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코코슈카 Feb 25. 2021

부모의 parenting에 대하여 감히 이야기하자면.

다분히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에 대한 이야기


대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1년간 휴학을 하고자했을 그때부터, 나와 아빠 사이의 갈등과 어긋남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어렸을 때부터 이미 아빠의 초강력한 승질을 겪어왔지만, 대학생이 되고 본격적인 독립생활을 하면서, 한 성격했던 나도 내 의견과 생각대로 결정하고 추진하고자 하는 바를 부모에게 말하고 존중해 줄 것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을 조금씩 실천해가고 있었다.


아직 부족하지만 나름의 경험과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나의 관점에서 감히 바라보는 아빠는 인격적으로 굉장히 성숙하지 못하고 상대방에 대한 기본적인 헤아림과 이해를 하는 것이 미숙한 사람이다. 어렸을 때는 아빠의 심기를 건드리거나 화를 돋구는 일이 생길까 그저 무서워 되도록이면 큰소리나는 일이 일어나지만 않도록 최대한 신경에 거슬리는 일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휴학에 대한 아빠의 불같은 반대와 마주치고는 어릴적 아빠의 화에 대한 무조건적 반응에 잠시 뒷걸음질치며 두려운 마음이 들었지만, '하고싶은 건 해야하는' 성격을 그 누구도 아닌 아빠에게서 물려받은 성인이 된 나는 반대를 무릎쓰고 내 의견을 관철시켰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불협화음은 대학졸업 후 입사한 직장에서 2년 근무 후 퇴사를 결정했을 때, 인도여행에서 돌아와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를 가겠다고 했을 때, 국제 NGO에 근무하며 개도국으로 잦은 출장을 다닐때마다, 그리고 회사를 그만두고 100일간 떠났던 유럽여행 중 안부전화를 걸때마다 반복됐고, 시간이 흐르면서 결혼을 안하고 있는 것에 대한 불만이 더해져 짐작컨데, 근본적으로 나에 대한 미움과 맘에 안듦이 그 안에 자리잡고 있어왔을 것이다. 반면에 나는, 아빠의 반대와 그로인한 상처들에도 불구하고 내가 원하는대로 내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두려움 없이 부딪히고 스스로 겪어내고 배우며 성장해왔다. 아빠가 요구했던 "남들처럼" 사는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호기심과 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들을 책임감있게 해왔고, 그 여정에서 만난 사람들과 또 경험과 배움을 통해 "괜찮은 사람,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동기부여와 도전을 받아왔다. 그러한 많은 것들이 쌓이고 축적돼 나를 더 잘 알게되고, 그런 스스로에게 조금은 자신감있어졌고, 누군가에게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하는 것이 시시한 이야깃거리만은 아닌 것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서른이 넘어 석사과정을 위해 유학을 가겠다고 했을 때는 희한하게도 반대에 부딪히지 않았고, 이제 나를 어느정도 포기하고 받아들였나보다 했다. Flo를 만난 후 한국에 있었던 동안 한두번 빈으로 장기 방문을 갈 때에도 외국인이어도 이제 연애 중인 것에 대해 만족한 건지, 나이든 딸의 의사결정을 그저 존중하기로 한건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갈등관계는 잠시동안 평화의 시기를 가졌다.


독일 유학을 기점으로 나는 더이상 당분간은 한국에 살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했고, 졸업 후 본업인 국제 NGO로 재취업을 하면서 현장사무소에서 근무를 했다. 연차와 대체휴가를 꽉꽉 모아 매년 여름휴가는 이탈리, 성탄절은 빈와 독일을 방문했고, 이런저런 상황으로 어쨌든 한국도 1년-1년반에 한번씩은 갈일이 생겨 이쪽저쪽과 어느정도 선에서 타협점을 찾아 발란스를 맞추려 노력했다. 부모님과 거리를 두고 가끔 한번씩 만나는 생활을 유지하면서 지난날의 껄끄러움이나 미움은 표면적으로 사라진듯했고, 기술의 발달로 아쉬울 것 없는 영상통화로 서로가 잘지내는 것을 확인하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덕분에 평화의 시기와 내마음의 평화도 유지되는 듯했고, 이는 내가 한국에서 살지 않으려는 목적의 일부가 성사된 셈이다.

다만 통화를 할때마다 아빠는 거의 매번 한국에 언제오는지, 이번에 오면 앞으로는 부모님 옆에서 가까이 살라고 하는 등 이유를 알 수 없는 요구를 자꾸했다. 왜 이유를 알 수 없는가하면, 나는 아빠가 원하는 방식대로 살 수 없으며 그럴 계획이 없다(이유도 없지않나). 때문에 그런 내가 맘에 안들어 아빠는 나에게 잘해주지 않을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가까이 살면 계속해서 싸울 수 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해도, 아빠는 사실 내게 큰 관심이 없다 -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지, 어떤 가치관과 계획을 갖고 있는지, 심지어 내 생일도 기억못하니까. 그러니 나로서는 뭣때문에 날 옆에 붙잡아두고 살지못해 안달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고, 이건 순전히 자식인 나를 본인이 원하는대로 통제하고 싶은 욕구를 성취하고자 함에 불과하다(고 판단한다).


작년, 라오스에 사는 동안 Flo와 우리의 미래에 대한 계획과 합의를 한 상태였기 때문에 코로나로 인해 시기적으로 불확실성과 변동이 생겼을 뿐이지, 회사와 최종 합의한 계약종료일에 맞춰 한국으로 귀국을 하는 것은 빈으로 이주를 하기 위해 정리 및 가족/친구과의 시간을 보내기 위함이었다. 때문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얘기를 할 때마다 난 Flo와 살기위해 빈으로 갈것에 대해 계속해서 주지시키려 노력했다. - 결과적으로 효과는 없었지만.

한국에 머물렀던 한달반 중 진정으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2주간의 자가격리였다.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이 따끈따끈하게 유지된 채 서로간의 거리를 유지하며 적당히 간섭(당)하며 내 공간과 시간을 온전히 가질 수 있었던 그 때가 정말로 좋았다. 라오스에 있을 때부터 같이 가야한다며 본인의 계획을 몇번이고 얘기하던 캠핑트레일러 여행에 부응해드리기 위해 자가격리 후 그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일정을 빼 휴가를 썼다. 지난 평화의 시기동안 방심하고 있었던 나는, 여행 중반을 넘어서며 만나면 부딪히는 우리의 관계가 변하지 않았음을 재확인했고, 갈등의 시간이 다시 찾아왔다는 것에 대한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부모님과 캠핑에서 돌아오자마자 다음날부터 아빠의 화가 폭발했고, 객관적으로 말이 전혀되지 않고 논리가 통하지 않는 이유를 시작으로 나의 말과 행동에 대한 불만이 더해지고, 여기에 이성적으로 최대한 성인의 대화를 나눠보겠다고 설득이란 것을 하고 있는 내가 꼴같지않게 더 미워져 그 화가 증폭되었다. 보자보자해도 너무 화가나 순간 어쩌면 하지않았어도 됐을(결국 본전도 못찾을) 말을 뱉어버렸고, 그로써 난 더이상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생각했다. 엄마에게만 더 미안한 일을 만들어버린 꼴이 돼 미안함에 눈물이 펑펑 났고.


미움이란 감정도 더는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미 어렸을 때부터 한창 갈등이 반복되던 때 받았던 상처와 아픔도 신앙 안에서 잘 치유받고 스스로 영혼과 정신을 강하게 다스려가며 헤쳐왔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냥 이렇게 부모-자식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구나, 안보고, 상관안하고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그러고싶었고 그러라면 그럴 셈이었다.만약 저런 성격과 인성을 가진 사람이 직장이나 주변에 있다면, 내 인생에 발도 들이지 못하도록, 어떻게든 얽히지 않도록 미련없이 관계를 끊었을텐데 가족이고 부모이기 때문에 그게 쉬운 일은 아니라 생각되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꼭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의 변화가 찾아왔다.


나를 만들고 나아주시고 키워주신 부모이지만, 부부의 선택으로 자식을 낳고 자발적으로 만든 생명에 대한  책임을 진 것이며, 자녀는 그 부모가 양육의 책임을 잘 감당해주신 것에 감사하는 마음가짐으로 각 자녀의 위치에서 할 수 있고 하고자하는 방식의 보답을 하면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아주 간단히 말하면.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만하면 정말 훌륭한 정신상태를 가지고 잘 자라왔다고 생각하고 나 또한 부모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 역량으로 할 수 있는- 할만한 것들로 도리를 해왔다. 그것이 받는 사람에 따라서는 기대치에 못미치거나, "넘들보다" 못한 수준인 것처럼 여겨질 수 있겠지만, 그 기대치는 합의된 사안이 아닌 일방적이고 또한 개개인의 성품과 주변의 영향을 주는 여러 요인들에 따라 형성된 그 무엇이기에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그 자녀가 충분한 성인의 나이가 되었을 때 "성인"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즉 자신의 인생에 대해 스스로 고민하고 또 결정하고 그에 따른 결과를 직접 겪고 또 책임을 지는 것을 지켜봐주고 지원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아가 부모로서 가지는/원하는 바람과 기대는 부모자신의 것으로 남겨두고, 자녀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에 대해 묻고, 그 나아가고자 하는 길에 집중하고 힘을 쏟을 수 있도록 응원하고 격려해주는 자세가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부모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자신의 인생을 계속해서 살아가고, 또 어느덧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자녀를 "내 새끼, 내 자식"만이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 성인으로 바라보며 같은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음에 대한 새로운 즐거움을 느끼고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앞서 산 인생에서 발견하고 배운 많은 교훈과 깨달음을 자녀와 지혜롭게, 또한 즐겁게 나눌 수 있는 자세, 그리고 그 삶에서 얻은 노련함과 센스들을 자녀에게 때로 선물같이 안겨줄 수도 있는 부모가 되면 더욱 좋겠다. 어느 시점이 되면 부모는 항상 자식으로부터 마땅히 받아야만하고, 자식은 늘 부모에게 뭔가를 계속해서 (해)드리지 않으면 안되는 관계가, 심지어 전화도 먼저 드려야하는 쪽과 기다리고 있는 쪽이 명확히 구분돼있는 이런 관계가 특히 한국사람들 머릿속에 왜 형성되어있는지 난 잘 모르겠다.


셀수없이 많은 사람, 경험, 환경, 구조, 기타 등등에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 인간은 더이상 어느 부모의 자식으로만 정의될 수 없으며, 그 부모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독립된 인격체로서 그 주어진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렇기에 설령 부모라고 할지라도, 그 부모된 사람의, 혹은 그 반대로 자녀로서의 그 사람의 인격과 됨됨이, 그리고 상대에 대한 이해도와 대화가 가능한 자세, 무엇보다도 진정한 사랑의 마음이 그 관계를 지속시키기에 불가능한 상태라고 판단되면, 그 관계는 이제그만 거기까지인 것으로 내려놓을 수 있는 것 아닐까? 어린아이의 성장 발달시기에 따라 다르게 요구되는 보살핌이 있는 것처럼, 성인이 되어 부모-자식간의 어떠한 - 물리적, 심리적, 사회적, 경제적, 감정적이든 뭐든 - 긍정적인 그 무엇이 오고가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면, 오히려 상처와 미움, 건강하지 않은 에너지만 생성하게 된다면 그 관계는 끊어내는 것이 서로의 삶에 유익하다고 난 믿는다.


서른이 훌-쩍 넘은 막내딸이, 그토록 바라던 (하고있지 않아 진정 미워했던) 결혼을 했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그 방식은 그가 원하는 게 아니었고, 결혼을 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어쩌면 마음에 드는게 하나도 없었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여전히 맘에 안드는 그 딸은 아버지란 사람에게서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 행복하게 잘 살라는 길에서 만나는 아무개라도 해줄 수 있는 그 말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이렇게 결혼해서 본인의 기분이 너무너무 좋지 않다는 말, 마음이 계속 안좋아 연락하고싶지 않다는 말이 결혼 후 처음가진 통화에서 유일하게 들은 이야기의 전부다.


전화를 끊고 이제 이걸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다. 더이상 관계를 지속하기에는 서로의 삶에 건강하지 않은 기운이 밀려들어와 때때마다 주저앉힐 것이고, 용감하고 멋진 모습으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와 발걸음 위에 그 어떤 좋은 영향들이 덮혀질 수 없을 것이다.

여전히, 가족이라는 것이 말처럼 그리 쉽게 잘라내고 없던 것처럼 살아가게 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자식-부모라는 틀 안에서 어쩔수없이 때때로 짓누르는 의무감 같은 것에 시달리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난 아빠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미워하지도 않는다. 이정도면 감사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