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무조건, 됐다고 할 때까지
어제 외근을 다녀온 팀 후배 A가 아침부터 얘기 좀 하잔다. 커피숍에 가서 얘기를 나눠보니 잔뜩 화가 나 있었다. 화가 난 이유는
1. A는 어제 B 팀장과 외근을 갔다.
2. 같은 팀의 막내인 C는 사무실에 있었다.
3. C와 관련된 작업이 잘 안돼서 A가 수정 요청을 했다.
4. C가 전달해준 파일에 오류가 있어 다시 요청했다.
5. C가 테스트를 제대로 안 해서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그래서 작업을 못 끝냈다.
6. 사실 A보다 C가 외근을 갔어야 하는데
7. B 팀장도 이 일 때문에 화가 났다.
8. 다음날 C는 누구에게도 죄송하다, 고생했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듣고 보니 화가 날만하다. 너 때문에 선배들이 이렇게 고생했는데 한마디도 안 해? 그거 하나 똑바로 테스트 안 하고 보내서 이렇게 고생시켜? 너가 갔어야 하는데 다른 사람이 가서 이렇게 고생했는데 미안하지도 않니?
우리 팀 인원만 있었다면 좀 나은데 다른 팀 팀장도 같이 고생했는데, 여기저기서 두루두루 욕먹기 딱 좋은 상황이다. A 후배는 C에게 직접 얘기하려다 나에게 먼저 얘기한 거다. 현명한 선택이다. 내가 중재자 역할을 맡기로 했다.
C를 불러서 상황에 대해 얘기를 했다. 그렇게 까지 화낼 일인 줄 몰랐다고 한다. 음... 세대가 달라서 그런 건가? 내가 꼰대라 그런 건가? 누군가 나 때문에 고생했다면 한마디 정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C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해해 보기로 하고 차분히 설명을 했다. 서로의 입장에 대한 얘기를 하다 보니 길어졌지만 C도 수긍하고 A와 B팀장에게 음료수 하나 갖다 주면서 사과를 했다. 후배가 그렇게 사과하는데 안 받아줄 선배는 없다. 그렇게 별일 없었다는 듯 지나갔다. C가 다음날 고생하셨다, 죄송하다 한마디만 했어도 이렇게 감정 상할 일 없었는데.
직장 내에서의 사과는 중요하다. 오랜 시간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감정 틀어지면 나만 힘들어진다. 요새는 꼰대 이슈 때문에 선배가 후배한테 별 얘기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경우도 많다. 문제는 그렇게 감정만 상한 채로 넘어간다는 것이다. 사과하는데 오래 걸리지 않는다. 그리고 직장이라는 특수성-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관계 때문에 사과는 금세 받아들여진다. 내가 생각하는 직장 내 사과의 법칙에 대해 기술해 본다.
독일은 유태인들에게 그들이 됐다고 할 때까지 사과한다고 한다. 그래도 유태인들 안 받아준다. 사과받아버리면 그들이 잘못했고 사과했고 받아줬고 이렇게 끝나버리는 역사가 되니 끝까지 안 받아준다.
사과는 상대방이 그만해도 된다고 할 때까지 하는 게 맞다. 하지만 직장 안에서의 사과는 쉽게 받아들여진다. 기억해야 할 역사도 아니고 영원히 볼 사람도 아니고 또 빈정 상해 있으면 서로 피곤하기에 적당히 사과하면 곧 받아준다. 진심으로는 안 받아줘도 겉으로는 쉽게 받아준다. 됐다고 할 때까지 몇 번이고 사과하자. 사과도 처음 한 번이 어렵지 두세 번은 쉽다. 상대방의 진심까지 움직일 필요는 없지만 몇 번이고 사과하는데 꽁해 있을 사람은 없다.
사과는 타이밍이다. 늦게 할수록 효과는 떨어진다. 상대방이 나에게 나쁜 감정을 키우기 전에 싹을 잘라야 한다. 최대한 빨리 사과하자. 요즘 전화 안 쓰는 직장인 있나? 당장 만날 수 없다면 전화 통화로 사과하자. 요즘 카톡 안 쓰는 직장인 있나? 단, 메신저는 뉘앙스 전달이 어려워 효과가 떨어진다. 그래도 전화가 부담되면 1차는 카톡으로 사과하고 2차로 직장에서 만나 직접 사과하자.
가볍게 커피라도 한잔 사주면서 사과하자. 먹을 거 앞에 호랭이 없다.
이등병 때 들었던 명언이 생각난다. '니가 뭔가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된다면 그냥 하지 마' 아직 군대 문화에 익숙지 않은 이등병에게 할지 말지 고민이 생긴 다는 건 문제를 일으킬 확률이 높기에 아예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럼 평타, 중간은 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난 얼마나 많은 고민을 깨고 해 버렸던가.
사과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된다면 그냥 해버리자. 상대방이 사과받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럼 된 거고 사과받을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면 그럼 또 된 거다. 어쨌든 애매하면 사과하는 게 나도 속편 하다. 할까 말까 고민하는 거 자체가 에너지 낭비고 시간 낭비다.
그럴 때가 있다. 내 생각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상대방은 전혀 다르게 오해하고 있는 경우. 그렇게 해서 오해가 생겼다면 그건 무조건 내가 잘못한 거다. 상대방이 오해를 하게 행동한 내가 잘못이지 내 마음과 다르게 받아들인 상대방이 틀린 게 아니다. 무조건 상대방의 생각이 맞다. 속 편하게 사과하자.
누구나 직장 내 싫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면 그 사람도 나를 싫어하고 있을 것이다. 싫어하는 사람한테 사과하는 게 제일 어렵긴 하다. 싫은 사람한테도 먼저 사과하고 그 인간보다 쿨한 내 모습을 보여주자.
선배나 동기한테 사과하는 건 상대적으로 쉽다. 하지만 후배한테 사과하는걸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는 그냥 넘어가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뜨거운 여름날 호프집 먹태처럼 질겅질겅 씹히기 딱 좋은 선배의 모습이다. 후배한테 잘못한 게 있으면 무조건 사과하자. 오히려 선배, 동기보다 더 민감하게 사과해야 한다. 후배는 아랫사람이 아니라 직장 동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