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by 이그저



작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는 생애 마지막 몇 달간 어린아이가 되어갔다.

속이 좋지 않은 이유로 가게 된 병원에서 우연히 '치매'라는 진단을 받으신 후, 명백한 증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손주들의 이름을 헷갈려 하시기 시작하더니,

1시간 전에 했던 전화를 잊으시곤 바로 또 전화가 걸려왔고,

몇 년 전 일을 마치 어제 일처럼 말하셨다.


하지만 소위 '착한 치매'라고 불리는 축에 속하셔서 주변 사람들을 물리적으로 힘들게 하진 않으셨다.

우리가 참아야 할 것은 단지 반복되는 말을 처음 듣는 것처럼 반응해야 하는 것 뿐이었다.


시간이 좀 지난 후에, 외할머니는 30대의 상태로 돌아가 있었는데

그 당시 유난히 할 말이 쌓여 계셨던지 한 번 대화를 시작하면 3시간은 족히 고개를 끄덕거려야 했다.

나는 외할머니의 그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문제라면, 한 이야기가 3시간동안 10번 정도 반복된다는 것이었지만.


외할머니의 이야기는 대개 시집오고나서 겪은 고생담이었다. 그 이야기는 이렇다.


외할머니의 표현에 따르자면 '부잣집 딸내미'로 곱게 자란 자신이 6.25 전쟁으로 인해 집이 다 불타 버린 탓에 재산의 대부분을 잃고, 가난한 홍씨네 집안에 시집을 오게 되었다. 당신의 남편은 셋째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이기적인 형들을 대신하여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는데, 시아버지는 엄청 까탈스러운 분이셨다. 매 끼니마다 반드시 고등어 반찬이 상에 올라가야 했는데, (손으로 직접 보여주시며)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크기로 고등어를 잘라야 하는 것이 필수 조건이었다. 어느 날은 너무 배가 고파서 밥을 지으면서 몇 숟가락 먹었는데, 그걸 보시고는 노발대발하셔서 그 날은 저녁밥을 굶어야 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자랄 때 집에 머슴들이 있었고, 나를 모시는 아이가 한 명 있었는데 그 아이는 항상 나를 '뽀얀 첫째 아씨'라고 부르곤 했다. 그런데 그런 우리 집이 6.25 전쟁으로 인해 재산의 대부분을 잃고, 가난한 홍씨네 집안에...

그렇게 여러 번의 반복.


나의 유년 시절의 여러 기억 속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품에서 그들의 옛날 이야기를 들었던 시간이 있다.

하지만 어느샌가 "옛날이야기 좀 해주세요."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신기했던 그 이야기들이 자꾸 들어서 지겨운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아픈 외할머니를 보살핀다는 명분 하에, 그 지겨움을 참을 수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 때를 내가 '재미있었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그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었던 것보다는,

왜 하필 이 이야기가 반복되는지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치매라는 병으로 인해, 삶의 기억들이 계속해서 사라지는 와중에도

외할머니가 왜 그 때의 기억만은 고등어 크기마저 생생히 표현할만큼, 명확히 기억하는지가 흥미거리였다.


누군가가 "옛날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을 때, 끄집어내는 기억들은 그만큼 자신의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큰 사건이거나 전환점일 것이다.

그러나 옛날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말하지 않게 된 어느 시점에서부터, 우리는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놓아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이야기가 오고가는 대화는 대개 유년 시절에서 그치고 말기 때문에, 우리에게조차 그 이야기는 단지 아득한 추억이 된다.

그리고, 나누게 되는 대화는 단지 공부는 잘되고 있는지, 대학은 잘 갔는지, 또 취직을 잘 했는지, 결혼은 언제 할건지와 같은 안부 뿐이다.

같은 공간에 살고 있는 부모님과의 대화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선은 학창시절에 학교와 학원을 전전하느라 대화를 나눌 시간이 충분하지 않고, 대학과 취직이라는 일상에 들러붙은 어떤 목적 때문에 대화는 그 곳에 머물게 된다.

대화가 많은 편인 집이라 하더라도, 대개 자녀들인 우리들의 일상은 대화의 주제가 되곤 하지만

부모님의 현재 상황이나 과거를 듣는 시간은 그에 비해 적을 것이다.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들려오는' 옛날이야기는 '듣는' 나에게 '들려줄만하다'고 생각하는 '선택된' 옛날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왜 하필 '그' 이야기인지는 문득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문득 궁금증이 폭발해,

20대 후반이 된 지금에서 갑작스레 "옛날이야기 좀 해줘"라는 말을 꺼냈다.

엄청난 부끄러움이 몰려왔고,

아빠 또한 멋쩍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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