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 칸딘스키*의 「구성(Compositions)」, 「즉흥(Improvisations)」 연작을 바라보자. 캔버스 전체에 확산한 선의 율동과 색채의 울림에서 많은 이들은 음악적 감각을 경험할 것이다. 실제로 칸딘스키는 이에 관해 “음악이 자연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듯이 회화 역시 자연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며 리듬, 반복, 음색, 가락과 같은 음악의 요소들이 구상화의 매개로 사용되는 것처럼 회화도 음악과 유사한 예술이 되어야 한다”*라고 언급한다. 다음은 악보를 연상시키는—나의 경우 칸으로 짜인 만화 페이지가 떠오르는— 파울 클레*의 「다성 음악(Polyphony)」과 「리듬에 관하여(Rhythmic)」이다. 파울 클레는 수평적으로 멜로디가 전개되고 동시에 수직적으로 화성을 이루는 다성 음악을 구현하고자 노력하며, 자신의 회화에 색채의 대위법적 구성으로 시각적 리듬을 창출한다.
당연히 회화만이 음악에 매혹된 유일한 시각 매체는 아닐 것이다. 만화라는 매체 역시 그러한데, 예를 들어 윌 아이스너*는 만화에서 칸을 시간 조절과 전달의 기본 단위로 삼으며 이러한 관점에서 칸과 음표를 대응시켜 만화를 일종의 악보로 인식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크리스 웨어*는 자신의 작업 메커니즘을 설명하기 위해 음악과 건축의 유비(類比)를 끌어온다. 특히 “건축은 얼어붙은 음악이다”라는 괴테의 격언에 영감을 받아, 만화 창작 과정을 음악 작곡 행위에 비유하며 두 경우 모두 ‘경험의 조각을 취해 시간 속에 얼려 두는 것’에 관심이 있다고 말한다. 그 밖에도 음악과 만화의 관계를 논의할 때 재즈, 힙합, 클래식, 밴드 음악 등을 소재로 한 수많은 음악 만화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만화는 이처럼 음악이라는 매체를 자연스럽게 포섭하는 것만 같다. 하지만 음악과 만화의 관계는 자명하지 않다. 만화는 본질적으로 무성의 매체다. 다시 말해, 만화는 시각적 매체이기에 청각적인 음악을 직접적으로 전달할 수 없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소리를 가지지 못한, 소리를 전하지 못하는 만화의 특성은 음악과 상호작용을 하는 데 있어 치명적 결함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러한 한계는 만화의 새로운 미학적 지평을 열어준다. 물론 현재 웹툰을 포함한 디지털 만화는 시청각적 매체로 진화하고 있으며, 만화가이자 음악가인 르나르(Renard Queenston)*의 경우 만화와 공연을 결합하여 음악과 만화 사이의 확장된 지형을 탐색하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다소 시대착오적으로 무성 영화를 옹호한 루돌프 아른하임처럼 ‘무성 매체’로서의 만화를 옹호하고자 한다. 침묵하는 만화는 음악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어떤 생산적 논의를 도출할 수 있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음악의 시각화로 형성되는 기호화와 추상화, 칸과 페이지 구조를 기반으로 창출되는 리듬감 그리고 시각, 청각, 서사가 융합된 총체적인 음악적 경험일 것이다.
*이후의 내용을 읽으시리면 수고스럽더라도 <TYA 레이어>를 방문해주세요 :)
[평론] 보이는 음악, 들리는 만화: 무성 매체의 음악적 상상력 – thereyouare (ty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