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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혁진 Mar 14. 2018

Here 여기서





 우리는 시공간을 교차한다. 한 지점에서 다른 한 지점으로 연장하며 또한 단일한 공간을 상이한 다른 시간으로 방문한다. 지금 소개할 <Here> 역시 이러한 시공간의 이야기다. 작가 ‘리처드 맥과이어’는 아버지가 돌아간 후 자신의 옛집을 방문한다. 그곳에서 그는 오래전 아버지가 찍은 사진을 본다. 색 바랜 낡은 사진은 그 자체로 애상감을 자아낸다. 하지만 이 사진엔 회상을 넘어선 무언가가 있다. 작가의 아버지는 특이하게도 매년 같은 장소를 반복해 사진에 담는다. 

 사진을 찍는다는 건 한 순간을 고정한다는 의미다. 모든 사진은 연속성에서 떨어져 나온다. 그럼에도 이 단절된 순간은, 비록 원래의 시간은 아닐지라도 여전히 새로운 연속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 장의 사진 아닌 여러 사진을 그것도 연속으로 배열할 경우 멈춰있던 시간은 다시금 되살아난다. 공간을 교차하는 시간의 흐름. 여기서 <Here>의 시공간은 시작된다.      



선형의 시간, 누적의 시간 

 <Here>은 각도가 고정된 동일한 공간을 두 페이지에 걸쳐 보여준다. 이어 페이지를 넘기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된 공간의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즉 공간은 고정한 채, 시간을 과거에서 미래로 그리고 다시 미래에서 과거로 이동시킨다. 독자는 칸의 시간과 변화하는 공간을 이정표 삼아 시간에 대한 독특한 지각을 체험한다.


<Here>은 동일한 공간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 지를 보여준다.   




 이 같이 시간의 이미지를 따라가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작품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교차하는 시간들은 과연 우리에게 무슨 말을 건네려 한 걸까? 

 작품 초반부 노인의 대화 장면을 보자. 장면 구성은 단출하다. 두 페이지로 구성된 장면에는 하나의 칸이 있다여기에는 두 개의 시간대가 존재한다. 칸의 시간과 페이지의 시간. 칸의 시간인 1989년은 일반적 만화 문법대로 노인의 동작과 대화를 통해 움직인다. 반면 페이지의 시간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2014년, 1957년, 1573년 등 다양한 시간대로 전환된다.  


칸의 에워싸는 페이지의 과거 시간 이미지는 페이지를 넘낄 때마다 변화한다.  




  여기서 고정된 1989년 칸의 시간은 선형성의 시간이다. 이 시간은 칸의 배열을 통해 의미를 생성하는 만화 문법에 의존한다. 칸의 움직임은 그 자체로 시간의 움직임이다. 읽혀진 칸은 과거로 밀려가고, 읽어낼 칸은 미래에서 현재의 지점으로 당도한다.  물론 시간의 본질은 선형성만으로 규정할 수 없다. 시간은 흘러가는 동시에 쌓인다. 특정 시간은 결코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가 인식하는 혹은 그 너머에 있는 이전 시간과 쌓여 함께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Here>은 누적의 시간을 어떻게 재현할까? 그것은 선형적 칸의 시간과 이와 대비되는 페이지의 시간과의 결합을 통해 이뤄진다. 앞서 언급했듯 페이지는 다양한 시간대로 구성돼 있다. 이때 각 페이지의 시간은 직접적으로 다른 페이지의 시간과 연관돼 있지 않다. 대신 일련의 페이지들은 공통적으로 노인이 존재하는 칸을 에워싼다. 이 무수한 과거 이미지들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노인의 삶을 깊숙이 파고 들어간다.

 여기서 칸과 페이지, 현재와 과거의 시간은 공존한다. 아니 그것은 공존 이상의 무언가다. 과거는 잠재태적 거대한 바다가 되어 노인 즉 현재를 감싸며, 현재는 또한 그 안에서 미래로 향해가며 현실태적 모습을 드러낸다. 

즉, <Here>은 지나가는 현재의 흐름과 스스로 보존되는 과거의 흐름이라는 두 가지 방향으로 시간의 분화를 가시적으로 드러낸다1).


‘여기’의 시간으로

 다시 한 번 <Here>의 페이지로 돌아가 보자. 칸의 시간을 찬찬히 확인하다 보면 앞선 설명과 모순되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페이지를 과거의 시간, 칸을 현재의 시간으로 상정했지만, 때때로 페이지가 현재의 시간, 칸의 과거의 시간 뒤바뀌는 경우가 있다. 게다가 특정 페이지는 더 나아가 과거, 현재, 미래가 뒤섞인 이질적 시간 이미지로 가득 채워진다. 이것은 분명 과거의 누적 즉 특정 시간은 이전 과거의 다양한 순간들로 구성된다는 설명과 배치된다. 


 우리는 그래서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해야 할 것 같다. <Here>의 시간 배열은 어쩌면 과거에서 현재로 나아가는 선형적 시간이 아니지 않을까? <Here>의 시간대는 기원전 30억년과 22175년 사이 위치한다. 그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상식적인 시간 순서를 따른다. 

하지만 그것은 배경으로 기능하는 전체 시간일 경우에 한해서다. 칸과 페이지가 결합된 즉 다양한 시간으로 조합된 임의의 순간들은 이러한 선형성에서 이탈한다. 그 시간은 연대기적 시간이 아닌 비연대기적 시간이며, 누적의 시간이 아닌 결합의 시간이다. 


작품에서 궁극적으로 보여주려 한 것은 선형적 시간을 넘어서는 새로운 시간 '여기(Here)'다.



 결국 <Here>이 궁극적으로 재현하려 한 시간은 바로 ‘여기(here)’다. 독자가 장면을 응시하는 순간, 각기 다른 시간은 어느새 뒤섞이고 결합해 매혹적이면서도 이질적인 시간을 만든다.

 이 새로운 시간은 선형적 시간에 잠재했지만 그 시간으로 포괄할 수 없는 그래서 ‘여기’라고 칭할 수밖에 없는 가능성의 시간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시간의 역동적 관계를 재인식하게 되며, 더 나아가 선형적 시간을 넘어선 또 다른 차원의 시공간을 추체험하게 된다.



칸의 시공간 미학

 <Here>의 시공간 미학은 칸의 독특한 방식에서 발생한다. <Here>은 기존 만화와는 다른 칸 형식을 사용한다. 일반적으로 페이지는 연속된 칸의 배열로 구성된다. 반면 <Here>의 칸 구성방식은 ‘창안의 창’ 형식을 취한다. 페이지 내의 칸은 윈도우 화면처럼 이미지 위의 이미지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는 밖을 관찰할 수 있는 창처럼 파여진 공간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로 <Here>의 칸은 가상의 창을 취하든, 현실의 창을 취하든 상관없이 물질성을 지닌다. 칸의 윤곽과 면적은 페이지의 공간을 물리적으로 점유하면서 칸은 세계를 재현하는 배경이 아닌 세계의 일부로서 기능한다. 직사각형 칸은 책상처럼 세계의 일부를 차지하며  때론 떨궈진 액자처럼 중력에 이끌려 바닥으로 낙하한다.


  

<Here>의 칸은 때때로 물질성을 지니며, 세계를 재현하는 배경이 아닌 세계의 일부로서 기능한다.



 내용적인 측면에서 보다 파고 들어가면 <Here>의 칸은 무엇보다 시간과 시간을 연결하는 창이다. 다만 주의할 점은 이때의 연결이란 시간적, 논리적 인과관계를 뜻하지 않는다. 각 칸은 시간적 선후로나 인과적 위계로나 직접적 관련은 없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동등하다. 

 그럼에도 각각의 시간이미지들은 단일한 한 지점으로 수렴한다. 동일한 리듬으로, 서정적인 색체로 그리고 특정한 대화 양식을 통해. 심지어 이마저도 불가능할 경우 몽타주 기법처럼 생경한 이미지와 충돌하며 새로운 균열을 낸다.


  바로 이 결정적 순간, 새로운 시간의 지평이 떠오른다. 인간은 한 공간에서 하나의 시간만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대신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 이 같은 한계를 넘어서기도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일시적이고 불안전하다. 그러나 ‘여기’는 다양한 시간이 한 공간에 공존하며, 그 시간은 또한 서로의 시간에게 말을 건넨다. 현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존재할 수 없는 만화적 순간으로.



1)로널드 보그, 들뢰즈와 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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