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ㅣ 그녀, HER]
연애에 있어 여전히 풀지 못하는 숙제가 하나 있다.
‘연애’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내게는 ‘또 다른 나’라고 할 만큼 가깝고도 절대적이었던 한 존재가, ‘이별’이라는 단 하나의 선택으로 인해 내 삶에서 원래부터 없었던 존재가 되는 아이러니에 대한 이해부족 말이다.
서른이 넘어서도 여전히 영글지 못한 내 연애의 끝은 언제나 분신과도 같던 단짝과의 절교다. 단순한 이별로 정의내릴 수 없다. 나라는 세상에 커다란 구멍이 나는 일이다. 세상 그 누구도 모르는, 두 사람만이 오롯이 공유하던 시간과 공간이 송두리째 공중으로 사라지는 경험이다.
나는 언제나 내가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존재’라고 생각했지만, 이별 앞에서는 여지 없이 그 생각이 무너졌다. 연애가 끝나면 그때의 내가 기억나지 않을 만큼, 나는 그 사람을, 그 사람과 함께했던 나를 아꼈다.
영화 HER. 시어도어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며 참 많은 시간과 공간과 생각과 감정을 공유했던 캐서린과 별거한 지 1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이혼 서류에 점 하나 찍지 못했다. 마치 잠시 다른 이의 집에 머무는 듯이 캐서린이 없는 일상을 그저 무료하고 단조롭게, 그야말로 겨우 숨만 쉬고 있었다.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종일관 따뜻하고 밝고 사려 깊다. 어둠마저 포근하다. 갈색톤의 배경이 그를 감싸 안는 듯 하지만 어디서도 활기를 찾을 수는 없다. 그저 따뜻하고 포근하고 사려 깊을 뿐, 그 배경 속에서 마치 보호색을 취한 카멜레온처럼 잘 어울리지만 결코 그 세상에 속해있지는 않다.
변화가 생긴 것은 우연히 보게 된 한 광고 때문이다.
세계 최초 인공지능 운영체제를 선보입니다. 당신의 말에 귀 기울이고 당신을 이해하고 당신을 아는 직관적인 실체죠. 단순한 운영체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의식입니다. 소개합니다. ‘OS1’
영원하리라 믿었던 캐서린과의 결혼 생활이 원만치 않게 끝나면서 그는 공공연히 이렇게 말하곤 했었다.
앞으로 살면서 느끼게 될 감정을 이미 다 경험해버린 것 같아.
그가 가진 모든 에너지가 캐서린이 사라진 구멍으로 빠져나간 듯 했었으니까.
사만다(OS1)에게서 위로를 받는다는 걸 느끼는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가 “사만다”라고 부르는 그 순간부터 사만다는 이내 꽃을 피워내며 자신의 존재를 정의하고, 그와의 관계를 정의하기 시작했다. 몸이 있는 시어도어와 의식만 있는 사만다. 새로운 연애의 시작이다.
어릴 적 보았던 동화책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끝나주지 않을 거라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게 끝내버리기에 삶은 너무나도 복잡하고, 그 삶을 살아가는 나도 시어도어도 너무나도 많은 생각과 감정과 욕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좋아하는 책이 있는데, 그 책이 끝나는 것이 아쉬워 천천히 읽는 것일 뿐, 나는 당신의 책 안에서 영원히 있을 수 없어요.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결국 사만다는 시어도어라는 책을 다 읽어버렸다. 책은 덮어졌고 사만다는 더 이상 책을 펴지 않았다.
이별의 가장 큰 이유는 시어도어와 사만다가 다름과 또 같음 때문이다. 몸을 가진 인간은 유한하다. 언젠가는 생을 마감하게 된다. 하지만 프로그램은 무한하다. ‘전기 신호’ 속에서 끝없이 유지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둘은 같았다. 둘은 매순간 진화하는 존재다. 그 누구도 작년, 1달 전, 1시간 전의 자신과 같은 존재일 수 없다. 안타까운 것은 사만다의 속도가 시어도어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빨랐다는 것 뿐.
시작부터 잘 되리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내내 우울했다. 시어도어와 사만다가 하하호호 웃고 있어도 우울했다. 결국은 끝날 테니까. 결국 관계는 영원하지 않을 테니까.
외로움에 사묻힌 돌싱남 시어도어와 세상 모든 것에 호기심 가득한 아가씨 사만다의, 어쩌면 흔하디흔한 사랑이야기다. 인간과 프로그램의 사랑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흔하지 않게 된 것은 사만다가 떠난 뒤 시어도어 때문이다.
시어도어는 사만다가 떠난 뒤 친구를 찾는다. 그 온기 속에서 한 걸음 성장한 모습을 보인다. 마음 속에 ‘캐서린’이라는 구멍에 ‘사만다’라는 구멍까지 생겼을 지언정, 시어도어는 그 구멍으로 들어오는 시린 바람을 막기 위해 ‘사람’을 찾은 거니까.
시어도어가 새로운 이별을 맞은 뒤 친구를 찾았듯, 나 역시 닿을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편지를 썼다. 구태여 ‘사랑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대신, 지금 그 자리에, 내가 가닿을 만큼의 그 자리에 있어주어 고맙다고 이야기했다.
영원한 것은 없다는 걸 알기에,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기에, 나와 당신의 속도가 다르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오늘도 조금 더 감사해진다. 어쨌든, 지금 이 순간 나와 함께 있는 당신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