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이야기 하나
뉴스에서는 111년 만의 폭염이 왔다고 했다.
덥다. 아는 동생을 만나려고 5분 걸었더니 그새 등허리가 다 젖었다. 집 앞 슈퍼 가는 것마저 짜증날 지경이라 요즘은 웬만하면 집에 박혀 있다. 에어컨 바람을 쐬며 마룻바닥에 누워있으면 이런 게 행복인가 싶다. 어쨌든. 해가 떨어지기 전에 집에 도착해 누워있으면 진풍경이 펼쳐진다. 가족들이 하나 같은 모습으로 집에 들어오는 것이다. 몇 시간 전에 내가 짓던 표정을 한 채로. 그리고 거실에 모여든다. 오손도손. 그 때쯤 되면 나는 몹시 어색하다.
사실 우리 가족은 화목하지 않다. 좀처럼 살갑지 않은 성격들이기도 하지만, 결국 돈 때문이다. 나는 돈이 관계를 얼마나 쉽게 망가뜨리는지 알고 있다.
똑똑하지만 가족을 위해 희생한 장녀와 성실하지만 물러 터진 장남의 만남. 부모님은 전형적인 한국 가정을 꾸리고 살아왔다. 사회에서 개고생하며 돈을 버는 남편과 그 돈으로 알뜰하게 살림만 했던 부인. 풍족하지 않았지만 부족함도 못 느꼈다. 중소기업 부장의 그가 무슨 대표 직함을 달기 전까지는. 그는 사업 대박의 희망을 품고 부인에게 손을 벌였다. 하지만 실패. 사장이 된 그녀는 영문도 모른 채 신용불량자가 됐다. 낯선 이들이 문을 두들겼고 우리는 티비부터 껐다. 그리고 두들기는 소리가 멎을 때까지 숨 죽였다.
빌려준 돈과 빌려달란 사람의 행방은 지금도 묘연하다. 소송도 불사했지만 이미 그는 철저히 당했고, 똑똑한 그녀는 그제서야 참는 것을 그만 뒀다. 눈치만 보는 남편을 데리고 파산 신청을 했고, 이제는 남편 몰래 노후 자금을 마련하고 있다. 20년의 결혼 생활이 남긴 것은 빚, 한숨, 한탄, 불만. 그리고 각방. 둘은 웬만하면 같은 자리에서 마주치려고 하지도 않는다. 대화는 기껏해야 보험이나 공과금 납부 말고는 없다. 자식들의 노력도 별 소용 없다. 사실 나도 꽤 오래전에 포기했다. 그런데 이 빌어먹을 더위가 우리 가족을 거실로 불러 모은 것이다.
이제 슬슬 자정, 에어컨은 열심히 돌아간다. 쇼파에 동생과 아버지, 의자에는 나, 바닥에 어머니가 있다. 티비에서는 별 재미도 없는 개그와 시답지 않은 이야기가 오간다. 정적을 채우는 고마운 사운드. 그 때,
"아들아, 너 휴가 때 강릉갈 수 있냐?"
또 다시 정적. 아버지의 별 거 아닌 질문에 웃음이 난다. 입을 떼기 위해 고민했을 시간을 생각한다. 나를 향한 질문이 아니다. 그래, 이번 여름엔 어머니 고향인 강릉으로 가겠구나. 다 같이 가겠구나. 엄마는 그 말을 들었는지 자고 있는지 그저 뒤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