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 사생활』은 전북 군산의 독립만화 전문출판사 삐약삐약북스가 기획한 만화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는 향후 10년간 99개 지역의 소개를 목표로 하며, 2020년 시즌 1에서 부산, 대구, 고성, 군산, 충주, 공주, 단양, 광주, 담양을, 2021년 시즌2에서 강릉, 경주, 구미, 대전, 동해, 양산, 옥척, 울산, 정읍을, 2022년 시즌 3에서 남해, 전주, 김해, 화순, 왜관, 보성, 인천, 포천, 속초, 특별편 조선을 출간했다. 지역을 이야기하는 『지역의 사생활』은 분명 의미 있는 프로젝트다. 하지만 이와 관련한 『지역의 사생활』의 논의는 어떠한가. 2021년 ‘오늘의 우리만화’의 수상 평을 보자. ‘오늘의 우리만화’는 『지역의 사생활』을 “서울 중심으로 돌아가는 한국 사회에서 부속품으로서의 로컬이 아닌 그 자체 삶과 의미를 이야기로 담아낸 독립만화 프로젝트로 지역 기반 창작자들에게 새로운 롤모델이 되는 작품”이라 평한다. 정확한 평가다. 그런데 문제는 이후 논의들이 많은 경우 ‘오늘의 우리만화’ 수상 평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역의 사생활』을 주목하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의례적 상찬만을 되풀이하는 것은 다소 불성실한 일이다. 구체성이 결여된 당위성은 최악의 경우 지역에 이어 지역 만화를 다시금 획일화하는 중심부 시선의 반복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역의 사생활』에 관해 무엇을 구체적으로 논의해야 할까. 섣불리 재단할 수 없지만 『지역의 사생활』 시즌 3 프로젝트 계획을 참고해보자. 여기서 『지역의 사생활』의 어떤 변화가 눈에 띈다. 『지역의 사생활』은 “그간 ‘비수도권탐방기’라는 부재로 수도권 밖 지역만을 조망하였으나, 수도권 또한 지역으로 다뤄져야 한다는 의견을 반영하여, 2002년 시즌부터는 ‘로컬만화 프로젝트’라는 부제로 인천과 포천을 포함한다.” 그렇다. 지역만화에서 로컬만화로의 이행. 그러면 왜 하필 지역이 아닌 로컬인가. 로컬(local)은 특수성과 고유성을 강조한 지역 개념을 확장하여 국가중심의 하부인 국지적 영역, 글로벌과 로컬, 전체와 부분, 물리적 공간 경계와 추상적 인식 경계까지 아우르는 개념이다. 『지역의 사생활』 시즌 3에서 인천과 포천 심지어 조선시대의 시공간까지 포함할 수 있었던 건 바로 그래서다. 게다가 로컬이라는 개념은 지역과 지역 주민이 분리된 텅 빈 상자로서의 공간이 아닌 지역 주민이 체험하고 살아가는 구체적 현장으로서의 공간을 창출한다. 로컬은 일상의 삶을 영위하는 터이며 그 안에서 다양한 관계가 맺어지는 곳 즉 인간의 삶이 이루어지는 마당으로서의 세계를 지시하기에. 따라서 『지역의 사생활』의 이후 논의는 질적인 체험과 다층적 관계로 구성된 로컬을 인식할 수 있는 작업이 돼야 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만화 형식의 검토로서, 만화라는 공간 형식이 로컬과 로컬리티를 어떻게 구현하는지를 살필 수 있는 작업과 함께.
거주민의 시선과 외부인의 시선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 Mujin 10km’라는 이정비를 보았다. 그것은 옛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길가의 잡초 속에서 튀어나와 있었다. ··· 버스는 무진 읍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기와지붕들도 양절치붕들도 초가지분들도 6월 하순의 강렬한 햇볕을 받고 모두 은빛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철강소에서 들리는 쇠망치 두드리는 소리가 잠깐 버스로 달려들었다가 물러났다.”
소설 『무진 기행』의 도입부다. 주인공 윤희중은 “실패로부터 도망해야 할 때거나, 무언가 새 출발이 필요할 때” 서울과 대립되는 공간인 무진을 방문한다. 그런데 왜 갑자기 『무진 기행』인가. 지금 이 글은 『지역의 사생활』에 관한 글이 아닌가. 『무진 기행』을 이렇게 무리하게 끌고 온 이유는, 『지역의 사생활』의 많은 주인공들이 어찌해서인지 『무진 기행』의 주인공과 유사한 경로를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지역으로의 이동 그러니까 1970년대 한국 소설에서 등장하는 귀향 모티프라 할 것이 2000년대 현재에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가령 『지역의 사생활』의 주인공들은 일상을 탈피하려 바다와 맞닿아 있는 강릉과 동해를 찾는다. 아니면 이보다 특별한 경우로는 외지인인 alien이 되어 관광지인 전주로 단체여행을 떠난다. 더욱이 다음은 본격적인 귀향 이야기라 할 수 있을 텐데, 주인공들은 과거를 거슬러 사진첩 속 향수적 공간 경주를 떠올리거나 혹은 “피하고 싶은 자신을 너무나 잘 아는” 자전적 공간 구미로 되돌아간다. 『지역의 사생활』의 주인공들은 왜 『무진 기행』의 윤희중과 같이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 홀연히 지역으로 ‘내려’가는 것일까. 『지역의 사생활』의 작가 인터뷰를 주목해보자. 인터뷰에 따르면 『지역의 사생활』에 참여한 많은 작가들은 다양한 지역적 연고에도 현재 서울로 대표되는 도시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역 만화를 창작하는 작가의 진심을 의심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다만 지역 만화와 도시 작가라는 다소 이질적적 조합에 다음의 생각을 쉬이 떨쳐낼 수 없다. 『지역의 사생활』의 작가들은 어쩌면 중심/주변의 이분법을 내제한 도시인의 눈으로 지역을 바라보는 게 아닐까. 때문에 시골로 내려가는 『무진 기행』에 대한 아래의 비판은 지역으로 내려가는 『지역의 사생활』에도 역시 동일하게 적용 가능한테다. “『무진 기행』은 지방을 무대로 하고 있으나 근본적으로 도시인의 문학이다. 주인공이 현재 도시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사실 이상을 위의 진술은 포용하고 있다.”
도시인의 눈과 도시인의 문학. 당연히 외부 시선에 종속된 지역은 『지역의 사생활』의 문제의식으로서 중요한 비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해해선 안 될 게 있다. 작가의 문제가 혹여 지역 작가만이 지역 만화의 진정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폐쇄적 주장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지역 작가의 특권화는 강한 직관적 호소력에도 불구하고 지역 만화를 창작하는데 그다지 생산적이지 않다. 이를테면 지역 출신이지만 도시로 이주한 작가와 반대로 도시 출신이지만 지역으로 이주한 작가 중 누구를 지역 작가라 해야 하는가. 모호하다면 그냥 단순히 지역에 평생 살아온 작가만을 지역 작가로 한정해야하는 걸까. 『지역의 사생활』 고성편을 보자. 고성 출신이 아닌 정원 작가는 일종의 여행자의 시선으로 대략 세 시간에 걸친 고성으로 여정을 그려낸다. 반복하자면 정원 작가는 고성출신 작가가 아니다. 그러하다면 이 과정에서 펼쳐지는 터미널 매표소, 터널 속 어둠, 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들은 과연 무의미한가. 통상적으로 기대되는 고성의 모습도, 주민들에게 친숙한 고성의 모습도 아니다. 하지만 『지역의 사생활』 고성편은 대신 공간을 고성 너머로 확장시킴으로써 타 지역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로컬로서의 고성을 기입한다. 로컬은 다양한 이해관계로 형성되는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공간이다. 로컬의 고유한 특성은 홀로가 아닌 다른 지역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만들어진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역의 사생활』을 다음과 같이 재구성하여보자. 서울과 지역, 내부와 외부, 중심부와 주변부의 변증법으로. 지역이 없는 지역 만화는 공허하고, 외부 지역이 없는 지역 만화는 맹목적이다. 『지역의 사생활』의 약국 작가 역시도 이 같은 만화의 변증법을 정확히 언급한 바 있다. 경남 사천에서 양산으로 이주한 약국 작가는 양산을 “반쯤은 이방인의 눈으로, 또 반쯤은 거주민의 눈으로 담아내고 싶다”고 말한다. 이방인의 눈과 거주민의 눈. 『지역의 사생활』은 정말로 이 두 양극의 시선 사이에서 진동한다. 방랑자인 주인공은 9개월이라는 짧을 수도 아니면 길수도 있는 기간 동안 대구 이곳저곳을 쉼 없이 밟아나간다. 그리고 포천으로부터 도망친 또 다른 주인공은 그곳을 미워하면서도 어떻게든 사랑하려 애쓰며 세계-내-존재로서 인간의 선험적 구성틀 공간에 대해 탐구하다.
지역 공간과 만화의 공간적 형식
지역 만화란 무엇일까? 삶의 터로서의 로컬(공간)과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역사적 경험(시간)을 통해 만들어가는 다양한 관계성의 총체를 그려내는 만화로 정의해보자. 그리고 이때의 지역 만화 정의는 만화 형식의 관점에서 특히 흥미롭다. 왜냐하면 지역 만화가 주체의 경험에 따라 각기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지라도, 지역 만화의 시작점은 다름 아닌 지역의 물리적 토대 ‘공간’이라는 사실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역, 공간 그리고 만화. 그렇다면 『지역의 사생활』은 지역 공간을 만화 형식으로 어떻게 재현할까. 『지역의 사생활』은 지역 공간을 재현할 때 우선 ‘사진’ 이미지를 활용한다. 지역 공간을 카메라로 찍고 그 사진 이미지를 만화 이미지로 수정한 후 마지막에는 독자와 진실성의 계약을 이행하기라도 하듯 『지역의 사생활』 인터뷰에 관련 사진 이미지를 첨부한다. 사실 지역 만화와 사진 이미지의 친연성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세상을 보여주는 이미지”라는 사진의 존재론을 고려한다면, 사진은 좌우간 무엇인가를 경험하거나 무슨 일인가에 관여했다는 인상을 주는 데 꼭 필요한 장비다. 이뿐만이 아니다. 사진의 리얼리즘은 실제로 거기에 있는 것을 넘어 당시 실제로 지각한 것을 보여주는 그 무언가로 의미하기 까지 한다. 사진 이미지 더 정확하게는 사진을 재매개한 만화 이미지가 『지역의 사생활』 도처에 편재하는 이유도 그래서다. 『지역의 사생활』은 지역 공간을 재현하는 방법론으로 시각적 세계와 특수한 관계를 맺는 사진의 존재론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지역의 사생활』의 공주편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공주편의 주인공들은 자신이 직접 사진을 찍는 자기 반영성을 수행하며 백제 문화제의 공간을 인스타그램적 패턴으로 직조한다. 그리고 다음, 대비되는 칸의 형식으로 사진을 재매개하는 대구편과 부산/울산편은 어떠한가. 『지역의 사생활』의 대구편은 사진 이미지를 주인공의 동선을 따라 연속적으로 삽입하며 달구벌인 대구의 지도를 성실하게 그려나간다. 반면 『지역의 사생활』의 부산편과 울산편에서는 연쇄된 칸의 흐름을 늦춘 채 랜드마크 이미지의 계열체를 병치하여 지역의 전체 상(像)을 떠오르게 하는 마법적이라 할 순간을 창조한다.
사진의 재매개로 구성된 만화적 공간. 『지역의 사생활』은 “그것은-존재-했음”이라는 사진의 증언을 통하여 지역 만화의 진실성 혹은 진정성을 획득한다. 다만 여기서 덧붙여야 할 사실이 있다. 사진은 어디까지나 지역의 공간을 재현하는 유력한 방법 중 하나일 뿐이다. 사진의 존재론을 헤아려보라. 사진은 특정 시공간을 잘라낸 불연속적인 이미지다. 그 말인즉슨 사진은 지역 공간의 외양을 인용하되 지역 공간의 지속적 경험은 충분히 포착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지역의 공간은 사진의 이미지보다 깊고 입체적이다. 또한 지역의 공간은 사진의 이미지보다 풍성하고 복합적인 감각으로 경험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쯤해서 건축물의 수용이 시각과 촉각의 이중적 측면에서 이뤄진다는 발터 벤야민의 주장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아니면 보다 직접적으로, 추상화된 시각적 공간을 극복하고자 촉각의 회복을 요청하는 지역학과 로컬리티 연구를 참조해도 좋을 것이다. 왜 하필 촉각인가. 촉각은 단순한 접촉의 감각이 아닌 운동의 감각까지 아우르는 근원적 감각으로, 인간은 바로 이러한 운동성을 동반한 촉각을 통하여 공간과 공간의 속성을 직접적으로 체험한다. 그러니 『지역의 사생활』의 공간을 시각, 사진의 측면에 이어 신체, 촉각, 운동의 측면으로 재구성해보면 어떨까. 신체는 공간의 기준점이 되며, 신체의 이동이 공간을 생산한다. 그리고 이때 추상화된 『지역의 사생활』은 공교롭게도 김주하 평론가가 제안한 “공간탐색(Navigating space)”의 만화 형식과 유사한 경로를 따른다. 공간탐색 만화는 공간이 배경을 초과하며 그 자체가 주제가 되는 만화이다. 그것의 내러티브는 공간과 상호작용의 총체로서, 인물이 자신을 둘러싼 공간을 탐색함으로써 증식 된다.
그래서일까. 『지역의 사생활』의 주인공들은 마치 공간탐색의 무의식을 따르는듯 각자의 지역을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지역의 사생활』의 공주를 방문해보라. 네 명의 주인공들은 말 그대로 백제 문화제의 공간을 탐색하고 있다. 처음 그 곳은 파편적으로 제시되지만 이윽고 주인공의 이동이 공간 곳곳을 이어감에 따라 백제문화제는 의미로 가득 찬 구체적 공간으로 변모한다. 다음은 공주에 이어 『지역의 사생활』의 부산으로 이동해보자. 진 시장, 밀면 간판, 시내버스 표지판을 경유하여 광안대교 앞 해변에 다다르는 주인공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런데 이 일련의 이미지들이 인상적인 건 단지 시각적 재현의 엄밀함 때문만은 아니다. “분노, 폭력으로 몇 번이고 허물어진”집에서 흘러나온 주인공이 촉각으로 축적된 이미지들로 내면의 지도를 함께 그려내기 때문이다. 이제 이 글의 마지막 종착지 『양산:키르케고르와 법구경』. 주인공은 생전 처음 통도사에서 기도를 한다. 그런데 주인공은 여기서 소원을 빌면 실패해도 조금은 덜 슬플 것 같다고 말한다. 왜 그럴까. 이어서 “신이 나를 굽어 살피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탓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라고 이유를 밝히지만 왠지 진짜 이유는 따로 있는 것 같다. 주인공이 기도하기 전 동선을 따라가 보자. 자신의 모습이 소실점으로 수렴돼도 절에 이르지 못하는 긴 산책로를 지나 일주문과 천왕문의 프레임을 통과한 후 다음 하로전(下爐殿)과 중로전(中爐殿)이 에워싼 공간에 진입하여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에 도달한다. 주인공이 마침내 키르케고르의 실존적 공간에서 법구경의 명상적 공간으로 이행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