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차
누군가를 만난 지 너무 오래되서인가? 그런 기억이 없어진 지 좀 된 듯하다. 굳이 하나 뽑아보자면 못을 구부린 듯 한 팔찌를 놓고 간 친구가 한 명 있었다. 당시 꽤나 그릇된 썸을 타고 있었다.
“근데 너 남친 있잖아.”
“헤어질 거야.”
“그래.”
이상하게 항상 그랬다. 고속터미널역이라는 별칭을 가질 정도로 나는 환승역 역할을 많이 했다. 꼭 남자친구가 있거나 썸을 타고 있는 누군가가 접근하는 그런 이상 망측한 현상. 원한적도 없었지만 이상하게 그런 식으로 다가온 친구들에게 마음을 많이 뺏기고는 했다. 그런 취향이라서 그런 것도 아니었는데 그들이 하는 말은 이상하게 마음을 흔들었다.
“요즘 너무 힘들다.”
사귀고 있는 남자친구의 험담을 하는 그녀들을 볼 때마다 이상한 감정이 맴돌았다. 제 얼굴에 침 뱉기를 하는 것 같으면서도 불쌍해 보이는 친구들이 있었고, 술에 취해 기대는 친구들에게 나도 모르게 마음을 내준 적이 있었다. 지금까지 만난 친구들은 거의 다 그렇게 만난 것 같다. 장기연애를 했던 친구들도. 결혼의 문턱에서 좌절했었던 친구들까지도. 그리고, 어김없이 그런 친구가 찾아왔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또 넘었다.
“이래도 되나?”
“몰라.”
“그래. 모르겠다.”
걸렸으면 진짜 맞아 죽었겠지. 그 친구는 나를 만나면서 이름도 모르고,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는 그 남자애를 정리한다고 했다. 알지 못했기에 미안함도 없었다. 이기적인 인간이라고 할지언정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했다. 그래서 그런지 조금은 천천히 스텝을 밟고 싶었다. 정리하고도 조금은 시간을 가지고 만남을 가지고 싶었다. 그 친구가 나에 대해 얼마나 확신이 있었는지도 알고 싶었고, 나도 그 친구에 대해 얼마나 확신이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 정도 숨을 고를 시간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냥 사귀자.”
“정리는 했어?”
“오빠랑 만나면 정리하려고.”
“난 조금은 더 숨을 고르고 싶은데?”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니야?”
“너는 아니고?”
마음에 짐이 있어서 그랬을까? 우리는 시작하기 전부터 감정을 쌓기보다 이전의 과오를 얼마나 잘 처리하는지에 집중했다. 몇 번이고 집에 온 친구였고, 몇 번이고 선을 넘은 관계였으면서 마지막 양심이라는 식으로 그렇게 저들만의 선을 지키려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나 싶었지만 결국 서로의 속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우리는 서로를 외면했다.
“미안한데 난 그 정도까지는 아닌 거 같아.”
“진짜 너무하다.”
“그렇게 마음대로 안된다고 술 마시고 막무가내로 쳐들어온 게 더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술도 끊는다니까!”
“술 마시라고. 괜찮으니까.”
“어차피 그 집에 내 팔찌 있잖아. 우리 한 번 더 만나서 얘기를 해.”
“XX이한테 전달해 줄 테니까 알아서 받아가.”
그냥 그 친구를 한 번 더 보면 안 될 것 같았다. 알고 있었다. 다시 만나면 흔들릴 것이라는 걸. 내가 감당하지 못할 만한 아이였다. 충분히 매력적이고, 충분히 즐거운 아이였다. 같이 있으면 즐겁고, 같이 있으면 행복했겠지만 당시 우리는 맞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이후로 뭔가 제대로 된 썸조차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지금의 내 상태가 허접하기도 하고, 지금 내가 연애에 신경 쓸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게 아니라 그냥 나만의 이 멍청한 속도와 주저함을 반기는 여자가 없는 느낌이기도 하다.
“그 여자애가 한을 많이 품었나 보네.”
“그러게.”
우로보로스 마냥 둥그런 원을 그리고 있었던 못 디자인의 팔찌. 상대방의 가슴에 못을 밖은 건 나라고 생각했는데 그 못질이 결국에 내 가슴을 찍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가 놓고 간 물건을 들으니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게 그 이상한 디자인의 팔찌였다. 이상하지만 그게 가장 먼저 생각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