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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진 Sep 05. 2018

또 시간을 버렸다

9월의 이야기 셋

어느덧 예비군 6년 차. 마지막 훈련을 위해 훈련장으로 가는 길은 기대감만이 가득했다. '6년 차니까 오늘은 조금 일찍 끝내주겠지'라는 생각과 '내년부터는 이제 이런 무의미한 훈련도 더 이상 없다'라는 해방감에 웃을 수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예고된 비 예보, 그리고 훈련장으로 향하는 길에 쉼 없이 움직이던 내 차의 와이퍼 역시 나의 편한 하루를 예고했다.

     

기대감이 컸던 만큼 실망이 컸다. 훈련장 입구에 도착할 때까지 쏟아지던 빗방울은 훈련 시작 시간과 동시에 증발했고, 하늘은 참 맑았다. 마치 유종의 미를 거두라는 듯이 뜨거운 햇볕을 지상에 내리꽂았다.


본격적인 훈련에 앞서 교관 중 한 명이 대형 스크린을 통해 훈련 과정을 설명했다.

-이런 훈련도 있고, 저런 훈련도 있습니다.

-자율적으로 움직이면 됩니다.

-교관들 통제에 잘만 따라준다면 일찍 보내주겠습니다.


초등학생도 속지 않을 당근을 내걸었다. 이미 대한민국에 속고 이 사회에도 속고 있는 사람들이 그 정도에 넘어가겠습니까.


어찌 됐든 간에 훈련은 시작됐다. 모두 6년 차 예비군들로 구성됐기에 훈련을 가장 빠르게 마칠 수 있는 최단 경로, 그리고 최고의 실력을 겸비했다. 우리 조는 총 6개 훈련 종목 중 4개를 완료했다. 시간은 낮 12시 정각. 강당으로 모이는 시간이 12시 20분이었기에 한 종목을 더 마칠 수 있었다. 각개전투장에 도착했을 때 다른 조는 없었다. 기다림의 시간도 없다면 이 훈련을 채우고, 오후에는 영상 시청으로만 시간을 때우면 됐다. 2013년부터 예비군 훈련에 참여하면서 거둔 최상의 성과였고, 정말 부지런히 움직여서 열심히 해낸 성과였다.

     

하지만 담당 교관은 "오전에 4개 이상 하면 안됩니다"라며 우리를 쫓아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왜 안되냐"라고 묻자 "오전에는 4개 이상 할 수 없다"라는 말 같지도 않은 답을 내놓았다. 논리도 없고, 감정도 없었다. 나는 다시 따져 물었다. "자율훈련이라더니 이런 부분에는 자율이 없는 겁니까?"라고. 그 말에 교관은 나를 노려보기만 할 뿐 "그냥 오후에 하세요~"라는 답만 되풀이했다. 현역에서 오랜 장교 생활을 하다가 동대장이나 교관으로 취임했어도, 군대 시절 그 '까라면 까'라는 습관을 버리지 못한 듯했다. 우리 조는 그저 '열심히'만 했을 뿐인데 노력은 보상받지 못했고, 결국 예비군스럽게 시간을 버렸다.


점심은 도시락이었다. 현역 병사들의 월급과 병영 환경은 꾸준히 개선되는데 예비군은 도시락을 먹었다. 덜한 환경에 부족한 월급을 받으면서 군 생활을 마쳤고, 전역 이후에도 예비군 훈련장에 불려 와 시간을 버리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나마 훈련 대가로 받을 수 있는 것은 고작 차비 7000원이지만 왕복 기름값을 생각하면 내 돈 내고 쓸데없이 시간을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 오후 훈련도 이동해서 대기하고, 교육받기 전에 대기하고, 그냥 대기하고.


훈련은 정확히 오후 4시가 넘어서야 종료됐다. 쓸데없이 버리는 시간만 잘 관리해도 오전 내로 끝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교관들이 그렇게 강조하던 통제에 잘 따라도, 통제는 새로운 통제를 낳았고 결국 무의미한 시간을 만들었다. 아무런 의미, 효율, 과정조차 없는 훈련을 6년이나 해낸 나 자신이 기특하고 뿌듯할 정도. 이래 놓고 대한민국 군인이었던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라고? 기분 좋게 다녀올 수 있는 군대를 만들겠다고?


에라 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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