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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emprendo Aug 28. 2024

행복한 라짜로

[영화롭게 3] 그것은 선한 사람의 냄새였다.

저들은 개돼지나 마찬가지야.
풀어주면 자신들이 비참한 노예임을 알게 되지.
저 애를 봐.
난 농부들을 착취하고 그들은 저 애를 착취하지.   


약간의 근대성은 엿보이지만, 봉건적인 곳, 너무 순수해서 외부 사람은 감히 들어오지 못할 것 같은 이탈리아 외딴 마을, 동네 청년의 구혼으로 신나는 음악이 퍼지고 빈약한 파티가 벌어진다. 그런 중에도 세상과 동떨어진 눈빛과 표정의 한 청년은 사람들의 부탁을 들어주느라 바쁘다. “라짜로, 라짜로, 라짜로...”  그 이름에는 명령과 괴롭힘, 놀림이 묻어있다.      


송아지 눈망울에 헝클어진 곱슬머리, 축 처진 듯 둥근 어깨지만 다부진 몸, 착함이 뚝뚝 묻어나는 손짓을 가진 그는 가혹한 환경 속에서도 친절을 잃지 않는다. 남을 판단할 줄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그 호구는 찡그림 하나 없이, 끝없이 사람들의 요구에 응한다. 아니 복종한다. 그것도 열심히 아주 정성껏.    

  

이쯤 되면 복장 터지면서 역설적인 제목일 거란 생각이 든다. 그러나 금방 깨닫게 된다. 지배구조 속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불쌍한 바보가 아니라, 그 구조를 초월한 행복한 라짜로라는 것을. 선한 일을 하는 것과 선한 사람은 다르다. 그는 본질이 착한 사람, 그래서 행복한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후작 부인의 담배 농장에서 착취를 당하는 50명의 소작농은 아무리 일해도 남는 건 빚뿐이다. 그들은 이미 끝난 농노제에 갇혀 살지만, 그래서 더 단순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같다. 그렇게 후작 부인은 그들을, 그들은 라짜로를 부리며 살아간다. 그러다가 후작 부인의 아들 탄크레티가 요양을 오면서 라짜로는 그의 삶에서 가장 위대한 경험, 우정을 알게 된다. 물론 라짜로에게만 소중한 우정이었지만. 어쨌든 그 결과 경찰이 마을 발견하게 되고,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개울을 건너게 된다. 열병에 시달리다 섬망으로 절벽에서 떨어진 라짜로만 빼고, 말이다.


출처: 네이버


그들은 도시로 나왔지만, 목가적인 삶 속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계곡 마을이 더 에덴 같다. 안타깝게도 농촌의 빈곤은 도시 빈곤으로 이어지고 그들의 삶은 이제 대놓고 비참하다. 뒤늦게 도시로 나온 라짜로는 자신과 달리 늙고 비뚤어지며, 냉소적인 삶을 사는 마을 사람들과 재회한다. 그의 시간은 멈춰있었다. 예전 모습 그대로 나타난 그는 차가운 도시 생활에 당황할 만도 하건만, 그의 순수는 그 무엇에도 훼손되지 않는다. 그렇게 먹이사슬 최하단에 있던 라짜로만은 여전히 행복하다. 그런 와중에도 우정을 나눈 탄크레티를 찾아다니고, 그의 거짓말은 상관없다는 듯 기꺼이 그를 돕고자 한다. 그리고 결국 그는 사람들에게 짓밟힌다. 그리고 그런 성자를 알아보는 건 늑대뿐이다.




이 영화는 처음에는 복장이 터지다가 점점 마치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라짜로에게 빠져든다. 이탈리아의 어두운 역사를 조명하고 그런 봉건주의 잔재가 오늘날에도 남았음을 깨닫게 된다. 또한 사회 불평등과 착취를 비롯해 인간의 선악의 본질, 희생과 연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영화, 뭔가 비현실적으로 감동적이지만, 동시에 왠지 모르게 불안하며, 환상적인 요소들이 곳곳에 상징을 만들어낸다. 그를 둘러싼 현실이 비참하지만, 그의 솔직함과 순수함이 유지되는 걸 보면 결국 더 인간적인 미래를 상상하고 그것을 향해 노력할 수 있다는 믿음마저 갖게 한다.  


이탈리아에서 계속 좋은 작품을 내는 여성 감독 알리체 로르와커는 이 영화로 2018년 칸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았고, 2014년에는 칸에서 <더 원더스>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전문 배우가 아닌 주인공을 캐스팅한 것만 봐도 감독이 얼마나 예리하고 역량이 있는지 짐작된다. 게다가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총괄프로듀서 참여했다니 그녀의 다음 작품들이 더더욱 기대된다.

참, 생소한 배우들 사이에서 반가운 이가 있었는데, 바로 후작 부인, <인생은 아름다워>의 도라였다!

    

     


[Zoom in]

- 음악이야! 우릴 따라오고 있어!

- 그가 가졌던 재산 전부를 돌려주시면 좋겠어요.

- 과자 주고 갈 생각이 없나요?

- 온갖 하찮은 잡초를 다 아는 라짜로와, 그걸로 요리하는 사람들

- 개울을 쉽게 건너지 못하고 망설이는 동네 사람들     

     


[음악]

영화는 음반을 보니 피에로 크루시티(Piero Crucitti) 참여가 많은데, 좀 생소한 이름이다.

살펴보니 감독의 영화인 <더 원더스>, <키메라>, <행복한 라짜로>만 작업했다.

개인적으로는 라짜로가 친구와 수로를 걷는 장면에서 흐른 바흐가 인상적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XnRl6VHzjI     

Book I: Prelude and Fugue No. 8 in E-Flat Minor BWV 853 by Johann Sebastian B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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