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6장 25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지도 백 년이 훌쩍 넘었다. 지도자인 여호수아도 죽고 백성들은 지파별로 주어진 땅을 차지하려고 가나안 족속들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심지어 그곳 사람들과 살면서 그들의 우상을 같이 섬겼고,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 그러자 서쪽 바닷가에 살던 블레셋 사람들이 공격했고, 남쪽 사막에 살던 미디안 사람들이 메뚜기 떼처럼 올라와서 사람들을 죽이고 곡식을 뺏어갔다. 너무 고통스러웠던 백성들은 다시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들의 울음을 들으시고 이들을 구원할 선지자를 세우셨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기드온은 이스라엘 백성을 끈질기게 괴롭히는 미디안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던 그 날을 잊을 수가 없었다. 므낫세 지파에서 가장 약하고 가족 중에서도 가장 보잘것없는 자신을 용사라고 불러주던 천사의 음성이 계속 귓가에 맴돌아서 눈물이 쏟아졌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로 결단하고 어둑한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열 명의 종을 끌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그날 아침 바알의 제단은 헐리고 아세라 목상은 찍혀 있었다.
“어젯밤엔 정말 완전 공포의 도가니였어. 우리가 어쩌다가 이 꼴이 된 거니….”
다 부서진 바알의 제단이 벌벌 떨며 말했다.
“나는 도끼로 찍히는데 너무 아파서 비명도 안 나오더라. 온몸이 산산조각이 나는 걸로도 모자라 일부는 잿더미로 변….”
다 부서진 아세라 목상은 말을 끝내지 못할 정도로 여전히 공포에 질려있었다.
“헉, 나무 조각들을 챙겨 가더니 태우려는 거였어? 정말 잔인하네.”
“응, 저 위에서 새로 제단을 쌓고 7년 된 수송아지로 번제를 드린다고….”
“우리가 좋다고, 와서 절하고 빌 때는 언제고…. 그것도 밤에 몰래 몰려와서는.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어딨니? 그래도 우리가 명색이 인기 많은 신들인데 정말 체면 다 구겼지 뭐야.”
“그래도 너무 절망하지는 말자고. 이 사람들은 가나안 사람들이 하는 걸 그대로 따라 하니까 언젠가 우릴 또 찾을 거야.”
“그건 그래. 그동안 너랑 나랑 부부라고 부르면서 얼마나 우리를 지극정성으로 섬겼니.”
“근데 이 사람들은 원래 하나님을 섬긴다던데, 우리를 같이 섬겨도 되는 거야? 솔직히 난 그게 늘 궁금했어. 하나님은 다른 신 섬기는 걸 아주 싫어한다고 들었거든. 그래도 둘 다 잘 섬기는 건 괜찮은 건가?”
“내 생각엔 사람들이 우리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 하나님은 눈에 안 보이는데, 우리는 보이잖아. 게다가 우리가 건강하고 부자로 잘살게 해 준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으니까.”
“그래도 이렇게 우리를 부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장담 못 할 거야. 다른 곳에 있는 식구들도 몸조심해야 할 텐데.”
“그나저나 기드온은 무슨 자신감에 이런 일을 저지른 거지? 여긴 자기 아버지 제단이잖아. 아버지가 무섭지도 않나? 여기 자주 오던 동네 사람들은 또 어쩌고. 근데 난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솔직히 불길하긴 했어.”
산산조각이 난 아세라 목상이 말했다.
“왜? 기드온이 무슨 뜻인데?”
“나무를 베어 쓰러뜨리는 사람이라나 뭐라나.”
“헉, 진작에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근데 같이 온 열 명의 종이 하는 소리를 들어보니까, 이거 다 하나님이 직접 명령한 거래. 우리가 아는 기드온은 그렇게 용감하지 않잖아. 미디안 사람들이 무서워서 포도주 틀에서 몰래 밀을 타작하던 걸 내가 봤거든. 그래도 하나님은 뭘 보셨는지 그를 용사라고 부르셨다던데?”
“용사? 에이 설마….”
“암튼 사람들이 아침에 우리가 망가진 꼴을 보고 화를 내는 걸 보니 그나마 위로가 좀 되더라. 어떤 사람은 우리가 부서졌다고 엄청나게 울더라고. 누가 그랬냐고 소리소리 질러서 내가 기드온이라고 크게 말해줬지. 들렸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자기들끼리 소곤거리다가 그의 아버지 요아스한테 몰려갔어.”
“근데 안타깝게도 그의 아버지는 우리 정체를 알고 있었던 것 같아. 아니면 의심하고 있었던 걸까? 사람들이 기드온을 죽이려고 달려드니까, 바알이 직접 자기 아들이랑 싸우게 두라고 하더라고. 우리가 아무 힘이 없다는 걸 알아챘나 싶어서 가슴이 철렁하더라고. 어쨌든 내가 그냥 나무 조각일 뿐이라는 걸 확실히 알았겠지. 아무튼 아들을 이렇게 살려내다니 대단해.”
“그나저나 지금 미디안과 아말렉, 동방 사람들이 함께 요단강을 건너서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친 모양이야. 기드온이 거기에 나갔다는데?”
“7년이나 미디안에게 당하면서 벌벌 떨며 살았는데 이길 수 있겠어?”
“참,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이렇게 당하고 사는지는 너도 알지?”
“알지…. 7년간 미디안의 종처럼 지낸 이유가 우리 때문이잖아. 하나님보다 우릴 더 사랑해서. 사람들이 우릴 외면할까 봐 이 비밀은 평생 가져가려고 했는데, 기드온 때문에 다 망쳤지 뭐야.”
“그나저나 그날 밤에 왔던 사람 중 한 사람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데, 하나님이 기드온을 통해서 사람들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할 거라고 했대. 그 증거로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바위 위에 올린 고기와 무교병을 태웠고, 그 기념으로 제단도 쌓고.”
“아, 그거 때문에 ‘여호와 살롬’이라는 제단을 쌓았다는 거구나. 무슨 제단을 쌓았다고 들긴 했는데, 뭔가 했네.”
“그럼 뭐 저 싸움은 보나 마나 뻔하네. 그러고 보니 기드온이 정말 큰 용사인가 봐.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없어져야 일하시는 모양이고. 그것도 이렇게 처참하게 부서뜨려야 말이지.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미워하시는 것 같아. 우리랑은 절대 함께할 수 없는 분이야.”
“너 그거 모르는구나? 아주 예전에 하나님을 위한 제단 옆에 날 세우지 말라고 명령을 했다는 소리는 들었거든. 그래서 내가 늘 몸조심을 했던 건데….”
그순간 갑자기 산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그리고 산산이 부서진 아세라 목상의 나무 조각들이 조금씩 바람에 날리기 시작했다.
[사사기 6장 25절] 그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버지에게 있는 수소 곧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끌어 오고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