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정유정 작가의 소설 <28>을 읽고나서.

by 이그저


흩어져있는 생각들을 괜시리 정리해보고자 다시 책을 폈다.

하지만 몇 장을 무심히 넘기다가 이내 책을 덮는다.


정유정의 <28>은 독자들을 소설 속에 묶어두지 않는다.

당신이 500 페이지에 달하는 내용을 뜬 눈으로 밤을 지새며 순식간에 읽어나갔다면, 그대로 덮어두어도 좋다. <28>은 철저히 바깥 세상으로 사람들의 등을 떠미는 소설이다. 책장에 고이 꽂아두고 미소지으며 가끔씩 꺼내어보는 그런 책이 아니라, 미련 없이 다른 사람의 손에 쥐어주게 되는 책이다.

하지만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진 않는다. 오히려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다.

'빨간 눈'으로 밖에는 설명 불가능한 존재하지 않는 질병 때문에 벌어지는 '화양'이라는 허구의 공간 속 이야기는 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우선 멈추고, 숨을 고를 시간이 필요하다.

아무것도 몰랐거나, 모르고 싶었거나, 모를만하다고 생각했거나. 책을 덮기 직전까지 우리는 '화양 바깥'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내 가방에 있던 <28>을 보고, 친구는 “이 책 재밌냐”고 물어왔다.

머릿속에는 많은 말들이 떠올랐지만 정작 내 입 밖으론 “볼만해”라는 간단한 말이 나왔다. 무슨 내용인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화양이라는 도시에서 인수공통전염병이 도는데 그 가운데 놓인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쉽게 알려줄 수 있었지만, 그 말을 해주면 “읽어보고싶다”가 아닌 “그렇구나”라는 답이 올 것 같았다.

사실, <28>은 그다지 신선한 이야기는 아니다. 제한된 공간 속에서 원인 모를 질병이 퍼지고, 그 속에서 펼쳐지는 아노미 상태, 그리고 폭발하듯 터지는 잔혹한 인간의 본성,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댈 수 있는 어떤 희망.

그렇기 때문에, 책의 줄거리로 다른 사람의 입맛을 당기는 건 난관이다.

이미 많은 비슷한 이야기들을 보아온 우리다. 분명 ‘재미있는’ 이야기긴 하지만, 문제는 딱히 ‘할말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책을 덮고, 생각들이 머릿 속을 떠돌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이 소설이 화양이라는 공간 ‘속’의 이야기로 현실이라는 ‘바깥’을 가리키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소설에 대해 ‘조금은’ 이야기해볼 수 있다. 푸념일까. 떠도는 생각들을 하나씩 잡아보자.


C1A4C0AFC1A42811.jpg 정유정 작가의 소설 <28>.


펜을 들어 뭔가 있어보이는 문장에 꼼꼼히 밑줄치던 짓을 그만두고, 화양의 긴박함 속에 들어갔을 때 나는 수도 없이 “도대체 왜 끝까지 일을 그만 두지 않는거야”라며 눈 앞에 없는 인물들에게 혼을 냈다.

물론 “무섭다고 집 안에만 처박혀 덜덜 떨고있으면 주인공이 될 수 없었겠지”라며 그 답답함을 지우려고 노력하면서.<28>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아노미 속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일을 놓지 않는다. 수의사인 재형, 간호사인 수진, 소방대원인 기준, 사회부 기자인 윤주 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인물들(경찰인 박주환, 소방대원인 유반장)까지 모두가 ‘살아남는 것’이 유일한 목표인 상황 속에서 각자의 직업이 ‘해야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들의 주변 사람들이 모두 ‘빨간 눈’으로 죽어갈 때, 그들은 운 좋게도 살아 ‘남아가고’ 있는 ‘유일한’ 수의사이고, 간호사이고, 소방대원이고, 기자이다. 그 ‘유일함’이 그들을 붙잡아 둔 것일까. 하지만, 시청광장에 모여있던 사람들과 화양을 떠나려고 했던 사람들 모두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직업을, ‘해야할 일’을 버릴 수 있었던 건 왜일까.


<28>의 주요 인물들은 모두 ‘삶’과 가까운 직업을 갖고 있다. 단순히 ‘어떤 삶’을 사느냐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경계, ‘삶의 끝자락’에 놓여 있는 것이다(기자인 윤주 또한 화양에서 화양 밖의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림으로써 화양 안 사람들을 살릴 수'도' 있는 가능성을 쥐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직업이 결국 그들을 의도와는 무관하게 ‘생명에 대한 책임감’을 갖게 하는 것이다. 도무지 마음 주기 힘든 인물인 박동해가 자신의 ‘해야할 일’을 진작에 때려쳤기 때문에, 즉 그를 묶어둘 만한 울타리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 있었다는 점도 연결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광기어린 폭력을 이어나가는 박동해를 보며 ‘듣도 보도 못한 미친놈’이라고 욕하지만, 결국 모두가 미친 상태인 화양에서 박동해는 ‘어쩌면 가능한 미친놈’이 될 수 있다(작가는 박동해의 어린 시절상처들을 쉼 없이 보여주면서 이러한 가능성을 더 열어놓는다). 차라리, 자신의 직업을 내려놓지 못하는 다른 인물들이 더 ‘미친’듯이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끝까지 열심히 일한 건 똑같은데, 왜 죽음이라는 검은 안개는 재형과 수진에게로 향했을까.

굳이 인물들에게 우리가 삶과 죽음의 카드를 나누어줄 수 있었다면, 적어도 그 둘에게만큼은 죽음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이 소설을 읽고나면 ‘오히려 누구에게 죽음을 주겠다’라고는 차마 할 수 없다).

개 떼에게 사랑하는 부인과 딸을 잃은 기준은 결국 스타에게 그 분노를 푼다. 평생 잊혀지지 않을 슬픔이지만 어쨌든일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된다. 진실을 밝혀야한다는 직업의식으로 윤주는 “빨간 눈이 인수공통전염병”이라는 특종과 함께 화양을 고립시켜버린다. 자신도 그 속에 갇혔다는게 문제이지만 어쨌든 그녀는 여전히 특종을 할 수 있는 기자로 일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된다. 끝까지 자신의 직업을 지킨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사실 아노미 속에서 단 한 번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한 적이 없는 인물은 재형과 수진이다. 사랑하게 된 윤주와 함께 있지 못하고 끝까지 링고를 쫓아가 더 이상 복수의 순환이 계속되지 않도록 하는 재형과 아버지와 남동생의 생사 여부가 궁금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수용소에 남아 시신들을 지키는 수진은, 결국 죽는다.

기준과 윤주가 각각 자신의 직업이 해야할 일에 따라서 기계적으로 일을 해나가건, 혹은 재형을 만나 깨닫게 된 새로운 가치를 따라서 일을 해나가건 그들은 ‘그 순간’ 그들의 직업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생명에 관여하게 되었을 뿐이다.

이에 반해, 재형과 수진은 ‘그 순간’ 직업이 요구하는 바를 뛰어넘어 생명을 끝내 물고 늘어지는 ‘책임감’을 가진 것이다. 그랬던 그들이 결국 죽게되리라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래도’ 살수 있지 않을까(살 수 있었던 기회는 충분했다)며 하지만 죽어버린 그들을 보며, “결국” 하는 탄식을 내뱉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허탈함과 숙연함. 덮인 책을 휘감고 있는 이 ‘바깥 세상’은 결국 이런 것일까. 우리에겐 화양이 없는 것을 감사하게 여기며 신께 절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


<28>의 다른 한 쪽엔 개가 있다. 이 소설이 특별한 점은 형식상 6개의 시선 중에서 링고라는 개의 시선을 함께 쓰고 있다는 점이 아니라, 가장 ‘개답지 않은 개’인 링고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우리에게 이쁨받는 성격, 이른바 ‘훈련잘된 개’들은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 소설의 주인공 격인 쿠키, 스타, 링고는 사람과 친밀한 순서대로 죽음을 맞이한다. 겉으로 보기에도 도무지 개라고 볼 수 없고 늑대, 맹수처럼 보이는 링고가 가장 오래살아 남는다. 개는 ‘반려동물’이라 불리며 인간의 삶과 함께 ’할 수 있는’ 친근한 동물이다(‘여겨진다’라는 표현이 무색할 만큼). 하지만, 여전히 개와 인간은 일방적인관계이다. 끊임없는 관심으로 무엇을 주어야만 개는 인간을 따른다. 참으로 위태로운 관계다. 사람들은 이러한 관계의 위태로움을 알기 때문에, 개들에게보다 맛있는 것을 먹이고, 좋은 것을 입히며 열심히 훈련시킨다. 마치, 너와는 다른 ‘인간’으로 인정받고 싶은 것처럼. 하지만 링고는 친근함이 순식간에 변할 때 생기는 두려움을 알고 그 점을 이용해서 인간을 대한다. 사람들은 그렇기 때문에 생김새뿐만 아니라 링고의 성격이 ‘개답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다. 링고는 자신의 빛이었던 스타의 죽음에 분노하고 복수를 한다. 소설을 읽다보면, 점차 링고 파트가 개의 시선이 아니라, 인간의 시선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느끼게 된다. 오히려 그 분노가 더 ‘인간답다’라고 여겨지기까지 하니. 동시에 무참히 개들을 파묻는 사람들은 ‘개같은놈들’이다.


“나는 때로 인간없는 세상을 꿈꾼다. 모든 생명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세계”라던 재형은 아이러니하게도 동물들의 삶과 죽음의 경계에 관여하는 수의사이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나는 결코 거기에 가지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는 동물들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 인간이 사실은 나약한 존재임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세상에서 인간은 살아남을수 있을까.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 안도감을 느껴야하는 것일까.

링고와는 반대로, 재형은 말투나 사람을 보는 시각에 있어서 참 ‘개같은 사람’이다. 인간같은 개와 개 같은 인간. <28>에서 우리는 단순히 개를 몰살하는 것에 분노하는 것을 넘어, 개와 인간을 같은 높이의 테이블에 나란히 놓고 지켜볼 수 있는 시간을 부여받는다.

자, 모든 개는 죽었다. 가장 개같은 인간도 죽었다. 살아남은 건, 재형을 이해하고 따를 기회가 있는 ‘희미한 구원’의 윤주와 재형의 죽음과 자신의 생명을 맞바꾼 ‘묵직한 죄책감’의 기준이다. 그리고, 덮여진 책 앞에 멍하니 앉아 있는, 결국 화양 밖의 사람이었던 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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