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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d Sep 16. 2019

붉은 여왕의 세계 속 여유

♪peppertones - New Hippie Generation

세상은 넓고 노래는 정말
아름다운 것 같아
인생은 길고 
날씨 참 좋구나



♪peppertones - New Hippie Generation


세 달 반 정도 남은 2019년을 지내며 내 삶을 가장 관통하고 있는 하나의 용어는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에 나오는 '붉은 여왕의 세계'이다. 작중 붉은 여왕의 세계는 계속 달려야만 하는 세상이다. 그래야 제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 붉은 여왕은 이 세상에 대해 앨리스에게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 


" 여기선 같은 곳에 있으려면 쉬지 않고 죽어라 달려야 하지. 다른 곳에 가고 싶다면 그 보다 두 배는 더 빨리 달려야 하고. "





조직이라는 세상에서 십 년을 달리는 동안 많은 '탈락자'들을 보아왔다. 미안하다. 정정하자. 그들을 탈락자라 부를 수는 없다. 그들은 뛰었다. 열심히도 뛰었다. 하지만 이 세상의 속도는 그들의 발걸음보다, 뜀박질보다 빨라, 그들을 느리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나 역시도 그들보다 빠른 건 아니었지만 그저 꾸준히 달려서 세상의 끄트머리에라도 매달릴 수 있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뛸 수는 없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솔직하게 올해의 나는 게을렀다.  나도 사람인 걸.

 




귀신처럼 그렇게 잠깐 멈춰 선 시간은 나를 세상의 뒤로 가게 만들었고, 어느샌가 나는 다른 사람들을 앞에 둔 채 더 뛰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니까, 멈춰 섰다의 기준을 다시 하도록 하자. 이 곳은 앞서 말했듯 '붉은 여왕의 세계'와 몹시 닮아있었다. 나도 뛰었다. 그렇지만 결국엔 제자리였다는 말이다. 


누구의 잘못도 없었다. 굳이 잘잘못을 논하자면 다른 사람들보다 느리게 뛴 내 탓을 해야 할까, 도돌이표 같은 이 세상을 탓해야 할까. 세상을 탓하기엔 보잘것없는 개인이라 내 탓을 하기로 했다. 언젠가도 말했다. 다수의 집단과 개인의 의견이 상충할 때는 높은 확률로 개인의 탓이다. 비겁한 변명이지만, 세상은 그렇게 이루어져 있으니까. 그렇게라도 위안을 삼아야 한다. 개인은. 






그렇게 멈추어 서서 약간의 여유를 가지고 바라본, 조그마한 조직이라는 세상 바깥은 우습게도 생각보다 여유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만나는 사람들의 면면이 그러했다. 어, 이상하다. 연휴에 대부분의 시간을 호텔의 구석에 있는 방에 박혀 있었는데, 잠깐잠깐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표정들도 하나같이 밝기 그지없었다. 나의 현실을 깨우쳐주는 사람들의 표정도 밝았다. 다들 이런 미친 듯한 세상에서 미치게 뛰어도 여유로운 걸까.  이즈음 되면 정말로 내 탓이 맞다. 그렇게 무언가 무력해지는 기분을 하루 내내 느꼈다. 






백세 인생이라고들 하는데, 그러니까 그 긴 생에서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살아보겠다고 이제야 발걸음을 조금 멈추었을 뿐인데, 내 잘못인 건 알겠지만 억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9월 중순인 주제에 하늘은 이미 가을 하늘인데 햇볕은 아직 여름의 온도를 띄고 있었다. 왜 날씨는 또 와중에 좋고 그래.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좋은 기분에 결국엔 혼자 볕이 안 드는 골목 한 구석에서 울었다.   






새삼 울음을 그치고 이동하는 택시에서 하늘을 보아하니 적당히 불그스레한 하늘 아래로 이것저것들이 느릿하게 흐르고 있었다. 무언가 오늘 내내 느꼈던 감정과는 상반된 풍경에 조금 어질어질하기까지 했다. 택시는 무엇이 그리고 급한지 연신 빵빵거리며 나를 목적지로 데려가고 있었다. 나를 태워서 그리 빠르신 건가요.  


" 기사님, 그냥 천천히 가주셔도 괜찮아요. " 


그렇게, 혼자서 조금만 모든 것들이 천천히 흐르길 기도했다. 그래도 괜찮아지기를 바랐다. 조금 더 이 기분을 온전히 느끼고 싶었다. 더 이상 뒤로 삶이 흐르지 않기를. 그러니까, 오늘은 올해 들어 정말로 괜찮지 않은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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