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생활에 좋은 영향을 끼치는 클래식 공연
'우아한 유령'? 어느 날 유튜브 알고리즘이 아래 영상을 추천해 줬다.
성인이 되어 몇 년간 피아노를 배우기도 했고 유튜브에서 종종 클래식 음악도 찾아 듣지만 대부분 피아노 음악을 듣지, 바이올린은 아니다. 일단 제목이 주는 호기심에 영상을 클릭해봤고 또 금세 멜로디에 빠져버렸다. 메인 멜로디가 머릿속을 계속 맴돌게 하는 중독성 있는 음악이다.
좋으면 찾아봐야지. 양인모라는 바이올리니스트의 음악들을 들어보니 귀에 팍팍 꽂힌다. 클래식 음악들이 한 번에 꽂히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바이올린을 전혀 모르는 바알못임에도 연주가 좋다. 약력을 보니 2015년에 파가니니 콩쿨에서 우승을 했단다. 파가니니가 바이올린으로 유명했던 사람이니 그런 콩쿨에서 우승했다면 대단한 사람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쇼팽 콩쿨에서 우승한 게 2015년. 같은 2015년 우승인데 양인모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본다. 조성진은 월드 클래스 슈퍼스타가 됐는데...
포털에서 검색하니 하남문화예술회관에서 9/5일 토요일에 공연이 있음을 확인했다. 클래식 공연은 안 간 지 꽤 됐고 전혀 관심 없던 바이올린이라 좀 주저된다. 갈까 말까 몇 주 고민하다가 표를 검색하니 매진이다. 음... 너무 쉽게 생각했나 보다. 얼마 후에 혹시나 해서 다시 검색해보니 S석에 자리가 하나 났다. 간혹 취소표가 나오나 보다. 그런데 만약 간다면 앞 자리인 R석에서 보고 싶다. R석에 취소표가 나면 무조건 예매하기로 마음먹었다.
실리콘 밸리의 직장인들은 무언가 새로운 일을 하거나 영감을 얻을 일이 필요하면 공연을 보거나 미술관을 찾는다고 한다. 우리나라 직장인들이라면 새로운 일에 대해 찾아보고 벤치마킹하고 일 자체에 몰두하기 바빴을 텐데 실리콘 밸리는 접근 방식 자체가 다르다. 아마 업무와 관련 없는 그런 다른 활동들이 뇌에 활력을 주거나 아니면 스트레스가 해소돼서 본업에 집중할 수 있게 하는 게 아닐까? 나도 새로운 활동들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종종 업무에 도움이 된다고 느낀다. 고런 핑계로 토요일 프라임 타임에 육아를 포기(?)하고 공연을 보러 가기로 결심을 굳혔다.
허락보다 용서가 쉽다고 했던가? 마침 R석에 자리가 하나 났고 토요일 5시 공연을 예매했다. R석이 5만 원, 이것도 엄청 싼 건데 하남문화재단 카톡 채널을 추가하면 4만 5천 원이다. 수수료 붙어서 4만 6천 원. 이거 완전 혜자 공연이다. 양인모가 어떤 사람이길래 이렇게 공연비가 싼 건가. 와이프도 흔쾌히 허락해줘서 마음의 짐을 덜고 공연을 갈 수 있게 됐다.
서울 끝에서 하남까지 가야 하는데 올림픽대로를 타야 한다. 5시 공연인데 혹시 몰라 3시에 출발. 역시나 막히고 막혀서 1시간 반 걸려서 도착했다. 코로나 시국에 어울리는 여러 단계의 검문 절차를 거치고 예술회관에 입장했다. 그런데 거짓말 조금 보태서 여성의 비율이 90%다. 양인모가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은 건가? 클래식 공연에 원래 여성이 많았던 건가? 아니면 둘 다 인가? 자리는 한 자리씩 띄어서 혼자 앉아야 했다. 객석이 꽉 찼다. 티켓파워 만만치 않네. 내 자리는 무대를 중심으로 우측이다. 고개를 왼쪽으로 좀 돌려야 하는데 그래도 연주자의 정면을 볼 수 있어 나쁘지 않다.
공연 시간은 다가오고 앉아서 기다리는데 무대 안쪽에서 바이올린 조율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오랜만의 공연이라 가슴이 살짝 떨린다. 잠시 후 연주자 등장. 오늘 공연의 대부분은 클래식 기타 아니면 피아노와 듀엣으로 연주하는 거라 기타 연주자와 같이 등장했다. 솔직히 유튜브에서 봤던 양인모는 그렇게 잘 생겼단 생각이 안 들었는데 실물을 보니 잘 생겼다. 베토벤 머리(연주 내내 머리가 바이올린 활에 씹힐까 봐 걱정)에 무대 위에서의 여유, 멋있고 잘생겨 보이지 않을 수가 없다.
파가니니의 곡을 시작으로 연주가 시작됐다. 오늘 프로그램에 있는 곡들은 유튜브를 통해 한 번씩 들어보고 왔다. 공연을 오기 전에는 곡들을 예습하고 오는 것이 좋다. 많이 듣고 알아야 연주가 좋은 지도 안다. 그런데 시작부터 심상치 않다. 졸리다. 오랜만의 연주회 + 커피 한잔 하지 못해서겠지. 고개를 돌려보고 몸을 들썩거려도 계속 졸리다. 경험상 지금의 잠은 절대 달아나지 않을 성격의 것이다. 그래서 과감히 자버리기로 선택했다. 잠깐이라도 자면 이후 공연은 집중해서 들을 수 있다. 잠과 싸워가며 듣는 연주는 안 듣는 것만 못하다. 눈을 감았다 떴다 진짜 잤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으나 잠시 후 정신이 맑아졌다. 그것은 참 좋은 전략이었습니다.
유튜브에서 듣는 음악은 소리가 일정 부분 잘려있다. 딱 필요한 소리만 들어가 있다. 현장에서 들으니 다채로운 소리가 들린다. 연주자의 숨소리도 생생하게 들리는데 그 또한 음악의 일부다. 바이올린은 서서 연주하니 움직임도 많고 역동적이어서 고것 참 멋있네.
두 곡의 연주가 끝나고 무대 시설이 바뀐다. 피아노와 듀엣을 할 시간이다. 그때 양인모 님이 무대에 나와서 마이크를 들고 이런저런 멘트를 한다. 클래식 공연의 딱딱한 틀을 깨는 젊은 연주자의 시도가 참 좋다. 본인이 이번에 발매한 음반에 대한 얘기도 하고 그러면서 프로그램에 없던 곡도 먼저 한곡 연주해 준단다. 보너스 받는 기분이다.
1부가 끝나고 밖에 나가서 바람도 좀 쐬고 근처 카페에서 급하게 아아 한잔 들이켜고 입장했다.
2부의 곡은 예습을 제대로 못했는데 그래도 아름답다.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섬세하게 연주가 자유자재로 변주된다. 보통 초보자에게 연주를 시키면 강한 부분은 세게, 섬세한 부분은 약하게 연주한다. 듣는 사람에게는 아~세게 했구나, 약하게 했구나 티가 확 난다. 세게 와 약하게, 강하게 섬세하게는 완전 다른 것이다. 강하게 와 섬세하게 가 청중에게 설득력 있게 들리려면 곡에 대한 이해를 넘어 작곡가의 심정을 체득해야 하고 또 수많은 연습을 통해 소리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한 마디로 그 일의 프로가 되어야만 청중을 연주로 설득시킬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양인모 님의 연주는 프로의 연주 그 자체다. 프로에서도 급을 나눈다면 아마 최상위권에 속해있으리라.
프로그램상의 모든 연주가 끝났다. 클래식 공연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커튼콜이 이어진다. 관객들의 박수는 끊이지 않고 연주자는 커튼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한다. 나도 오랜만에 진심의 박수를 계속 쳤다. 그리고 앵콜곡이 시작된다. 시작하기 전 인모님이 한 마디 한다.
"여러분이 좋아하시는 '우아한 유령'입니다."
크아악!! 미쳤다. 라이브로 꼭 들어보고 싶었던 곡을 연주해 준다니. 관중석에서도 큰 함성과 박수가 일어난다. 이 남자, 너무 매력 있다. 순간 90년생이 미래임을 느꼈다. 왜 우리는 90년생의 등장을 두려워하고 어려워하고 걱정스럽게 바라보기만 하는가? 어차피 그들이 끌어갈 미래 아닌가. 경직되고 꼰대스러운 한국 문화에 90년생의 다른 생각과 태도는 꼭 필요하다. 그들이 대한민국을 몇 배 더 업그레이드시킬 것이다. 95년생 양인모, 그는 사랑이다.
윌리엄 볼컴이 작곡한 '우아한 유령'은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헌정하는 곡이란다. 어쩐지 멜로디에 애처로움이 묻어 있다. 곡이 끝나고 다시 몇 번의 커튼콜, 그리고 또 한곡의 앵콜곡을 연주하고 공연이 끝났다. 마지막 앵콜곡은 어떤 곡인지 궁금했는데 나가는 길에 창문에 붙여 놓았다. 센스 있네.
밖에 나오니 7시 언저리. 해는 거의 졌다. 차를 끌고 나오는데 어두운 거리에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만 가득하다. 알 수 없는 무언가로 마음이 충만해졌다. 좋구나. 이런 활동들이 직장 생활에 있어 영감도 주고 도움도 주는 게 확실하다. 무엇보다 리얼 프로의 정열적인 모습은 아직 세미 프로도 될까 말까 한 나 같은 직장인에게 큰 자극이 된다.
유튜브 댓글에 '인모니니'라는 얘기들이 많아서 뭔 소린가 했는데 '양인모' + '파가니니'의 약자인가 보다. 인모니니, 인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