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제맘대로 부를래요

라이프스타일에도 유행이 있다

by 세모


어릴 적 가훈을 적어오라는 숙제를 받은 적이 있었다. 가훈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그럴싸하게 적어가야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숙제 하나를 해결하는 데에도 엄마 손이 필요했던 초등학교 1학년 무렵, 엄마는 공책에 큼지막하게 "매사에 최선을 다하자"라고 적어주었다. 나는 엄마에게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고, 엄마는 내게 뭐든지 열심히 해야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다음 날, 반에서 최선이나 성실의 키워드로 가훈을 적어온 친구가 족히 절반은 넘었다. 그렇게 나와 친구들은 주어진 일에 열과 성을 다해 묵묵히 정진하는 것이 멋진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나쁜 짓 빼고는 다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하셨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하는 것은 학생으로서 당연한 것이며 친구들과 사이 좋게 지내는 것도, 교실 청소도, 마주치는 어른에게 인사하는 것도, 훌륭한 장래희망을 가지는 것도 모두 열심히 해야한다고 당부하시며 수업을 마치셨다. 쉬는 시간만 기다리던 8살은 그 말의 뜻을 ‘어쨌든 뭐든지 열심히 하면 칭찬을 받을 수 있다’ 정도로 이해했다. 눈치가 빨랐던 나와 친구들은 그렇게 칭찬의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기 위해 어지간한 것은 모두 열심히 했고 성실하게 칭찬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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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한참 지나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되자 내가 그토록 가열차게 굴리던 열심의 쳇바퀴에 균열이 생겼다. 친구들의 다이어리 앞 표지나 메신저 프로필에 “YOLO” 라는 단어가 보이기 시작했다. You Only Live Once. 너는 오직 한 번만 산다, 그러니 한 번뿐인 인생을 후회없이 살아야한다는 의미였다. 그 즈음 별일없이 학교를 다니던 친구 몇몇은 휴학을 하고 배낭여행을 떠났고, 성실하게 학교생활을 하던 친구는 잦은 음주가무를 즐기며 매일 욜로를 외쳤다. 한창 소액적금에 취미를 붙였던 친구는 갑자기 적금을 헐어 꽤 큰 지출을 했다. 주로 느닷없이 여행을 떠나는 친구가 많아졌던 걸로 기억한다. 젊은 날의 객기나 치기어린 행동은 욜로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고, 별일 없이 심심하게 사는 사람은 왠지 한번 뿐인 인생을 즐기지 못하는 사람처럼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내가 열심히 굴렸던 최선이라는 자전거는 어쩐지 유행이 다 지나 촌티나는 고물이 된 것 같았다. 친구들을 따라 괜히 한번 강의를 빼먹고 낮술을 한다거나, 멀리 떠날 배짱은 없어 뜬금없이 시외버스를 타고 근교에서 한나절을 보내다 오는, 이도저도 아닌 한 때를 보냈다.




그렇게 한 번뿐인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후회가 남지 않을까에 대하여 우물쭈물하는 사이 시간은 많이 흘렀다. 내가 어떠한 입장도 명확히 취하지 못하는 사이 여행을 떠났던 친구들은 하나둘씩 돌아왔고, 음주가무로 밤을 지새우고 강의실에 나타나던 친구는 도서관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적금을 헐어 중고차를 샀던 친구는 군대에 갔으며 어학시험 점수를 비롯해 취업을 위한 갖가지 요건들을 갖추기 위해 노력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한 번뿐인 인생을 위하여 후회 한 톨 남기지 않겠다던 그들은 또 다시 자신의 인생을 위하여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뒤 코로나가 터졌다. 전 지구를 마비시킨 펜데믹 속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정말 지극히도 개인의 범주에 있는 것들이었다. 바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유일하게 통제 가능한 ‘자신’을 갈고 닦는 것이다. 전염병이 우리를 휩쓸었을 망정 꺾이지 않고 매일 규칙적인 수면과 운동, 식단을 지키기 위해 노력할 것, 사람들을 만나는 대신 자기계발에 힘쓸 것, 혼자 할 수 있는 취미생활을 가질 것, 독서 혹은 공부할 것, 불확실성에 대비하여 재테크를 할 것. 그렇게 우리는 “갓생”을 살아내라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갓생, God+生.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귀감이 될만한 바람직하고도 부지런한 인생을 살아야한다는 것이다. 그즈음 유튜브에는 자신만의 스타일로 갓생을 살아내는 영상들이 쏟아졌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운동과 공부를 한다는 사람, 퇴근 후 부업을 해서 월급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다는 사람, 갓생을 살았더니 삶이 달라졌다는 간증 영상 등. 온 세상이 갓생을 살지 않는다면 도태되고야 말 것이다는 확언을 보내는 듯 했다.


인생이 어째서 God해야 하는지, 어디를 향해 그렇게 뛰어야한다는지 이해가 되진 않았다. 분명한 건 갓생을 살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칭찬스티커에 목을 매던 어린이에서 욜로의 늪을 빠져나와 제 몫을 하는 어른으로서 자리 잡고자 노력 중이었던 나와 친구들은 또 다시 갓생을 살아보겠노라 마음을 먹었다. 일찍 일어나 책을 읽어보고 건강해지자며 달리기 계모임을 만들었다. 재테크 공부하기 위해 주식계좌를 만들었고 n잡러가 되겠다며 부업을 알아보았다. 엔데믹 후에도 자기계발과 갓생을 둘러싼 열기는 여전했다. 누군가는 갓생으로 재태크에 성공해 퇴사를 했다는 소문이 들렸고 또 다른 누군가는 직장 바깥에서의 부캐를 키워 제 2의 인생을 산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그렇게 몇 년, 신의 장난질같던 코로나와 갓생의 시절을 지나고 나니 지금이 되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흥행과 K-수식어가 붙은 수많은 컨텐츠들은 전 세계 사람들을 서울로 불러들였고 언제 코로나라는 재앙이 있었는지 벌써 아득히 엣 일처럼 느껴질 정도다. 열심히 최선을 다하던 어린이들은 욜로하다 골로 간다는 저주를 뚫고 갓생을 살아내는 성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고생한 나 자신을 살뜰히 돌봐주고 싶어한다. 세상은 우리의 수고스러움을 어떻게 알았는지, 이번에는 힐링과 휴식, 회복과 같은 화두를 던진다.

이번 시대의 키워드는 “웰니스”인 것이다. 자기돌봄과 명상, 요가나 일기같은 이미지가 떠오르는 이 맥락은 신체적 건강과 더불어 정서적 건강 및 자신의 삶 전반에 대한 건강을 추구한다는 개념이다. 올리브영은 광화문 한복판에 올리브베러라는 웰니스 플랫폼을 만들어 각종 영양제와 헬스케어, 심신의 이완을 돕는 제품들을 판다. SNS에는 정신건강과 기분관리와 관련된 컨텐츠들이 쏟아지며 베스트셀러에는 심리학, 뇌과학 관련 책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이제는 인생을 ‘잘’ 살기 위해 내 몸과 마음, 체력, 기분까지 살뜰히 돌봐야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에게는 그럴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다는 점이다.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이러한 라이프스타일의 변모는 우리를 지치게 만들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하던 어린이들은 욜로하다 골로 간다는 저주를 뚫고 갓생까지 살아내는 성인이 되었는데, 이제는 그런 나 자신을 단정하게 살뜰히 돌보는 센스까지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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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방식에도 일종의 유행이 있다. 그 당시에는 그렇게 사는 것이 꽤 그럴싸한 정답인 양 보이게끔 만든다. 시대가 표방하는 라이프스타일이 그 당시 삶의 기준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Lifestyle, 다시 말해 삶의 양식이라 함은 그저 트렌드를 쫓아 움직일 수 만은 없다. 지구에 n명의 인간이 있다면 n가지의 삶의 양식이 존재할 수 있다. 유행은 그저 유행이지 나의 삶에 완전히 들어맞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유행하는 라이프스타일이 마치 사회에서 인정받는 정답인 양 삶에 난입할 때, 우리는 혼란을 느낀다.

살던대로 사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지는 않았더라도, 유행을 놓치고 있는 나를 차마 외면하지 못한다. 다수의 흐름 앞에서 모두가 마이웨이의 용감한 자세를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어쩐지 슬쩍 유행가에 귀를 기울여보게 된다. 이렇듯 우리는 인간으로서 한 시대를 관통하는 시류를 완전히 무시하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매번 그 유행가만 듣다보면 피곤해지기 마련이다. 나에게 필요한 건 내게 듣기 좋은 멜로디면 충분하다. 온 세상이 합창하는 노래에는 굳이 나까지 목소리를 보태지 않아도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럴듯한 유행가를 따라 부르라고 강권하는 태도가 아니라 나에게 맞는 노래를 부르도록 내버려두는, 각자의 취향을 존중해주는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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