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의 공간, 시간의 콜라주: 『여기서』의 크로노토프

by 오혁진

여기, 이 공간에는 어떤 유령이 떠돈다. 공간과 유령의 관계를 고려하자면, 아마도 많은 이들은 고딕 소설의 음산하고 불길한 성을 떠올릴 테다. 초기 고딕 소설 『오트란토의 성』, 『우돌포 성의 비밀』 등은 오래된 성과 수도원을 배경으로 미로 같은 통로, 비밀의 문, 숨겨진 방, 밀실공포적인 지하실이 차례로 전개되면서, 주체의 상징계적 구조에 틈(gap)이나 구멍(hole)을 내는 실재계(the Real)를 난입시킨다. 성이 아닌 퇴락한 대저택으로 주요 무대를 바꾼 『어셔가의 몰락』에서도 과거와 현재가 얽히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공간적 주제는 여전히 반복된다. "다 허물어져 가는 황량한 벽"과 "사람들의 공허한 눈들을 연상시키는 창문들"로 축조된 대저택은 주인공에게 친숙했지만 낯설어진 대상들, 예컨대 "천장의 조각품, 벽 위의 태피스트리, 바닥 위의 검은 흑단, 걸을 때마다 달가닥거리는 환영 같은 갑옷"으로 채워지며 종국에는 억압된 것의 귀환이 발생한다.


공간과 유령론. 물론 토마스 엘세서의 "유령적 매체(spectral medium)”를 염두에 둔다면 영화 공간에서 떠도는 실체 없는 빛의 환영에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이 극장에 귀신이 있는 것을 아시나요? 이 극장에 귀신이 있어요...”라는 말을 남기고 복도에서 한 남자가 사라지는 <안녕, 용문객잔>을 떠올려 보자. 과거의 시간에 묶인 영화관 복화대희원(福和大戱院)은 폐관을 앞두고 자신과 함께 쇠락한 <용문객잔>(1968)을 상영한다. 곧 사라질 이 공간은 정말로 유령이라 할 존재들로 들끓는다. 노출 시간을 길게 늘려 움직이는 대상이 사라지게 하는 초기 사진처럼, 느릿하게 유영하는 롱테이크를 통하여. 게다가 <안녕, 용문객잔>에서는 프레임 안의 프레임으로 서로 다른 충위의의 존재들이 조우하기도 하는데, 노배우 먀오티앤(苗天)과 스쥐앤(石雋)은 스크린으로 과거 자신들을 불러내고, 발 저는 매표소 여인은 문을 열고 검은 방에 구멍을 내어 스크린의 여인과 중첩된다. 끝으로 기억과 과거에 관한 <지난 해 마리앙바드에서>를 이야기해보자.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그들이 작년에 만났으며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돌아왔다고 말한다. 문제는 여성이 남성의 기억과 과거를 전적으로 부인한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마리앙바드는 조각처럼 놀라우리만큼 정적인 사람들에게 숨결을 불어넣으며, 기억과 과거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무대가 된다. 여러 사건과 사람들이 유령처럼 스크린에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되풀이하고 과거와 현재, 기억과 환상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요컨대 서술적 의식이라 할 카메라와 내레이션이 기억과 과거의 계열체를 초월적으로 결합하며 시간과 서사의 선형성을 와해시킨다.


이와 같은 유령론으로 무엇을 가리킬 수 있을까? 유령의 존재론으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가정들, 즉 존재와 비존재, 현전과 부재 같은 이분법적 경계의 무화 그리고 과거가 현재에 침투하고, 현재 속에 과거가 공존하는 비선형적 시간으로의 이행 등을 탐구할 수 있다. 리처드 맥과이어의 『여기서』(Here)에 관한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고딕소설의 성과 대저택, 용문객잔과 복화대희원, 마리앙바드의 호텔과 정원을 유령처럼 떠돌아다녔던 이유도 바로 그래서다. 하지만 다소 난해한 『여기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여기서』는 시점이 고정된 공간(집의 거실)을 두 페이지에 걸쳐 옮겨놓은 후,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공간의 양상을 보여준다. 공간은 고정된 채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자유롭게 이동시키며 동일한 공간 내에 다층적 시간을 중첩시킨다. 『여기서』는 시간성과 공간성이 교차하는 만화이다. 따라서 떠도는 유령의 기원과 함께, 시공간의 형식 ‘크로노토프(chronotope)’와 이를 형상화하는 ‘만화 매체’의 관점에서 『여기서』를 고찰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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