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l 대니쉬걸 Danish Girl]
그림의 주인공인 울라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녀가 요청한 시일까지 그림을 맞추려면 시간이 빠듯하다며 게르다가 발부분의 모델을 요청해왔다. 그녀는 상자 속에 고이 담겨있는 스타킹을 신고 올라가 신었던 구두를 신고 잠시 앉아있으면 된다며 나를 어른다.
스타킹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게르다가 울라의 드레스를 내게 덮어주었다. 다리를 조금 더 발끝까지 길게 뻗어내라는 주문을 받았다.
드레스를 쥔 손이 파르르 떨려온다. 부드러운 듯 까슬한 드레스의 촉감에 내 안에서 폭죽이 터지는 듯하다. 시선을 조금 더 떨구어 다리를 바라본다. 하이얀 스타킹에 감싸진 다리가 낯설다. 하지만 스타킹을 타고 내려가 고운 구두까지 이어지는 선에서 눈을 뗄 수 없다.
기묘한 느낌이다. 호흡이 가빠진다. 마치 봉인이 풀린 듯 이 아름다움에 넋이 나간다.
뒤늦게 나타난 울라가 나의 모습을 보고는 한 아름의 백합(lily) 다발을 안겨주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부터 자기 이름은 ‘릴리(Lili)’야!
영화는 남자로 태어나 여자로 세상을 떠난 최초의 트렌스젠더(transgender) 덴마크인 화가를 주인공으로 한다.
1926년 덴마크 코펜하겐을 배경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풍경화가로 이름을 알린 남편 아이나 베게너(에디 레드메인)와 초상화에 매진하는 아내 게르다 베게너(알리시아 비칸데르)가 등장한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부부이자 서로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는 파트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림의 모델인 발레리나 울라(엠버 허드)가 나타나지 않아 그림을 완성하지 못했던 게르다가 아이나에게 울라의 대역을 부탁한다. 아이나는 이제까지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흥분에 휩싸여 자기 안의 진짜 자기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얼마 뒤, 두 사람은 울라가 마련한 무도회에 초대받는다. 수줍음 많고 내성적인 아이나는 자신의 유명세가 불편해 가기를 꺼린다. 이에 게르다는 게임을 제안한다. 바로 여장을 하고 무도회에 가는 것. 아이나는 있지도 않은 사촌 여동생 ‘릴리’로 무도회장에 가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릴리’는 헨릭(벤 위쇼)의 구애에 못 이겨 키스를 나눈다. 그 장면을 보게 된 게르다는 충격에 빠진다.
이후의 이야기는 남성인 아이나와 여성인 릴리, 그리고 아내인 게르다의 갈등과 헌신이 주를 이루어 이어진다. 주인공은 아이나(릴리)이지만, 가장 이입되는 인물은 바로 그(그녀)의 부인인 게르다이다.
그저 한 번의 게임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여장’을 통해 자기 안의 진짜 정체성을 발견한 남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르다에서,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한 한 인간에 대한 동정과 연민을 품게 된 게르다까지. 게르다를 연기한 알리시아 비칸데르는 지난 2월 열린 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게르다는 아이나 안에 있던 ‘릴리’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낸 장본인이다. 장난 같이 열어젖힌 그 상자 때문에 사랑해 마지않던 남편을 잃고 전혀 다른, 낯선 ‘릴리’라는 여자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는 짙은 슬픔과 연민이 가득 배어난다.
나였다면, 과연 내가 사랑하는 남편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남편의 선택을 존중하고 지지하는 영혼의 동반자로 거듭나는 게르다의 변화는 놀라움과 감탄의 연속이다. 톰 후퍼 감독은 “게르다를 통해 무조건적인 사랑과 포용력, 헌신을 이 영화에서 느낄 수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영화 속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아이나가 자기 안의 ‘여성’을 확인한 뒤 육체적 ‘여성’을 갈망하는 신(scene)이다. 극장 무대 뒤 수많은 소품들이 가득한 공간에서 아이나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나체를 바라본다. 자기 안의 자기(여성)와 겉으로 보이는 자기(남성)의 간극에 고통스러워하는 아이나. 그는 남성으로서 자신의 성기를 부정하며 아름다운 여성으로서 자신을 더욱 원하게 된다.
이 장면 이후 아이나의 비중은 많이 줄어든다. 평단의 호평을 받던 풍경화가 아이나는 점차 사라지고 화장을 하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채 게르다의 모델로 그림에 담기는 릴리가 자주 등장한다. 아이나는 대게 우울하거나 무기력하게 등장할 뿐이다. 하지만 릴리는 아름답다. 붉은 머리칼, 주홍빛 립스틱과 또렷한 아이라인은 그 아름다움에 생기를 더한다.
영화는 청소년관람 불가인데 그렇다고 해서 남성의 몸으로 태어나 스스로를 여성이라 인지하며 다른 남성으로부터 사랑받고자 하는, 그러니까 동성 간의 섹스나 이와 비슷한 종류의 신이 나오지는 않는다. 대신 영화는 육체적인 성과 정신적인 성이 일치하지 않는 주인공의 심리와 몸 그 자체에 집중한다.
릴리를 모델로 한 게르다의 그림은 호평을 받으며 덴마크를 넘어 프랑스까지 이름을 떨치게 된다. 사람들은 그림 속 모델 릴리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아이나는 동성애자, 정신분열증, 성도착증 환자 취급을 받으며 병원에 감금될 위기를 수차례 겪는다.
20세기 초 아이나(릴리)와 같은 성정체성 장애는 적극적으로 치료해야 하는 ‘병’으로 인식되었다. 동성애는 범죄로 취급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이런 성 정체성 관련한 사안은 개인의 의지 문제가 아닌 뇌 기능이나 구조의 차이에서 온다는 연구들도 나오고 있다.
네덜란드 국립 뇌과학연구소의 딕스와브 교수는 11년에 걸쳐 성전환자의 뇌 구조에서 특정한 변화가 나타날 가능성에 관해 연구했다.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을 바꾼 6명의 뇌를 수집해 시상하부와 연결된 영역을 집중 연구한 결과, 하나의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바로 시상하부의 분계선조 침대핵(bed nucleus of striateminalis)이다.
시상하부의 분계선조 침대핵은 일반적으로 남성이 여성보다 크다. 그런데 육체적 성과 마음의 성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 다시 말해 '성정체성(성동일성)'에 혼란이 있는 사람은 분계선조 침대핵의 크기가 여성의 평균 크기와 비슷했다.
딕스와브 교수는 “시상하부의 차이는 태아 때 결정된다. 임신 중 태아의 뇌가 남자 혹은 여자의 뇌로 발달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라며 “태아 성기는 임신 초기 2~3개월 이내에 결정되고 뇌의 성별은 임신 후반기에 결정되는데, 이것이 성전환자가 생기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즉, 신체적 성별과 뇌의 성별이 일치하지 않아 성전환자가 발생한다는 것.
영화는 데이비드 이버쇼프가 2000년 발표한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그리고 그 소설은 세계 최초로 성전환 수술을 받고 남성에서 여성으로 변한 덴마크 화가 에이나르 베게너(Einar Wegener)이자 릴리 엘베(Lili Elbe)를 주인공으로 한다.
실제로는 부인인 게르다가 남편에게 성전환 수술을 권했다고 한다. 남편을 잃더라도 그의 진정한 행복을 바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자신(여성)으로서 릴리의 삶은 길지 않았다.
영화에서는 여성으로서 온전한 삶을 위하여 두 번의 성전환 수술을 하고 회복 도중 사망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실제로는 다섯 번째 수술로 자궁과 난소를 이식받은 뒤 한 남성을 만나 아이를 가지려고 노력하던 중 거부반응을 보여 삶을 마감하게 된다. 1930년에 첫 수술을 시작해 1931년에 숨을 거둔다. 몸과 마음 모두 여성으로서의 삶은 3개월이 채 되지 못했다고 한다.
우리는 ‘다름’을 ‘틀림’이라고 쉽게 생각해버리는 세상에 살고 있다. 여전히 동성애나 성전환증을 질병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잘 생각해보면, 내가 나 자신으로서 온전한 삶을 소망하듯이, 남자(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여자)도, 남자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자신을 여자로 인식하는 남자(그 반대)도 모두 자신으로서 온전한 삶을 소망할 뿐이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상대에게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권한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 다수를 등에 업고 소수를 틀렸다고 재단하기 이전에, 인간 그 자체로서 서로를 받아들이는 의식이 필요하지 않을까.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서 살아가고자 분투했던 릴리의 삶을 기억하며.
만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