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24장 15절
광야는 물이 부족하고 사람이 살지 않는 거친 들판이다. 그래서 이곳에는 주로 승냥이와 들염소가 산다. 그나마 엔게디 광야는 골짜기에 물이 흐르고 주위에 종려나무들이 자라기 때문에, 가끔 목동들이 양무리를 끌고 와서 물도 마시고 풀도 먹인다. 그곳 염소 바위가 있는 길가에는 커다란 굴이 있는데, 안쪽이 깊고 컴컴해서인지 숨으러 들어오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그 안에는 수많은 비밀이 쌓여있다.
오늘도 누군가 찾아오지 않을까 기다리고 있었는데 방금 한 무리가 내 안으로 급히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깊은 곳에 몸을 숨겼다. 자세히 보니 사울 때문에 쫓겨 다니는 다윗과 군사들이었다. 소문에 따르면 다윗은 아무 죄도 없는데, 사울 왕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는 백성들의 노래를 듣고 그를 죽이려고 한다고 한다. 물론 백성들이 사울보다 다윗이 더 훌륭하다고 하니 사울이 화가 날 만도 하다. 그런데 그런 그가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는 걸 보니 금방 뭔가 큰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안감이 밀려왔다.
조금 지나자 수천 명의 발자국이 땅을 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 사람만 내 안으로 들어와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일을 보러 온 것이다. 내가 화장실 노릇이나 하려고 여기에 있는 건 아니지만, 자연의 섭리를 어찌 막겠는가. 그런데 이게 웬일, 자세히 보니 사울 왕이다!
그때 저 깊은 곳에서 다윗의 군사들이 아주 작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물론, 사울 왕에게 들릴 정도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내 안에 있으면 모든 소리가 크게 울린다고 생각하지만, 오해다. 나는 가능하면 사람들의 비밀을 철저하게 지켜주기 때문이다.
“빨리, 지금입니다. 하나님이 분명 기회를 주신 거예요. 빨리 행동으로 옮기세요. 지금이 적기라고요!”
다윗 옆에 있던 사람이 그를 밀어붙였다. 자세히 들어보니 다윗은 사울에게 억울하게 쫓기는 중이었다. 정말 그렇다면 내가 봐도 가장 사울을 공격하기 좋은 순간이었다. 나도 내 몸에 피가 묻는 건 질색이지만, 꼭 필요할 때는 잘 참는 편이다.
“자 얼른 지금이야!”
나도 너무 안타까워서 다윗에게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 말을 들었는지, 그가 칼을 들고 살금살금 사울에게 다가갔다. 나는 순간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사울의 겉옷만 조심스럽게 베어내고 다시 물러섰다.
‘지금 뭘 하는 거지?’ 나는 너무 혼란스러워졌다. 게다가 사울에게 직접 칼을 들이댄 것도 아닌데 뭔가 너무 불편해 보였다. ‘이 사람이 정말 수많은 전쟁에 나간 그 다윗인가?’ 나는 그의 소심한 행동에 울화통이 터졌다. 다행히도 같이 온 무리가 사울을 죽이겠다고 칼을 들고 준비하고 있었다. 큰 싸움이 벌어지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무리에게 돌아온 다윗의 입에서는 예상치 못한 말이 나왔고,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여호와께서 기름 부은 자를 치는 것은 여호와가 좋아할 일이 아니요. 절대 그를 해쳐서는 안 됩니다.”
무리는 그의 말이 못마땅했지만, 결국은 그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아무것도 모르던 사울은 일을 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왜 다윗은 자기도 위험한 상황에서 원수를 살려준 걸까? 누가 봐도 이 복수는 정당했다. 하나님도 그의 편인 게 틀림없었다. 용기가 부족한 건 아닐까? 자기 때문에 함께 도망 다니는 사람들 생각은 안 하는 걸까?’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그런데 갑자기 다윗이 굴에서 다급하게 나가더니 사울의 뒤에서 소리치기 시작했다. 웬 뒷북이란 말인가. 그래도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다. 하지만 그는 갑자기 그를 향해 땅에 엎드려 절하더니 베어낸 겉옷 자락을 흔들며 말했다.
“이것은 왕의 옷자락입니다! 저는 이것만 자르고 왕은 죽이지 않았습니다! 비록 왕은 저를 죽이려고 찾아 헤맸으나 저는 왕을 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음을 왕은 이것으로도 아실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기름 부은 자라도 내 목숨이 위험한데? 내가 죽을 수도 있는데? 그의 행동을 생각하면 할수록 내 머릿속은 내 속보다 점점 더 깜깜해졌다. 그런데 그순간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한 마디에 내 모든 의문이 단번에 풀렸다.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아, 그는 이 싸움의 재판장이 될 생각이 없었던 거다. 그는 가장 공정한 재판장께서 이 일을 해결해줄 것을 온전히 믿고 있었다. 그제야 나의 어지러웠던 마음이 진정되었다. 그렇게 조용히 그의 말을 듣고 있는데, 갑자기 사울이 울며 큰 소리로 다윗을 칭찬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다윗에게 왕이 되어 이스라엘이 견고해질 거라며 축복까지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음의 선 앞에서 서로 칼을 겨두던 사이었는데…. 하나님은 공정하실 뿐만 아니라, 가장 빨리 일을 해결하시는 재판장임이 틀림없다. 이렇게 순식간에 모든 상황을 정확하게 해결해 주시다니! 그렇게 나는 오늘 중요한 삶의 비밀을 또 하나 간직하게 되었다.
사무엘상 24장 15절-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심판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