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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희 Apr 06. 2021

근속 10주년, 혼자 떠난 제주여행

애써 무엇하지 않음

1. 근속 10주년과 10일 휴가

회사에선 근속 10주년이 되면 10일짜리 휴가를 준다. 작년에 10주년을 채웠고 1년 안에 써야 하는 휴가이기에 3월 중순이 한가해서 그때 쓰기로 결정했다. 휴가 때 뭘 할까? 장기 휴가에 익숙하지 않은 대한민국 직장인에게 긴 휴가도 당황스럽다. 와이프가 혼자 어디 다녀와도 된다는 대사면령이 내려져, 그래 그럼 여행을 가기로 결심했다. 참고로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점착성 인간이라 혼자 떠나는 여행은 인생 40여 년 만에 처음이다.    


한때는  10일 휴가로 뉴욕을 갈까? 샌프란시스코를 갈까? 고민을 했는데 그런 고뇌와 비용을 덜어준 코로나에게 감사(?)를. 


그럼 다음 후보지는 어디인가? 속초, 강릉이 있는 강원도를 염두에 뒀는데 거기까지 가려면 운전을 해야 한다는 스트레스와 그 당시 계속되는 강원도 쪽 산불로 포기했다. 그러면 남은 곳은 그마나 이국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제주도. 제주도를 가기로 결심했다.

 


2. 여행 컨셉  

이번 여행 간에 컨셉이 있으니 바로 '애써 무엇하지 않음'이다. 해외여행을 갔을 때 서양인들을 보며 가장 부러웠던 건 그들의 여유다. 호텔 수영장의 썬베드에 누워 낮잠을 자거나 독서를 하고 있는 그들의 여유로움이 너무 부러웠다. 그래서 나도 똑같이 해야지 하고 마음먹고 가면 아침 7시에 기상해서 바로 조식 먹고 수영장에 가서 한 시간 놀고 다음 목적지로 이동해야 직성이 풀린다. 나만 그런가? 하고 보면 같이 간 한국인들 다 그렇다. 아마 대부분 짧은 일정으로 여행을 왔기에 여유가 없는 것이리라. 그와 달리 서양인들은 몇 주씩 휴가가 가능하니 그런 여유로운 여행도 가능한 거겠지.  


그래서 세운 컵셉이 아무것도 하지 않기였다. 제주도는 여러 번 와봤기에 특별히 관광할 곳도 없다. 맛집 투어 해봐야 인터넷 추천 입맛과 내 입맛에는 괴리가 크다는 걸 느낄 뿐이다. 이번 여행은 정말 여유롭게 아무것도 안 해보기로 했다. 그래서 렌트도 안 했다. 



3. 오! 함덕!

렌트를 안 하니 지역을 하나 정해서 3박 4일을 계속 머물러야 하는데 바다와 같은 자연이 가까웠으면 좋겠고 밥도 먹고 산책도 해야 하니 번화가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도를 보다가 발견한 곳이 바로 함덕이다.  


 

함덕 (출처 : 네이버 지도)

바다를 끼고 있고 해수욕장과 서우봉이란 오름이 있다. 바다를 중심으로 민가와 여행지가 붙어 있어 산책할 곳도 밥 먹을 곳도 많다. 공항과도 가까워 렌트의 필요성도 없다. 어쩜 이렇게 목적에 딱 부합할까? 함덕으로 가자.



4. I Love 호텔

호텔을 정해야 한다. 난 호텔을 좋아한다. 여행의 절반은 호텔빨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 알쓸신잡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소설가 김영하 님이 사람들이 호캉스를 가는 이유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우리가 사는 공간에는 상처가 있고 그걸 벗어나기 위해 호캉스를 간다는 것이다. 그 말에 백배 공감한다.


집에서는 밥 한 끼를 먹어도 설거지를 해야 한다. 빨래도 해야 하고 청소도 해야 한다. 전기세, 수도세 걱정에 안 쓰는 스위치와 수도는 빨리 꺼야 한다. 집은 편한 공간이지만 그만큼 삶의 고뇌가 있는 공간이다. 그걸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이 호텔이다. 아무것도 안 해도 청소해주고 깨끗하게 유지해 준다. 누가 호텔 가서 전기세, 수도세 걱정하나? 그저 쉬다가 자다가 나가서 먹고 오면 되는 호텔이야 말로 여행의 꽃이라 할 수 있다. 


혼자 떠나는 여행이니 좋은 호텔은 필요 없다. 비즈니스호텔도 상관없다. 그러다 고른 게 '더 아트스테이 제주 함덕' 호텔이다. 홈페이지에서 특가로 3박 4일 14만 원 정도에 이벤트를 하고 있다. 5만 원도 안 되는 머니에 4성급 호텔이라니. 거기다 위치도 바로 바다 앞이다. 객실에 따라 오션뷰 가능.


막상 가보니 이거 좀 애매하다. 4성급은 아닌 거 같고 비즈니스호텔급이다. 그래도 이 정도 가격에 불만 가지면 양아치다. 호캉스의 중요 요소 중 하나는 조식 서비스인데 블로그에서 보니 조식이 별로라 따로 신청은 안 했다. 그런데 아예 조식 서비스를 운영 안 한다. 코로나 때문에 안 한다고 하던데 내가 볼 땐 코로나로 인해 구조조정이 많이 일어난 게 아닌가 싶다. 아픔이 느껴졌다.


내가 배정받은 룸은 씨티뷰, 들어서니 재건축 뷰다. 어차피 기대는 안 했다. 씨티뷰에서 무덤 같은 게 보여 식겁했는데 함덕이 제주 4.3 사건과 관련한 피해자 추모 비석이 많은 것 많다. 그런 비석의 일종이 아닐까 싶다.


재건축 뷰


묘비?인 줄 알았는데 비석인 듯


곳곳에 있던 비석들




5. 이동 이동 이동

렌트를 하면 렌트비용 아까워서 억지로 차를 끌어야 한다. 운전을 좋아하지도 않지만 억지로 어딘가를 다녀야 한다는 건 이번 여행의 컨셉과 맞지 않다. 과감히 렌트는 하지 않았다. 함덕은 공항과도 가까워 택시로 30분이면 갈 수 있다. 왕복 택시비를 해도 렌트 비용보다 싸다. 첫날은 택시를 탔고 돌아올 때는 급행 버스를 탔다. 교통비로만 왕복 2만 원 정도 썼다. 좋다.


호텔 앞의 바다. 날씨가 흐리다.



6. 먹자

제주도 맛집을 검색하면 어마어마한 정보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된다. 막상 가서 먹어보면 욕 나오는 경우가 태반이다. 차까지 끌고 가서 먹었는데 그 모양이면 더 짜증 난다. 이번 여행에서는 맛집 검색은 별로 하지 않고 발길 닿는 대로 먹고 왔다. 함덕은 관광지와 민가가 같이 붙어있는 곳이라 관광지 맛집도 있고 여행자들이 좋아하는 로컬 식당도 많았다. 그래서 좋았다. 


가벼운 맥주와 수제 버거.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게 점심에 한잔.


고기국수 빠질 수 없고. 국물만 괜찮았다.


짜장은 보통인데 곱빼기의 양, 탕수육은 소자인데 대자 같은 양. 남기고 돌아섰다.


어딜 가나 스벅 사랑.


가장 많이 이용한 건 편의점. 제주 물가에 놀란 가슴 달래주는 편의점.



7. 일출 도전

어제의 태양은 오늘과 같고 오늘의 태양은 내일과 같은 것인데 일출을 보겠다고 낑낑대는 사람들을 난 이해할 수 없다. 일출을 보며 소망한 것들이라고 더 잘 이뤄지나? 그런데 이날만큼은 나도 일출에 도전했다. 


전날 도착 후 시차 적응(?) 때문에 피곤했는지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다음날 새벽 5시쯤에 눈이 떠졌다. 일출 보러 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에라이 한번 보고 오자 하고 나갔다. 인근의 서우봉이 일출 감상 명소란다.


새벽의 함덕 메인 스트릿


서우봉 오르는 길


서우봉이 높지는 않은데 운동으로 다져진 내 몸도 할딱거릴 만큼 경사는 제법 가파르다. 거의 정상에 도착했는데 더 이상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 구분이 안된다. 그냥 봤다 치고 내려가자 하고 내려가는데 이 새벽에 누군가 올라온다. 갑자기 경쟁심이 생겨 내려오던 길을 다시 올라갔다. 


정상에 오르니 두세 팀 정도 이미 와서 자리 잡고 있다. 일출 방향으로 의자도 몇 개 놓여있다. 앉아 있으니 두세 팀 정도 더 왔다. 어린이 둘을 데리고 온 가족도 있었다. 대단 대단.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태양은 보이지 않는다. 이미 일출 시간도 지났는데, 날도 밝아 오는데. 한두 팀 내려가기 시작한다. 첫 도전은 가볍게 실패하고 나도 하산.


Where is the sun?



8. 미스터리 물고기 밭

물 반 고기반. 이런 문장이 가장 잘 어울리는 장소가 있다. 함덕 시외버스 터미널 옆에 작은 하천이 있는데 여기가 완전 물고기 밭이다. 지나가다 우연히 발견했는데 물고기가 얼마나 많은지 징그럽다 느껴질 정도다. 작은 치어부터 손가락 마디 정도의 물고기들이 바글바글하다. 민물인지 바닷물인지 모를 다소 더럽게 느껴지는 하천인데 웬 물고기가 이리 많은지. 매우 미스터리 한 장소다. 지나갈 때마다 유심히 들여다보게 된다.


 

물고기 천국 위치 (출처:네이버 지도)


 

물고기 천국 세로 뷰


환타스틱 1


환타스틱 2



9. 여행 중 가장 많이 한 일

호텔에서 책 읽다가 라디오 듣다가 유튜브 보다가 낮잠 자다가 밥때 되면 나가서 밥 사 먹고 걸으며 돌아다니고. 이게 여행 중 한 일의 전부다. 특별한 건 없는데 특별한 게 없어서 특별했다. 아무것도 안 하기가 힘들다. 뭘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계속 괴롭힌다. 그런데 하루 이틀 지나니 그런 생각도 없어지고 자연스레 내려놓기가 가능해진다. 뭘 안 해도 이렇게 좋구나. 


지붕이 예뻤던 가게


해수욕장에 붙어 있던 인기 많은 카페


서우봉과 갈매기s


개성 있는 가게명 1


개성 있는 가게명 2


넓은 공원


공원 한편에 유격??


서우봉에서 바라본 저녁


호올스


독특한 야외 여탕


아무 집 마당에나 탐스럽게 열려있는



10. 애써 무엇하지 않음

애써 무엇하지 않아서 특별했던 이번 여행. 성공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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