의 특성상 혼자만의 외로운 시간을 많이 보내야 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골방에 틀어박혀 기나긴 증명과 씨름합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강대한 적과 치열하지만 조용한 전투를 치릅니다. 그 외로운 전장에 스스로를 내던지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만큼 수학이 아름답기 때문에. 또 다른 하나는 그러한 노력을 알아주는 다른 수학자들이 있기 때문에.
고작 이틀간의 짧은 학회였지만, 많은 선물을 한 아름 받고 돌아온 기분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해서 등한시했던 소중한 진실을 재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수학자에게 필요한 것은 또 다른 수학자이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또 다른 사람이듯 말입니다.
∞.
서두와 마찬가지로, 제가 존경하는 작가님의 책 마지막 문장을 비틀어 매듭지어보겠습니다.
지난날의 학회는 이제 그 기억뿐. 나에게 남은 것은 그 소중한 기억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